내가 디워를 보면서 느낀 자긍심은 영화적인 것은 아니었다.
영화 화려한 휴가를 보고 나서 만들어진 관객들의 숙연한 표정은 시놉시스를 보거나 매체에서 소개된 내용을 읽으며 내가 보였던 표정과 같은 것이었다.

어차피 영화는 대중성과 상업성을 지향해야 한다지만 나는 이 정의는 반쪽 짜리라고 생각한다.

즉 영화는 대중성과 상업성을 지향함과 동시에 지양해야 한다.

거기에 영화적 모순성이 숨어 있다.

 

영화는 이미지로 말한다.

영화의 이미지는 텍스트의 기능도 하면서 텍스트를 뛰어넘기도 한다.
원작과 영화 이미지는 종종 비교의 대상이 되는데, 영화가 우위를 보이는 경우는 텍스트의 한계를 뛰어넘었기 때문이다.

디워의 이미지는 어떤가?


SF : 과학적 공상으로 상식을 초월한 세계를 그린 소설. 공상 과학 소설. [science fiction]
SFX : 영화의 특수효과. 원래 SFX는 음향효과(sound effects)의 약칭인데 한국과 일본에서 점차 그 뜻이 확대되어 특수효과를 가리키게 됨.

디워는 SF영화라기보다는 SFX영화라고 해야 한다. 내가 감동한 지점은 아마도 "우리 나라에서도 저런 장면이 나오나?"일 것이다. 그것은 영화 "씨받이"가 문화적 독특함으로 베니스의 선택을 받은 것과 흡사하다.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부분은 '심형래의 강요'이다. 영화에 대한 시끄러운 평판이 미치지 않도록 매우 이른 시점에 영화를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심형래의 역경'류의 비 영화적 요소에 나는 상당 부분 노출되어 있었다. 때문에 분명한 비판이 필요한 부분에서도 '용가리'와 비교하며 스스로 작품에 대해 정당화하려고 애쓰는 모습을 발견했다. '심형래의 강요'는 영화 관계자들의 주요한 마케팅 전략이다.

그러니까 디워의 상당 부분은 영화적 요소가 아니라 마케팅 요소라고 평가해야 할 것이다.

심형래의 영화에 대해서 굳이 논평을 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심형래 영화가 어떤 위상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말해야 할 것 같다. 나는 이 영화는 '영구와 땡칠이'와 같은 선상에 놓고 싶다.
어릴 적 지방에서도 영화관 하나 없는 벽촌에 살았던 나는 메이커 신발을 사러 버스를 오래 타고 시내로 가야 했다. '신발 사기'는 당시 우리 또래에게는 매우 소중한 행사였는데, 영화를 한편 보기 때문이다. 그때 보려고 했던 영화가 영구와 땡칠이였다. 불행히도 영화는 매진되었고, 몇 달 뒤 비디오가 있는 친구네 집에 수십 명이 들어앉아 쥬스를 마시며 보아야 했다.

심형래는 아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려고 영화를 만든다고 했다. 그렇다면 디워 역시 12세 이하의 청소년들에게 유익한 영화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말은 동시에 12세를 거느리는 가족에게도 유익한 영화라는 의미이다.

내가 화려한 휴가를 보려고 했던 이유는 '부채의식' 때문이었다. 나는 영화 관계자들에게 이 점이 매우 유력한 마케팅 수단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일까. 영화는 유난히 부채의식을 강조하고, 민감한 부분에서는 과장된 연출을 서슴지 않았다.

함께 영화를 본 동료들이 '불편함'을 느낀 점은 바로 그것이었을 것이다. 불행하게도 나는 이요원이 그렇게 울부짖고, 안성기가 희생하고, 김상경이 폭도가 아니라고 목숨을 걸고 항변해도 눈물샘이 자극되지 않았다. 눈물샘이 옹골찬 사람들에게 이 영화는 '무의미'로 다가온다.

뜬금없이 영화를 보면서 나는 '라디오 스타'와 '웰컴투 동막골'을 상상했다. 라디오 스타를 떠올린 것은 안성기에 대한 연이은 실망 때문인데, 묵공과 화려한 휴가에서 안성기는 매우 가식적인 캐릭터를 보여주었다. 라디오 스타에서는 살가운 연기력과 진솔한 감정처리가 일품이었다. 피천득의 마사코처럼, 묵공과 화려한 휴가는 보지 않았어야 했다. 본 것은 화려한 휴가며 잃은 것은 안성기다.

웰컴투 동막골이 떠올린 이유는 화려한 휴가의 과장된 액션이 몹시나 거북했기 때문이다. 특히 김상경이 '나는 폭도가 아니다'고 오버액션한 부분에서 실망의 절정에 달했다.

웰컴투 동막골은 한국전쟁과 민간인 학살을 바라보는 관점으로 가득 찬 영화다. 마지막 반전 역시 훌륭한 '종합'을 이루고 있다. 이 영화와 비교하는 것이 무리는 있겠지만, 나는 한국의 현대사나 실존인물 등을 그릴 때는 이와 같은 관점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주요 언론들이 연일 화려한 휴가에 대해서 극찬을 하는 것과 이 영화의 값이 같다.

이 영화는 사실이라는 편린으로 이루어진 저널리스틱한 영화가 아닐까?


두 영화를 보면서 한국영화와 한국영화 시장에 관해서 드는 생각.

이런 식으로 한국영화가 살아나는 것이라면 한국영화는 좀더 길게 엎드려 있는 게 낫지 않을까.

영화에도 영혼이란 게 있다면 한국영화의 영혼은 메피스토펠리스에게 가 있다고 생각한다.

디워는 가족영화이므로 차치하고서라도,

한국 현대사에서 몹시 중요한 시점을 다루는 화려한 휴가가 이처럼 비겁한 방법으로

관객을 모으려 한다면 나는 차라리 조폭 영화나 선택하려 한다.

아주 진지하게 속은 느낌이다.

 

사실 내가 화려한 휴가에 이런 혹평을 할 이유는 없다. 안성기를 잃은 슬픔이 컸기 때문일 것이다.

다만 화려한 휴가에게 하고 싶은 말을 한다면,

한국영화의 입장에서도, 한국현대사의 입장에서도 이 영화는 진전을 보여 주지 못했다.

이것은 조폭물 수준은 아닐지라도, 다른 의미의 '소재주의'이다.

영화의 문법을 뛰어넘을 수는 있지만, 무시할 수는 없다.

나는 잃어버린 한국영화의 영혼을 어디서 위로받아야 하는 걸까?

 

화려한 영화에게 민중가요 한 꼭지를 전한다.

"두부처럼 금남로에 베어진 너의 젖가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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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루은 2007-08-06 2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어으, 글 좋습니다.

승주나무 2007-08-06 2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드디어 나루은 씨 등장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