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사상 시리즈를 시작한 지 3개월이 넘었는데, 여태껏 사서를 정리하지 못했네요. 애초에는 한 달에 하나씩 다루려고 했는데, 무리했나 봅니다. 이걸로 먹고사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생활의 저항이 만만치 않네요. 이번 회부터는 '사회화'를 시도하기로 했습니다. 실제로 이번 글을 쓰게 된 계기도 '총기난사 사건'입니다. 만약 고전이 사회적 현상에 대해서 코멘트를 하지 않는다면 현재적 가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고전에는 항상 그에 어울리는 사회적인 주제를 다루기로 했습니다. 혹시 시리즈를 기다리신 분들에게는 죄송한 마음이 있네요. 아래는 지난 시리즈의 목록입니다. 링크를 걸었으니 혹시 관심있는 분들은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동양사상1]<논어> 정제된 인생의 철학적 시, 혹은 시적 철학

[동양사상2]<맹자>난세에 지성인으로 산다는 것

 

 

모든 學은 大學이라야 한다

- 총기난사사건과 관련하여

 

1. 사설

 

나는 버지니아 공대에서 벌어진 총기 난사사건을 문화가 저지른 살인으로 규정한다. 그리고 미국에서 제기되고 있는 총기 허용에 대해서 대학은 '불행하지만 미국에서 총기 금지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라고 결론을 맺고 있다. 이렇게 심각하게 이야기를 시작하는 이유는 바로 이 사건이 學에 대한 심각한 왜곡에서부터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다소 과장된 면이 있지만, 미국에서 유학중인 한국인 학생들은 한국으로 파견된 미군과 비교될 때가 종종 있다. 미군들은 잊어버릴 만하면 엽기적인 성폭행(60대 할머니를 성폭행하는 등)이나 폭력으로 매스컴에 이름을 알리며, 한국인 유학생들은 방황하는 문화상이나 그 안에서 배태된 '마약 문제', '각종 폭력 문제'에 연루됨으로써 미국인들의 인상을 찌푸리게 한다. 그에 대한 결정판이 이번 총기 난사사건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사실 이 사건은 한국에 더 책임이 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한국의 교육 문화가 이번 사건의 진범이라고 생각한다. 범인은 으레 볼 수 있는 유학생 부적응자로 지금까지 나타난 정황으로 보아 미국 유학길로 내몰렸으리라 생각된다. 더욱 걱정스러운 것은 10만에 가까운 유학생이다. 이들 중에 더러는 성공적인 유학생활을 할 수 있겠지만, 잠재적 부적응자가 자꾸 늘어나는 것은 매우 걱정스런 대목이다. 

 


미 이민세관국(ICE)이 최근 공개한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4·4분기를 기준으로 미국 유학생 감시시스템(SEVIS)에 등록된 한국인은 9만3728명이라고 밝혔다. 이는 미국에 있는 전체 외국인 유학생 63만998명 가운데 14.9%를 차지, 출신 국가별 순위에서 1위를 기록했다. 다음으로 인도(7만6708명), 중국(6만850명), 일본(4만5820명), 대만(3만3651명) 등의 순이었다.

- 美 한국유학생 10만시대···송금도 44억弗

 

위험한 발상일 수도 있겠으나, 나는 이번 사건에서 '한국인 유학생'이라는 부분이 부각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그것은 미국보다 한국에서 경종을 울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단순히 미국에 유학보내는 것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하는 차원이 아니라, 사회 전체가 근본적으로 성찰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학부모/학생의 경우는 미국 유학이 바람직한 진로인지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할 필요가 있으며, 명문사학이라고 일컫는 이름 있는 대학과 교육 당국은 빠져나가는 유학생들을 붙잡아두기 위한 대안을 시급히 마련해야 한다.

내 글의 전매특허인 '사설'은 부담 없고 잘 읽히는 내용으로 채워져야 한다. 하지만 총기 난사사건과 같은 침통한 사건을 당하여 사설의 방향이 쏠린 듯한 인상을 받는다. 논어와 맹자에 대한 서평을 힘들게 쓰고 나서 대학과 중용은 빨리 쓸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두 과목의 분량을 합쳐야 논어만큼도 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러 가지 어려움으로 인해 두 달이라는 공백기를 보내고 말았다. 그보다 나를 더 괴롭힌 것은 내가 정한 룰 때문이다. 대학을 쓰기에 앞서 나는 두 달간 '대학'만을 청취했다. 그래서 지겨워 죽을 지경이다. 특히 관료주의처럼 체계가 딱 잡혀 있어서 극적 분위기도 나지 않기 때문에 대학을 쓰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다. 때문에 이 글을 쓰고 나서 얼른 대학에서 빠져 나와야지 하는 생각이 간절하다.

 

 

2. 왜곡된 學과 大學에 대한 오해

 

學에 대한 왜곡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정체성이 완전히 절단된 제국주의 시대부터 시작해야 한다. 물론 그 전에도 우리는 제대로 된 學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나는 우리나라가 아직도 진정한 독립국이 되지 못했으며, 광복은 찾아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최근 새삼 깨달았다. 굴욕적인 FTA 협상과정과 교육의 사회적 기능이 처참히 농락당한 버지니아 공대의 총기 난사 사건을 목격하면서부터 나는 주권 없는 국가의 국민으로 되돌아가려 한다.

일본에게 지배당하면서 조선의 지식인들은 우리의 것을 철저히 버리고, 서구의 문물에 경도된다. 전통문화는 마녀사냥을 당하고 일제 시대를 중심으로 일제 이전 문화와 일제 이후 문화는 서로 다른 두 개의 문화가 되고 말았다. 學이라는 말 자체에는 '두 사람'이 전제되어 있다. 즉 혼자 배우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의 전수를 통해 연명하는 것이다. 교육과 학습은 매우 근원적인 문제이다. 사람과 사람으로 이어지는 학문의 끈이 놓아진다는 것은 아틀라스가 지구를 들다 말고 도망쳐 버린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상호적인 學이 개인적인 學으로 분리와 변질을 거듭하였고, 성찰이자 목적으로의 學이 도구의 學으로 전락하였다. 이뿐만이 아니다. 앎의 學이 헤게모니의 시녀로 전락한 것이 매우 결정적 타격을 안겼으며 이것이 버지니아 공대의 총기난사사건은 물론 미국 유학 1위와 함께 문제아 한인 유학생들을 낳게 되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學뿐만 아니라 부모의 자식들 또한 헤게모니를 위한 도구로 전락했다는 사실이다. 선택에 의한 미국행이었다면 최소한의 책임이 있었을진대, 자의와는 무관하게 내몰렸다면 그 책임은 내몬 자 즉 한국사회가 져야 하는 것이다.

이제 대학으로 돌아오자. 대학은 예기의 편명으로서의 위치와 사서로서의 위치를 구분해서 이야기해야 한다. 먼저 사서로서의 위치는 소학과 대학이라는 교육의 두 방향으로 정리할 수 있다.

 

삼대(하은주)가 융성할 때는 그 법도가 사뭇 잘 갖춰져 있었다. 때문에 왕궁이 있는 서울에서부터 일개 향촌에 이르기까지 교육기관이 없는 곳이 없었다. 여덟 살이 되면 왕의 공자로부터 서민의 자제에 이르기까지 모두 소학으로 들어가서 청소하고 어른을 모시고 집안에서와 밖에서 해야 하는 행동지침과 예절, 음악, 활쏘기, 말타기, 글쓰기, 점괘 보기 등 기본적인 교양을 가르쳤다. 그리고 열다섯이 되면 역시 천자의 자제나 대신의 자제, 그리고 서민의 자제 중 뛰어난 자를 가려 모두 대학에 들어갔다. 거기서는 이치를 궁구하고 마음과 몸을 다스리는 도를 심층적으로 익혔으니 학교에서 가르치는 크고 작은 과목들이 적절히 분류되고 완성되었다.

- 대학 서문(주자)

 

그러니까 소학은 플라톤이 주창한 지,덕,체 중에 체에 해당하는 '김나지움'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렇다고 소학을 '초중등 과정'이라고 생각해서는 곤란하다. 다만 천지자연의 형이상학적 이치를 초중등이 이해할 만한 수준으로 풀어놓았고, 성찰의 근원이 되는 '행동의 표본'들을 축적하는 시기가 소학의 시기인 것이다.

이것은 송대(宋代) 이후의 관점이므로 대학의 본래 취지와 다를 수 있다. 대학은 원래 예기(禮記)라는 경서의 한 편명이었다. 여기서의 대학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었는지는 예기를 확인해야 하는 문제이므로, 이 글에서는 '學'에 관한 이야기로 갈음하려 한다. 한중일은 '배움'이라는 말을 어떻게 표현할까. 우리나라는 '공부(工夫)'라고 하고, 일본은 '면강(勉强)', 중국은 그냥 '學'이라고 한다. 공부는 불교 용어인 듯하다.  ‘공부(工夫)’는 수행에 전념하는 것, 또는 수행에 노력하고 실천하는 것을 말하며, 본분에 힘을 다하는 것이란 뜻이다. 공부(功夫)라고도 하며, 주로 선종에서 많이 쓰며, 선수행에 힘쓰는 것을 말한다. '면강(勉强)'은 원래 중용에 나온 구절로서 '면강이행지(勉强而行之, 고된 노력 끝에 실천할 수 있다)'의 의미이지만, 일본에서는 '산고와 같이 엄청난 공력이 들어가는 노력'이라는 의미이다. 이에 비해 중국은 學이라는 일반명사를 쓰고 있다. 13억 중국인의 교과서인 논어의 가장 첫머리의 제목이 '학이(學而)'라는 말에서도 보듯 중국인들은 배움에 대해 별다른 이름을 부여하지 않는다.

이것은 동아시아 국가들이 가지고 있는 문화적 환경일 수도 있지만, 공부에 대해서 특별한 이름을 부여하고 미화하는 부분만큼은 주목할 만하다. 일반명사가 아니라 특수명사가 될 때, 그것은 자칫 특권의식으로 변질될 우려가 있다. 우리나라에 들끓고 있는 향학렬이나 식자층에 대한 일반 국민의 인식 등을 종합해 볼 때 學은 보편성을 갖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신분극복을 위한 주무기로 완전히 전락했다고 결론내릴 수 있다. 양극화를 가장 고착화시키는 것이 바로 '학력 세습'이라는 사실은 주지의 사실이다. 비근한 예로 어른들이 말하는 '공부해라, 공부해라' 역시 일반명사로서의 學이 아니라 신분상승이나 신분유지, 헤게모니 쟁취를 위한 도구적 특수명사라고 할 수 있다.

대학에서 빠지지 말아야 할 것은 바로 '大'의 쓰임이다. 이 글자를 쉽게 파악할 수 있는 단어가 있다. 바로 大人과 巨人이다. 거인은 외양이 큰 사람을 의미하며 대인은 내면이 큰 사람을 의미한다. 즉 대인은 외양과 무관한 그 사람의 본질을 지칭하는 표현이다. 大國과 强國은 어떤가. 강국은 미국처럼 깡패같이 힘만 센 나라를 지칭한다. 세계의 지도국이 될 수 있는 나라는 그런 나라가 아니라 모든 나라를 감화할 수 있는 나라를 말할 것이다. 그리고 일상에서 쉽게 오해하는 말 중에 고학력자와 대학자가 있다. 고학력자는 가방끈이 긴 자를 말하는데, 이것 역시 대학자와 구분이 된다. '雖曰未學 吾必謂之學矣(그가 비록 공부를 하지는 않았지만 나는 기꺼이 그에게 '學'이라는 이름을 부여하겠다'(논어)라는 공자의 말과 같이 대학자는 가방끈과 상관 없이 많은 사람의 사표가 될 만한 사람이었다. 실제로 대학은 '대인의 학문'이라고 한 마디로 정의된다. 결국 대학이라는 말 속에는 人이 감추어져 있으며 강력한 휴머니즘을 함의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3.  大學의 체계와 특징

 

대학은 한 마디로 삼강령 팔조목으로 규정된다. 즉 천성적으로 품부받은 선한 덕망을 확충시키는 데 있으며(在明明德), 이를 통해 만백성에게 혜택이 골고루 나눠지도록 하여 나날이 거듭나도록 만들며(在新民 또는 在親民이며 함께 해석함), 한계를 명확하게 인식하고 지극한 선의 경계를 넘어서지 않게 하는 데 있다(在止於至善)

이를 실천하는 방법론으로 배움의 과정이 유기적으로 연계되는데 그것을 팔조목이라고 한다. 즉 온세계의 지도자가되기 위해서는 우선 국정을 성공적으로 수행해야 하며, 국정에 앞서 가정을 잘 다독여야 하며, 온가족이 신뢰하고 존경할 만한 교양을 이뤄야만 한다. 이것이 행위의 준칙이다. 이어서 인식의 준칙이 나온다. 교양이 온몸에 충일하려면 마음공부를 바르게 해야 하는데(正心), 마음공부는 한치의 태만함도 없이 지극하고 전일한 성실함에서 나온다(誠意) 마음을 집중시켜 전일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무지의 안개가 걷혀야 한다.(致知) 지식의 최고 경지는 마음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 사물과 동화되는 데 있다.(格物) 재미있는 것은 이 과정이 역순으로 반복되는 데 있다. 여기서 우리는 대학에서 말하고자 하는 순환의 체계를 살펴볼 수 있다. 상향식도 아니고 하양식도 아니며 상호 쌍방향성을 가지고 지속적으로 순환하는 음양이론의 발현을 대학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나머지 장구들은 삼강령 팔조목의 주석에 해당한다.

 

대학에서 재미있는 것은 지식의 한계를 설정한 것이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한계란 지식의 유한성과는 별개의 문제이다. 인식의 한계가 결정되는 순간 행동과 실천의 기반이 생긴다. 유학의 지식은 어디까지나 행위를 위한 지식이기 때문에 고도의 형이상학적 사유를 지양하고 있다. 서양과 달리 동양은 문자에 대한 독점현상이 강하지 않았다. 주자가 서문에서 이야기하고 있듯이 대학의 가르침은 몸소 행하고 스스로 깨달을 수 있는 것만을 선택하고 있으며, 그것 역시 일반시민이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언어와 상도를 넘어서지 않는다. 유학이 보편성을 갖게 된 데는 이러한 연유가 있다.

앞서는 '차등애'에 대해서 다뤘지만, '차등' 역시 유학이 가지고 있는 일반적인 상식이었다. 그것은 대학에서도 드러난다. 사람마다 기질의 차이가 있고 저마다 잘하는 것이 있듯이 氣는 단일하지 않다.이는 중용에서 더욱 명확하게 그려지는 데, 학과과정을 통해 학문수준이 높아지는 단계라는 것이 동양에서는 의미가 없다. 결국 스스로 깨달은 바가 그 사람을 대표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수학적으로 표현되지 않는다. 일종의 불확정성의 원리와 같은 개념이 여기서 등장하는 데 이른바 '활연관통론(豁然貫通論)'이 그것이다. 남보다 몇 배나 더 노력했지만, 깨달은 바는 남의 반도 미치지 못하는 상황이나 그 반대의 상황을 동양은 매우 일반적인 과정이라고 인식한다. 일반적인 기준보다 자기 스스로의 기준에 더 신뢰하기 때문에 그 사람의 한계를 단정짓지 않는다. 그것은 단지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그만의 굴레에 갇힌 상태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것 역시 '굴레'로 단정짓기보다는 '잠재성'으로 인정한다. 만약 그가 굴레를 벗고 일어선다면 엄청난 폭발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믿음이 깊숙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러한 경우가 번번이 소개되는데, 자발적 학습이 뿌리를 이룬 동양의 내면문화를 보여주는 단면인 것이다.

 

 

4.  大學의 이상적 모델과 몇 가지 경고

 

앞서 대학이 휴머니즘을 함의하고 있다는 지적을 한 적이 있다. 그것은 유학의 지향점이기도 한데, 한 사람의 인간으로 완성되는 정신이 바로 '심광체반(心廣體반, 반은 살질 반)'이다. 즉 덕이 온몸에 충일해 그 반반한 빛이 외양에 자연스레 드러나는 인간형을 말한다. 일관된 인식과 실천을 보이는 지행합일의 인간은 매우 드물다는 것이 유학의 판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몸소 완성한 자는 진정한 군자라 할 수 있다.

중용으로 치자면 중용의 경지에 도달한 사람이 군자라 할 수 있지만, 공자조차도 그런 사람이 극히 드물다고 고백한 바 있다. 때문에 대학은 군자가 진정한 군자로 거듭나기 위해서 피해야 할 점을 설파하고 있는데, 이 역시 대학에서 백미로 치는 문장이다.

 

1. 마음에 노여움이 있으면 바름을 얻지 못하며, 마음에 한줄기 두려움이 있어도 바름을 얻지 못하고, 따로이 즐기거나 좋아하는 바에 집착하면 역시 바름을 얻지 못하며, 따로 근심하거나 찔리는 바가 있어도 역시 바름을 얻지 못한다. 이렇게 마음이 제 자리에 있지 못하면 살펴도 보이지 않고, 귀 기울여도 들리지 않으며, 먹어도 그 맛을 알지 못한다.

2. 사람과 관계를 맺음에 있어서 따로 아끼고 좋아하는 자에 대해서는 편파적이기 마련이며, 미워하거나 천하게 여기는 자가 있으면 역시 그에게는 편파적이기 마련이며, 두려워하거나 그 이름에 압도당하는 자가 있어도 역시 편파적이게 되며, 오만하거나 소홀히 다루는 자에 대해서도 편파적이게 된다. 때문에 좋아하는 사람의 단점을 지적하는 경우와 미워하지만 그의 장점을 인정해줄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몹시 드물다.

- 대학 전문 7,8장

 

1은 '바름'을 방해하는 내적 요소이며, 2는 관계를 방해하는 외적 요소이다. 이것은 팔조목의 유기적인 순환을 몸소 갖추지 않으면 극복할 수 없는 한계이다. 내가 바르게 살고자 하여도 그렇게 살아지지 않는 이유는 바르게 살고자 하는 의지와 당위만 있지 방법론이 없기 때문이다. 참여정부가 참여의 기치를 내걸었지만, 결국 '불참정부'가 되는 것도 이와 같은 이치이다. 성찰에는 끝이 없으며 '다가감'과 '햇볕과 같은 성의'가 있어야 도달할 수 있다.

 

5. '대학' 텍스트

 

교수신문이 펴낸 '최고의 고전번역을 찾아서'에서는 김학주씨의 텍스트(서울대학교출판부)와 함께 박완식씨의 대학(여강출판사)을 소개하고 있다. 두 텍스트를 읽어보지 않아 코멘트할 것은 없으나 교수신문의 평에 의하면 김학주씨의 텍스트는 정확하고 매끄러운 원문 번역과 상세한 해석으로 일반인에게 매우 접근도가 높다고 평하고 있다. 김학주씨는 온갖 동양고전을 다 역주한 분이지만, 나 같이 '천착형'에게는 왠지 어울리지 않는 역주가라 생각한다. (이것은 개인적인 소견이다. 노자와 장자를 보면 그렇다는 말이다) 박완식씨의 텍스트는 대학의 선구적 주석가인 주자의 주장을 가장 종합적이고 체계적으로 소개하고 있다고 평하고 있다. 거기다 주자 이외의 설을 첨가해 주자를 보완했다는 점을 장점으로 꼽고 있다.

내가 접한 텍스트는 전통문화연구회의 성백효본이지만, 원문 텍스트 이외의 가치는 별로 없다고 생각한다. 그보다 이동환 씨의 『중용,대학』과 남회근 할아버지의 『남회근 선생의 알기 쉬운 대학 강의』를 언급하고 싶다. 이동환 씨의 텍스트는 자구 해석과 용어는 고지식하고 어렵지만 '천착형'에게는 다소의 만족감을 줄 수 있는 텍스트이다. 이것도 남명서당에서 교수님의 추천을 받은 텍스트라는 점을 밝힌다. 남회근 할아버지의 텍스트는 주자의 주석에 반해 독창적인 해석을 내놓는다. 책값이 비싸고 두꺼운 만큼 일상의 예시와 역사적인 이야기들을 곁들이고 있으므로, '다양한 담론'을 기대하는 독자에게 어울리는 텍스트라 생각한다.

 

      

 

 

 

 

 

6. 大學의 사회학

 

이번 총기난사사건에 대한 대학의 입장은 다음과 같다.

 

1. 이번 살인은 방황하는 청년이 아니라 문화가 저지른 살인이다.

2. 이것은 學에 대한 완전한 무지에서 비롯된 참극이다.

3. 미국의 수정헌법이 아니더라도 총기사용에 대한 금지는 불가능하다.

4. 협력사회, 협력문화의 힘을 통해 이를 극복해야 한다.

 

조선시대만 해도 살인사건이 벌어지면 국무회의에 상정될 정도로 매우 심각한 일이었다. 지금도 국무회의를 하고 있지만 '한낱 택시운전사의 자살'이라는 오늘날의 국무회의는 대체 어느 나라의 국무회의인지 부끄러울 지경이다. 조선이 살인사건에 대한 국무회의를 한 것은 사건의 희소성도 희소성이지만, 전반적인 사회분위기에 대한 당국의 유기적인 협력이 주 의제라 할 수 있다. 사회분위기가 만들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엽기적인 살인이나 불특정 다수에 대한 묻지마 테러는 일어날 수 없다. 안타깝게도 지금 우리 사회는 어떠한 엽기적인 사건도 일어날 수 있는 사회분위기이며, 그보다 더 안타까운 사실은 사회분위기 자체에 대해서 완전히 무방비하다는 데 있다.

 

세월은 흘렀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학력신장을 위주로 한 교육 병폐는 그대로라고 진단했다. “당시에도 상황은 비슷했어요. 대학을 가기 위해 전부를 걸었고 나머지는 모두 뒷전으로 밀려났죠. ‘학력신장’ 앞에 ‘인성교육’은 설 자리가 없었습니다.” ......
그는 학교교육에서 인성도, 학력도 포기할 수 없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겉보기에는 두 마리 토끼 같지만 사실은 ‘한 마리’라고 했다. 학생들의 인간관계를 우선적으로 회복시켜야 정서적으로 안정이 되고, 집중력이 생겨야 학력이 높아진다는 주장이다.

- 강석준 교장 “인성과 학력은 한마리 토끼”

 

 

"집안을 화목하게 하지 못하는 사람은 그 누구도 바로잡지 못하므로 군자는 집을 나서지 않고서도 국정을 바로잡을 수 있다"라는 말처럼 대학은 한 가정과 한 사람에게 부여하는 의미가 절대적이다. "일가가 仁을 이루면 국가에 인덕이 넘쳐나지만 한 사람이 탐욕스러운 마음을 먹으면 국가는 순식간에 산산조각난다"는 말 역시 유의할 대목이다. 가수 김흥국은 4년째 기러기아빠 생활을 하고 있는데, 평소 보이던 이미지와는 달리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 나와 매우 외롭고 괴롭고 고통스러운 심경을 토로했다. (김흥국 관련기사)이것이 우리 가정의 현주소다. 살인자 조승희 역시 방황하는 1.5세대 이민가족임을 알 수 있다. 이 모두 가족에 대해 왜곡된 이미지가 광범위하게 퍼졌다는 증거이다.

미국이 총기소유를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 역시 대학에서 이치로 증명하고 있다.

 

순임금이 천하의 사람들을 仁으로 이끌자 백성들이 이에 화답하였고, 폭군 걸주가 천하 사람들을 포악함으로 이끌자 백성들 역시 이에 화답하였다. 걸주의 백성들이 근본적으로 변화하지 않은 상태에서 만약 순임금의 인덕으로 이끌려 한다면 백성들은 극심하게 저항할 것이 분명하다. 때문에 군자는 자신이 갖춘 것만을 남에게 요구할 수 있으며, 자신이 완전무결한 후에야 남의 부당함을 지적할 수 있다.

- 대학, 9장

 

마이클 무어 감독의 '볼링 포 컬럼바인'이라는 다큐에는 '폭력의 미국 역사'가 잘 그려져 있다. NRA(전민총기협회)로 대표되는 대규모 로비 그룹은 헌법에 총기 소유를 명문화하는 데 일조했으며, 총기에 대한 여론을 압살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역대 행정부는 물론 언론까지 가세하여 전미에 공포분위기를 심어놓음으로써 무기 소비와 무기 개발에 대한 정당성을 확보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생계를 유지하고 있을 정도이다. 디트로이트와 강 하나를 사이에 둔 캐나다 도시 윈저에는 3년간 총기 살인이 1건 발생했는데, 그것 역시 디트로이트에서 건너온 미국인의 소행이라 한다.

미국의 이야기는 그만 하자. 지면을 거기에 쓸 이유는 없다. 대학을 포함한 유학은 일상적인 수준의 언어 활용에도 불구하고 거론하는 사상의 외연이 광범위하다. 하늘과 땅은 물론 한 국가, 한 가정, 한 사람, 그리고 한 사람 안에서 이루어지는 여러 가지 마음의 움직임 등에 대해서 속속들이 헤아리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중용에서 아주 거침없이 펼쳐진다.

대학이 총기 난사 사건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1인으로 시작되는 문화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거기에는 왜곡된 學을 바로 세우는 것도 포함된다. 동양의 성어에 호리지차천리지말(毫釐之差千里之末)이라는 말이 나온다. 여우 터럭만큼 조그마한 차이가 천리가 넘는 차이를 만든다는 말이다. 어떤 관점에서 생각하느냐에 따라 세상이 변한다는 것이 대학의 지론이다. 마지막으로 대학에 표현된 협력문화와 국가의 운명에 관한 문구를 인용하는 것으로 글을 마친다.

 

한 사람의 신하가 있는데 이는 매우 단정하면서 별다른 기술이 없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 마음은 맑고 깨끗해서 온몸에 관용이 넘쳐난다. 만약 자기보다 더 나은 기술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보이면 그는 마치 자신이 그 기술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기뻐하며, 지혜로운 뜻을 가진 사람이 보이면 마음 속으로 그를 신뢰하여 단지 입으로만 찬사를 늘어놓을 뿐만 아니라 그 사람이 자신의 역량을 더욱 발휘할 수 있도록 기회를 열어준다. 이것이 바로 자손과 국민을 보존하는 사고방식이니 매우 커다란 이익이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이 가진 재능을 질시하고 큰 뜻을 가진 사람의 메시지를 끝내 무시하여 그를 좌절시키고 만다. 이것은 자손과 국민을 재앙에 빠뜨리는 일이니 그 자체가 커다란 재앙이 아닐 수 없다.

- 대학, 10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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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4-19 13: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승주나무 2007-04-20 17: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런가요. 잘 몰랐네요. 세상에 알아야 할 것이 너무 많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