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모두 비우고 떠난 권정생, 그가 채워주는 것들
입력: 2007년 05월 21일 18:12:16
 
타계한 동화작가 권정생의 삶은 ‘녹색 세상’을 열고 홀연 사라지는 흡사 봄바람 같았다.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 것도 남기지 않았지만, 세상을 위해서는 많은 것을 남겼기 때문이다. 혈육은 아예 없었고 5평짜리 흙집도 허물어 자연으로 돌려보내라고 지인에게 당부했다. 혹시라도 자신을 기념하는 일은 제발 없도록 하라고 일렀다. 그가 생전에 남긴 유언은 새삼 우리 주위를 돌아보게 한다. ‘인세는 굶주리는 북녘의 어린이를 위해 써달라. 남과 북이 통일을 이뤄 잘 살았으면 좋겠다. 시신은 화장하여 집 뒷산에 뿌려 달라.’ 권정생은 진정 남아있는 사람들을 부끄럽게 만들었다.

그는 우리 시대에 가장 진실한 동화작가이며 시인이었다. 삶과 문학이 일치했다. 동화 속 주인공들은 바보, 장애인, 노인 같은 약자들이거나 똥이나 돌, 풀처럼 볼품 없는 것들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존재들, 그것들을 가장 따뜻하게 바라보고 보듬었다.
그는 평생 시달렸던 병마까지도 쓰다듬고 달랬다. 자신도 가장 낮은 곳에서 세상의 한 귀퉁이를 빌려 썼다. 새가 나뭇가지에 둥지를 틀 듯이. 그리고 그 둥지까지 없애라 일렀다. 진정 무소유의 삶이었다. 욕심이 욕심을 낳는 이 시대에 그와 함께 있음이 우리에게 위안이었다.

그는 어린이 때문에 인세가 생겼으니 어린이를 위해 쓰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했다. 인세를 돌려줌으로써 그가 남긴 100여편의 동화까지 영감의 원천이었던 어린이에게 나눠주었다. ‘너희들에게서 받았으니 내 것이 아니다.’ 세상 끝에서도 그는 어린이처럼 맑았다. 세상의 가식과 허울을 사르고 권정생은 떠나갔다. ‘강아지 똥’이 부서져 민들레 속으로 들어가 꽃을 피웠듯이 그도 우리에게 많은 것을 주고 떠났다. 그는 비움으로 우리에게 많은 것을 채워주었다. 이름을 팔고, 지식을 늘리고, 재주를 부풀리는 데 익숙한 우리들에게 권정생은 나눔과 배려와 낮춤이 무엇인지를 일깨우고 있다. 주어진 것에 감사하고, 주위의 모든 것을 섬기다 사라진, 그 끝이 아름다운 사람. 우리는 작가 이전의 성자, 권정생을 떠나 보냈다.


[기고] 권정생 선생님, 거기 가셨나요?
입력: 2007년 05월 22일 16:33:06
 
지금쯤 어머님은 만나 보셨겠지요. 어떠세요. 선생님께서 그리도 염원하시던 평화와 사랑이 넘치는 곳에 계시던가요? 슬픔도 고통도 싸움도 없는 나라에 살고 계시던가요? 그렇다면 저희도 안심입니다만, 무엇보다도 오줌 받아내는 보따리를 차지 않아서 기쁘기 짝이 없습니다. 정말 가실 때 뵈니 그렇더군요. 이젠 배에 난 구멍만 아물면 될 것 같습니다. 좋아지면 어머니 손잡고 그렇게 가고 싶어 하신 청송 화목 근처 외삼촌 살던 칠배골도 가보시고, 안동 장터 어디 자장면도 마음 놓고 많이 드시길 바래요. 모든 것을 어린이들에게 주고 가셨지만, 어머니 모실 차비랑 자장면 사드릴 돈은 그래도 좀 가지고 가셨겠지요? 저런, 얼굴이 빨개지셨네요. 뒤춤에 감추신 거 다 알아요. 걱정 마세요. 거기선 선생님도 어머니 손을 잡은 어린이가 분명할 텐데, 뭐 어때요.

부모 살아생전 효자 별로 없고, 죽은 뒤엔 불효자 드문 게 인생인 거 같아요. 선생님 가시고 나니 이렇게 효자인 척 하는 제 꼴 좀 보세요. 마치 선생님 돌아가시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호상을 맡아 일사천리 장례를 치르고 무슨 공치사를 바라는 양 이러고 있음을 용서해 주세요. 생전에, 선생님 뭐 필요한 거 없으세요, 뭘 좀 해드릴까요 하면 다 물리치시고는 오직 한 가지 “그케 해주고 싶은 게 있으만 내 대신 아파주기나 해라. 쯧쯧. 거 봐라. 그것도 못 하믄서 뭘 자꾸 해 준다꼬 그노” 라고 말씀하셨지요. 이젠 그런 핀잔도 들을 수가 없게 되었네요.

선생님. 이젠 하늘나라를 생각하면 든든합니다. 그동안 우리 어린이들이 굶주리고 슬프고 아프고 해도 참 무심한 하느님들이 많으셨는데, 이젠 선생님께서 가 계시니 뭐가 걱정이겠어요. 이젠 시간만 나면 그런 어린이들을 찾아가셔서 위로하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실 텐데 말이에요. 선생님의 작품은 그런 의미에서 불경이고 성경이며, 그래요, 이미 아이들을 위한 경전이 되어 있으니 하느님 역할만 해 주시면 되겠네요. 선생님이 그리신 착한 하느님 말이에요. 아니, 평소 착하기만 해서는 못 쓴다고 하셨으니, 착한 마음을 몸으로 움직이는 하느님이면 좋겠네요. 마음이 바쁘시겠지만 서두르진 마세요. 우선 어머님하고 좀 지내시면서 맛난 것 많이 드시고 몸도 돋운 다음에 하세요. 괜히 성치 않는 몸으로 과로하여 거기서도 오줌보 차고 계시면 큰일 나잖아요. 오줌보 찬 하느님은 좀 그렇잖아요.

참, 이번에 선생님 누나, 동생, 조카들이 다 오셨어요. 반가웠죠? 모두들 많이 슬퍼했어요. 특히 조카들이 많이 안타까워했답니다. 생전에 누구에게나 찾아오지 마라는 말을 자주 하셨는데 조카들에게도 그러셨나보죠? 그것은 남에게 피해 끼치기 꺼리는 선생님 성품인데, 그걸 모르고 많이 섭섭했던 것 같아요. 장례를 치르는 과정에서 그것이 오해였다는 걸 알고 무척 가슴 아파했답니다. 우리들도 가족들이 선생님 챙기지 않는다고 오해한 것도 풀렸답니다.

5월입니다. 10년 전 이맘때쯤 내 아버지 저기 가셨는데, 올해는 또 찔레꽃 길을 따라 선생님도 저기 가셨습니다. 선생님 뿌려진 부모님 무덤 중에 유독 어머니 봉분에만 뻐꾸기 울 때 핀다는 뻐꾹채 한 송이 환하게 피어 있었습니다. 그건 선생님이 달아 주신 거죠? 시치미 떼지 마세요. 다 알아요. 너무 어머니만 챙기지 마시고 슬픈 아버지도 좀 챙겨 주세요. 아셨죠, 아부지. 참, 진짜 아부지 되시려면 유언장에서처럼 건강한 남자가 되어 연애해서 장가 꼭 가세요. 꼭요.

〈안상학 시인〉

[이대근 칼럼]권정생, 그의 반역은 끝났는가
입력: 2007년 05월 23일 18:23:25
 
경향신문 문화부는 지난 17일 출판사로부터 부음 하나를 전해들었다. 그리고 두어 시간 지나 망자(亡者)를 돕는 분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영정으로 쓸 사진이 없다면서 경향신문에 게재됐던 그의 사진을 보내 줄 수 없느냐고 물었다. 영정으로 쓸 사진 하나 남기지 않고 떠난 그는 누구인가. 평생 살아온 5평짜리 흙담집은 남김없이 헐어 자연상태로 되돌려 놓고, 인세로 들어올 돈은 북한·아시아· 아프리카의 가난한 어린이에게 나눠주고, ‘나를 기념하지 말라’며 나이 일흔이 남긴 흔적을 이 세상에서 말끔히 지워버리려는 그는 누구인가. 권정생. 도쿄 혼마치 빈민가 뒷골목에서 태어났다. 식민지, 분단과 전쟁, 굶주림의 골짜기를 넘은 그는 제대로 배우지도 먹지도 못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나무장수·고구마장수·담배장수를 했고, 10대에 결핵·늑막염·폐결핵·신장결핵·방광결핵을 앓았다. 그래도 살아남아 경상도를 떠돌며 걸식을 했고, 운좋게도 가난한 예배당 종지기 자리를 얻었다. 그의 거처는 예배당 부속 토담집. 겨울엔 춥고 여름엔 더운 그 곳에는 찢어친 창호지로 개구리가 들어와 놀다갔고, 잠자는 밤에는 쥐가 발가락을 깨물고 돌아갔다. 그는 거기에서 동화를 썼다.

-문학을 통해 세상에 맞서-

그리고 어지러운 세상을 담아내기 턱없이 부족한 지면에서도 그의 부음이 한 구석을 차지할 정도로 그는 꽤 알려지게 되었다. 어느새 아름답고 감동적인 글을 쓰는 유명 아동문학가가 된 것이다. 그는 자기 인생처럼 못나고 버림받고, 가난하고 하찮은 것들에 관해 써왔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의 글을, 이 풍지고 흐벅진 세상의 지루함을 달래주는, 추억의 당의정이 입혀진 ‘힘들었지만, 아름다운 시절’의 이야기로 소비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동화는 세상을 예쁘게 포장한 선물세트가 아니다. 그 것은 그가 살아온 방식도, 글쓰는 방식도 아니다. 그는 전사였다. 그는 살아 숨쉬는 동안 생활이라는 최전선에서 그가 보고 듣고 알고 겪은 모든 모순과 부딪치며 하루도 쉬지 않고 싸웠다. 그는 농민들이 낫과 곡괭이를 들고 착취계급에 저항하다 실패한 역사를 슬퍼했다. 물질이 한정된 세상에서 몇 사람이 풍요롭게 살기 위해 나머지는 가난하고 고통스럽게 사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승용차를 버리면 기름 걱정안하고 전쟁할 이유가 없어지고, 우리가 파병을 안해도 된다고 믿었다. 미국은 절대악이었다. 약탈과 살인으로 강국이 되고, 전세계 인구의 5%가 세계 자원의 50%를 소비하는 미국은 그의 눈에 악마였다. 그리고 그 악에 맞선 테러리즘을 “새끼 빼앗긴 엄마 닭이 적한테 자기 목숨을 내놓고 달려드는” 것처럼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얼마나 위험한 인물인가!

반공주의와 국가주의의 서슬이 퍼렇던 1985년에는 ‘초가집이 있던 마을’을 썼다. 아버지는 월북하고, 남은 복식이는 동족을 살상하는 무기를 들 수 없다며 징집을 거부하는, 양심적 병역 거부가 주제이다. 이게 그가 스스로 꼽은 최고작품이다. 석유·자동차·전쟁·미국·자본주의와 터럭만큼의 타협도 용서도 화해도 하지 않았다. 신채호·장준하·함석헌을 존경하는 그는 히틀러를 죽이기 위해 암살단을 조직한 디트리히 본 회퍼 목사를 닮고 싶어했다. 물론 그는 안중근처럼 권총도 없고, 화염병을 던지지도 않고, 테러를 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는 그 이상의 것들을 했다. 저 깊은 곳에서 울렁거리는 분노를 삭이고 녹여, 그 진액을 짜내 시와 동화, 산문을 쓴 것이다. 그는 탐욕과 죽음의 공포로 가득한 이 세상의 전복을 꿈꿨다. 이 세상의 한 구석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 전체에 대한 반역을 꿈꿨다. 욕망의 체계인 자본주의 한 가운데에서 그는 무욕, 절제, 가난을 무기로 정면 대결했다. 사람들이 그의 베스트셀러 ‘우리들의 하나님’을 어떻게 읽고 있는지 모르지만, 31쪽에는 “함께 일해 함께 사는 세상이 사회주의라면 올바른 사회주의는 꼭 이루어져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끝이 아닌 평화의 길로…-

가난하고 늙고 병든 아동문학가는 이 사회에서 전혀 위험하지 않다고 생각했다면 잘못이다. 버림받고, 병들고 가난한 자가 세상과 잘 어울리다는 것 자체가 기만이다. 그는 매우 위험하고 불온한 사상가였고, 반역자였으며 혁명이 사라진 시대의 혁명가였다. ‘위대한 부정의 정신’의 소유자였다.

그런데 왜 그의 죽음은 인생의 종말이 아닌 평화를 느끼게 할까. 그에게 소멸은 무엇이기에 슬프기보다 아름다워 보일까. 한 줌의 흙, 한 포기 풀과 같이 살았기 때문일까. 그는 “싸움이라는 삶이 끝났을 때라야 평화라는 안식을 얻을 수 있다”고 했다. 지지배배 짖던 작은 새가 숲속으로 날아가듯 그는 그렇게 가버렸다. 가장 치열하게 싸운 전사에게만 돌아가는 휴식이다.

〈이대근/정치·국제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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