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 : 김종태 (민족문화추진회 국역실 전문위원)
지난해 경향신문에 승정원일기 관련기사를 연재하여 필자도 글을 실은 적이 있다. 또 근년에 와서 고전 국역에 대한 우리 사회의 관심이 높아지고 있고 최근에는 고전번역원 설립 법안이 국회에서 논의 중이다. 필자는 국역서 편수지침을 만드는데 참여하여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다가, 차제에 고전 국역에 대한 평소 생각을 좀 정리해서 당금의 賢者들에게 고견을 구하는 것이 시의에 적절할 것이라 생각되어 고전국역에 대해 부족하나마 愚見을 말해 보고자 한다.
고전국역, 한 술 밥에 배부를 수 없다
대개 일반 독자는 물론 전문 학자들조차 고전국역에 대해 번역문의 냄새가 나지 않고 보다 쉽고 간결한 우리말로 매끄럽게 표현하는 것을 매우 중요시하는 것 같다. 필자도 그런 생각에 대해 원론적으로는 하등 이견이 없다. 다만 그렇게 할 수 없는 불가피성과 항상 그것이 가치 우위에 있을 수는 없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근세 중국의 번역가 嚴復은 『天演論 譯例言』에서 信·達·雅 3원칙을 말하였다. 원의에 대한 신뢰성, 뜻을 전달하는 자연스런 표현, 우아한 문체가 바로 그것이다. 이 말은 번역인 사이에 널리 회자되었다. 楊伯峻의 제자 沈玉成은 스승의 명을 받아 『左傳』을 현대백화로 옮겼는데 ‘직역을 위주로 하고 잘 안 되는 부분은 의역을 하였다’고 언급하면서 ‘역문은 원의에 대한 신뢰성[信]에 치중하였고 餘力이 있을 경우 표현[達]과 문체[雅]를 고려하였다’라고 하였다. 또 대만의 商務印書館에서 『老子』를 번역하면서 <引述>을 두어 주석과 역문으로 다 표현하지 못한 점을 보충하고 있고, 일본 역시 1978년에 『漢詩大成』을 내면서 <餘論>을 각 시편의 마지막에 두어 번역의 미진한 부분에 대해 이해를 돕고 있다. 三民書局의 『古文觀止』 개정판도 종래의 <文章分析>을 <賞析>으로 바꾸어 이해를 돕고 있고 『東萊博議』는 각 편의 첫머리에 제목을 풀이하는 <題解>를 두고 있다. 또 중국에는 古文이나 詩·詞에 鑑賞辭典이란 이름이 붙은 책들이 많은데 이것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중국뿐 아니라 훈독을 위주로 하는 일본이나 繁體字를 쓰고 있는 대만조차도 이렇게 번역하고 있는 것은 한문고전의 번역이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는 것을 여실히 증명해주고 있다. 더욱이 우리는 중국이나 일본과 달리 원문에 주석을 다는 것이 아니라 역문에 주석을 달고 있지 않은가.
고전 국역을 한 번으로 끝낸다는 성급한 마음을 먹을 것이 아니라 우선은 전문가나 연구자들을 위한 인프라를 구축하고 다음에 시장원리를 감안한 選集의 발간이나 다양한 문화 콘텐츠의 개발 등 단계와 여유를 두고 접근하는 것이 보다 합리적일 것이다. 이해되기 쉬운 쪽으로만 번역하면 당장은 달콤할지 몰라도 장기적으로 부가가치의 창출은 오히려 떨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원의의 전달을 가장 우선시하고 典故를 가능한 한 밝혀 주는 방향으로 번역해야 한다. 또 저자나 고전의 성격, 글의 종류에 따라 번역 방식도 다소 융통성을 둘 필요가 있는데, 이런 문제는 번역에 경험이 많은 사람들의 말을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다.
용어의 정리나 내용 해설도 번역의 일부라고 생각해야
고전을 국역하는 데 있어서 오늘날의 언어와 한국어의 어법 구조로 쉽게 번역하겠다는 생각과 원전의 언어를 살리고 고전의 風格과 체취를 가급적 보여주겠다는 생각은 둘 다 중요하다. 얼핏 보면 이 둘은 상이한 방향이라 어느 한 쪽이 걸림돌일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앞에서 언급한 『漢詩大成』이 그 모순을 극복한 좋은 사례이며, 靑冥 任昌淳의 『唐詩精解』나 靑嵐 金都鍊의 『論語』는 그 분들이 무엇을 고민하였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현재 ‘知遇를 입어’ 같은 대목을 ‘알아줌을 받아’ 정도로 바꾼다거나 어느 지역에서 ‘待罪’하고 있다는 말이 ‘직무를 수행하고 있다’는 말이지 정말 죄를 져서 대죄하는 것과는 다르다 해서 오역이라고 주장하는 따위는 우리의 번역이 아직 체계를 잡지 못한 데 따른 혼선을 보여주는 사례라 할 것이다.
어떤 분들은 우리의 고전국역을 서양의 글을 우리말로 번역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하여 그 이론을 그대로 적용하려고 하는데 필자는 이러한 생각이 매우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서양의 고전은 애초에 우리가 쓰던 언어가 아니지만 한문 고전은 우리 조상들이 文語로 쓰던 언어이다. 어휘들 중 상당부분은 당대사회에서 그대로 쓰이던 말이었음을 가사나 시조, 판소리 사설 등을 보면 알 수 있다. 우리가 한문고전을 번역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조상들이 남긴 정신문화를 계승하고 발전시키자는 것 아니던가. 그런데 조상들이 쓰던 언어를 다 내버리고 어떻게 하자는 것인가. 물론 상황에 따라 가급적 풀어 독자의 편의성을 높이는 것은 그것대로 필요하겠지만 장기적 안목에서 보면 예전 사람들의 사고방식이나 언어 습관 등을 보여주기 위해서라도 적극적으로 요즘 사람들을 예전의 언어로 데려가 구경시키는 것 역시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당시의 언어를 적절히 활용해서 번역하는 것은 우리의 언어 문화재를 복원하는 것과도 맥이 닿을 뿐 아니라 한문 문화권의 공동체라는 면, 그리고 번역서를 이용한 제2의 가공이라는 측면에서도 중요하다. 예를 들어 ‘看山’ 같은 말은 한 용어에 역사, 문화적 의미가 깊이 내포되어 있어 ‘산소 자리를 살펴보다’ 등으로 바꾸는 것이 되레 부적절할 것이고 장황(粧䌙)을 『漢語大詞典』에 따라 粧潢으로 고치는 것은 조선시대에 실제로 쓰인 것과는 다르다. 이런 것을 보면 고전번역이 단순히 古語를 今語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 예전 중국의 譯經사업이나 조선조의 諺解처럼 당대의 학술 수준과 풍토를 그대로 반영한다는 생각이 든다.
번역문만을 통해 단 한 번에 원의를 다 전달하기 보다는 독자에게 다소 어렵더라도 원전의 적절한 어휘는 그대로 사용하고 필요에 따라 주석을 붙이는 한편, 각 사건이나 배경 지식에 대한 해설을 하여 독자의 이해를 돕는 것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특히 『승정원일기』와 같이 전문 학술용어가 많고 배경 지식이 필요한 기록물일 경우에는 용어집의 발간 외에도 『銀臺條例』나 『銀臺便攷』와 같은 관련 서적의 번역은 물론, 개설서 같은 것을 별책으로 준비하는 것이 정말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문집 역시 상황에 따라 그 글의 바탕이 되거나 이해를 위해 꼭 필요한 것은 적극적으로 설명을 해주어야 한다. 이렇게 하면 원의를 훼손하지 않고도 역자가 역문에 다 나타내지 못한 뜻과 그런 번역이 나온 과정을 공유할 수 있어 독자와 원문과의 가교를 만들어 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다음의 번역을 위해서도 매우 유용한 자료가 될 것이다. 이처럼 번역의 과정 역시 번역의 일부라는 차원에서 생각을 해야 할 것이다. 번역의 어휘를 적절히 선택하는 힘은 그 역자가 얼마나 많은 고전을 섭렵하였는가에 달려 있다. 그리고 기존의 사전을 보면 일부의 문헌만 살펴보고 그 정의를 내린 것이 많아 사전의 개념을 그대로 이용하기 어려운 경우가 왕왕 있다. 뿐만 아니라 국역 과정에서 자주 나오는 어휘에 대해 국어사전에서 정한 규칙을 그대로 적용하기 어려운 것도 많다. 새로운 의미를 독자에게 분명히 전달하기 위해서는 보다 많은 사례를 분석하고 관련 문헌을 검토하는 한편 다른 역자와의 토의 과정도 반드시 필요하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국역어휘에 관한 위원회 같은 것을 두어 번역과정에서 문제가 되는 다양한 어휘를 자체적으로 연구, 정리해 나갈 필요가 있다고 본다.
저변확대와 인재의 양성
필자 나이 스물 전후로 투르게네프, 까뮈, 도스토예프스키 등의 작품을 읽던 경험이 아직도 생생하다. 지금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그 번역에 문제가 많았다고 하는데 오히려 내 생각엔 오역보다도 아예 번역 자체가 안 되어 속상했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특히 휠더린의 경우는 다른 책에 언급이 많이 되어 꼭 그 작품을 보고 싶었지만 연구서만 있지 번역서가 없어서 여간 불만이 아니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동양 고전을 독서하면서도 번역이 되지 않아 독서를 조금 하다가 중단하고 만 경험이 비일비재하다. 李白, 杜甫 같은 大詩人의 시를 번역한 책조차도 여러 권 사서 읽어 보았지만, 내용이 중복되고 일정한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참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요즘 번역 논쟁의 주 쟁점은 오역 문제인 듯한데 愚見으로는 오역도 오역이지만 아예 번역 자체가 안 되어 훌륭한 책이 잠자는 것이 더 큰 문제라고 생각한다.
月灘 朴鍾和는 작품을 쓰면서 명나라의 지원군을 이끌어내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역관 洪純彦의 미담이라든가 稷山 싸움에서 왜적을 바늘로 물리친 일화 등을 고전 자료에서 발굴, 적절히 활용하여 성공적으로 소설화 했지만, 요즘 각광받는 어떤 작가는 있는 소재도 잘못 분석을 하고 만다. 仁祖 때 경상도 咸昌의 幼學 蔡 아무개가 올린 상소에 대해 임금이 내린 비답을 두고 ‘19자의 간단한 것이었다.’라고 한 것이 그 단적인 예다. 통상 임금의 비답 내용은 그다지 길지 않으므로 이런 경우 ‘이례적으로 긴 비답을 내렸다’고 해야 맞다. 연전에 왕의 남자라는 영화가 많은 호응을 얻어 그 원작인 연극 ‘爾’도 널리 알려지게 되었는데 ‘신하를 높이지 않고 칭하는’ 이 글자의 뜻을 ‘신하를 높여 부르는 존칭’의 의미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또 우연히 어떤 한글 잡지를 보니 固執은 漢字에서 유래된 것이 아니라 순우리말이라고 주장하는 글을 보았는데, 승정원일기에는 신하들이 辭職을 하거나 자신의 의견을 굽히지 않을 때, ‘경의 의견을 고집하지 말라’는 임금의 비답이 무수히 나오고 있다. 그러니 이는 순우리말만 국어라고 인정하는 좁은 소견에 다름 아니다. 이런 것은 모두 고전의 정리, 고전국역과 함께 한문의 저변확대가 병행되어야 함을 웅변하는 사례라 하겠다.
국역 사업을 원활히 수행할 인재양성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국역서를 충분히 독해하기 위해서도 가령 『懸吐本三國志』나 『大東奇聞』 정도는 대강이나마 읽어낼 정도의 한문 교양을 갖춘 독자층의 양성이 절실히 필요하다. 李文烈 같은 작가는 『孟子』를 비롯한 經書에 나오는 문장과 對句를 잘 활용하여 『황제를 위하여』 같은 낭만적 명품을 선보였고, 아지랑이와 같은 열기가 스며들고 운율감이 풍부한 『詩人』 연작을 아주 성공적으로 형상화하였다. 이런 것은 한문 교양이 있는 계층이 형성되어야 제2, 제3의 가공도 가능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저변이 확대되어야 국역자 양성과 국역서의 다양한 활용이 제대로 될 것이다.
21세기와 고전의 인프라
최근 중국을 소재로 한 다큐가 많이 방영되었는데 필자는 이것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한다. 黃河는 중국에 있지만 그것을 문화콘텐츠로 개발하고 이용하는 것은 이용하는 사람에게 달려 있다고. 다시 말해 우리의 고전이라 해서 우리의 전유물이 아니고 중국이나 일본의 고전도 활용하기에 따라 우리 것이 될 수 있다는 얘기다. 고전 국역을 지나친 민족주의적 시각이나 이에서 나온 한글 사랑 내지 성급한 대중화의 관점으로 보려는 태도는 진지하게 재고할 필요가 있다.
현재 민족문화추진회는 우리나라 고전을 위주로 표점 가공도 하고 번역도 하지만 장기적으로는 중국의 二十五史나 『諸子集成』, 『十三經注疏』, 唐宋八大家의 문집, 저명 시인의 전집 등을 모두 번역해야 할 뿐만 아니라 일본에 있는 중요 서종들도 찾아 번역해야 할 것이다. 물론 지금처럼 해도 언젠가는 愚公移山을 실현하겠지만, 동북아 한문 문화권에서 지금 우리의 왜소함을 극복하고 종당 비교우위를 점하기 위해서는 일본과 중국을 염두에 두고 고전을 체계적으로 정리·번역해서 데이터베이스화하여 보다 큰 범위에서 한국의 문화 자원을 축적해 놓는 것이 절실하고도 시급하다. 한번 생각해 보라. 역통사업이 시작되던 초기에는 반대도 있고, 그 과정상 진통도 있었지만 지금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도움을 주고 있는가. 앞으로 수많은 고전을 가능한 한 빨리 번역해서 정리해 놓는다면 우리의 문화 환경은 지금과 비교하면 거의 혁명적 변화를 가져오게 될 것이다. 족보를 인명의 약력과 연계하여 데이터베이스화하거나 역사지도 등을 편찬하는 사업 등은 어떤 개인이나 작은 단체가 하기 어려운 일이다. 이런 일들을 시급히 서둘러서 인프라가 구축되어야 국역 사업이 제대로 탄력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덧붙여 말하고 싶은 것은 우리의 고전 국역도 번역의 경험과 자료를 공유하고 번역의 이론을 정리할 수 있는 전문 매체를 둘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싣는 글도 논문의 형식에 얽매이지 말고 실용에 맞게 하면 좋을 것이다. 또 오랫동안 논쟁이 되는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는 학술회의를 열어 해결할 수도 있다고 본다. 이런 것이야말로 번역을 보다 전문화하고 과학화하는 밑거름이 될 것이다. 그리고 번역과 교열의 최종 단계에서도 해결되지 않는 문제를 집중적으로 연구하는 난해문제 전담반 구성 같은 것도 필요하다. 그리고 그 해결과정을 백서 발간 등으로 비축해 두면 나중에 관련 학자와 종사자들에게 매우 요긴하게 활용될 것이다.
지금까지 말한 것들은 다 돈이 드는 일이다. 그러나 근세 일본이 유럽의 고전을 번역하여 서양 과학 문명을 재빨리 흡수한 결과 한국이나 중국 등 기타 아시아 국가들과는 전혀 다른 세상을 열어갔듯이, 우리도 이제는 고전 번역을 21세기 국가 경쟁력 차원에서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때이다. 다가오는 시대가 동양의 시대이고 문화와 지식의 시대라고 하는 미래학자들의 말이 사실로 징험된다면 지금처럼 우물쭈물하다가는 噬臍莫及이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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