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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이 뉴스를 어떻게 전해 드려야 할까요? - 황우석 사태 취재 파일
한학수 지음 / 사회평론 / 2006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나는 PD수첩을 좋아하고, 신뢰한다.
온 국민이 불매운동을 벌일 때부터 잠시 잊었던 채널을 다시 돌렸다.
광고 없이 바로 만난 최승호 씨의 상기된 표정은 지금도 선하게 기억에 남는다.
한 편의 책은 아니었다.
다만 책의 형식으로 그려진 다큐멘터리이다.
발가벗겨진 사건의 기록이며, 거친 악몽의 기억이다.
만약 이 사건에서 사회구조적 문제를 성찰하고자 한다면,
이 책을 소재로 스스로 쓰는 게 좋을 것 같다.
아니면, 다양한 묵객들의 성찰에 의지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일독 하고 나서 이런 실망감이 들 수는 있다.
책의 대부분이 취재노트와 취재뒷이야기로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물론 저술의 취지 역시 이러한 데에 있었지만,
우리 사회에 문제를 제기하기 위해서는 좀더 진지하고 무심할 정도로 거리를 두고 냉정하면서도
따뜻하게 그려내어야 하겠지만, 이 책에서 그런 모습은 찾기 어렵다.
소재는 우리 사회의 폐부를 깊게 찌르고 있으나,
소재를 풀어내는 서사는 편린에 머물렀으므로 안타까울 수도 있다.
그래서 나는 차라리 이 책을 저본으로 하여 우리 사회의 학문과 언론, 권력의 관계에 대해서 따져보기로 했다.
1. 작은 권력이 큰 권력에게 고전하는 모습을 본 개인으로서의 소회
mbc는 공신력 있는 매체이며 그에 비례해서 권력을 형성하고 있다.
그런데 얼마 전 mbc가 통째로 날아갈 뻔한 일이 있었다.
나는 단지 pd수첩이 막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mbc가 존폐의 위기에 처했다고 생각한다.
조잡하게 작은 권력, 큰 권력, 개인으로 권력의 원천들을 삼분화하였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언론매체가 항상 작은 권력이 되는 것도,
황우석이나 정부가 항상 큰 권력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개인의 응원에 따라 권력균형이 깨질 수 있다. 황우석 씨가 엄청난 지지를 얻으며 언론사를 선별할 정도가 되었다면 큰 권력이다.
기득권을 고수하고 있으면 큰 권력이다. 밤의 대통령인 조선일보가 큰 권력인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기득권이 있고, 그것을 고수하려고 바둥바둥 애를 쓰고 있기 때문이다.
작은 권력은 스스로 큰 권력임을 포기할 때 생긴다. 작은 권력은 방향이 분명하다. '대항'하는 권력이다. 황제 리쿠르고스가 왕권을 내려놓고 국민의 편에 설 때 작은 권력이 생기며, 우리은행의 행장이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선언할 때 작은 권력이 생긴다.
만약 황우석 씨가 정말로 세계의 불치병 환자들을 위해 연구에 전념했다면 나는 머뭇거리지 않고 '작은 권력'의 영광을 선사할 수 있다. 이 때의 큰 권력은 물론 '난치병'이다. 대항의 대상은 큰 권력이며, 대항하는 자는 작은 권력이다.
개인은 캐스팅보드이다. 하지만 개인은 저변과 문화의 힘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많은 기대를 해서는 안 된다. mbc라는 작은 권력이 날아갈 뻔한 것은 개인의 힘이 컸다.
즉 개인들은 mbc를 큰 권력이라고 착각했기 때문이다. 내가 본 PD수첩은 항상 작은 권력의 위치에 있었다고 생각한다. 작은 권력이 큰 권력이 되는 것은 종이 한 장 차이이다.
일일신우일신(日日新又日新 : 나날이 새롭고 또 새롭게 되는 것)하지 않을 때, 히딩크 감독의 말과 같이 항상 배가 고프지 않을 때, 제 자리에서 한몫 잡고 안주할 때 큰 권력이 생긴다.
개인은 위치를 분명히 할 수 있지만, '나'는 '개인'이 아니기 때문에 이 문제에 기여할 수 없었다. '나'와 '개인'이 괴리되는 것은 슬픈 일이다. 어찌 보면 선문답 같은 황당한 이야기이지만, 실존하는 '나'와 '동시대인으로서의 개인'은 무관하지는 않으나 같다고 하기도 어렵다.
K는 작은 권력과 개인 사이를 왔다갔다했고, 주인공인 저자는 작은 권력과 큰 권력, 개인을 모두 넘나들었고, 황우석 씨는 큰 권력에만 있었으나, 가상의 작은 권력과 큰 권력을 만들어냈다.
2. 절대악은 절대악이 아니다
글을 읽으면서 내내 '절대악'에 대해 생각했다. 악의 이데아를 '절대악'이라고 한다면, '절대악'은 '절대악'이 아니다. '절대악'은 가공의 악에 불과하다.
만약 하느님과 사탄이 자신의 마을을 가지고 있다면, 사탄의 마을에 절대악은 없다. 절대악은 '하느님'의 마을에 있다. 물론 하느님이 악을 키우는 것은 아니다. 사탄이 키운 것이다. 사탄이 하느님의 이름으로 키우는 악에 우리가 악의 이데아라고 부르는 '절대악'이 존재할 가능성이 많다.
왜 황우석 씨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절대악'을 끄집어냈을까?
이 책에는 두 개의 '절대악'이 존재한다. 하나는 가공의 절대악이며 하나는 '이데아의 절대악'이다. 가공의 절대악은 mbc이며 PD수첩이다. 황우석 씨가 만들어낸 가상의 절대악이며, 개인들은 이것을 이데아의 절대악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황우석씨가 이데아의 절대악인가? 이데아의 절대악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는 않다.
황우석 씨는 스스로를 논리의 결계에 가두고 가상의 절대선이 되었다. 누구나 자신이 옳지 않다고 할 때 가장 분노가 치미는 법이다. 때문에 악행을 하는 사람들은 최소한 스스로에게는 악행이 아닌 것이다. 이때 그 그 사람은 악행의 혐의에서 벗어나기 위해 논리를 만들어낸다. 누군가는 악인이 되어야 한다면, 자신이 지목되지 않도록 가상의 악인을 만들게 된다.
나는 황우석씨가 악한 마음을 품고 이런 사기극을 벌였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만약 사기를 치려고 생각했더라면 이와 같이 거대한 사기극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자신이 만든 논리의 결계에 갇혔거나 이데아의 절대악에 놀아난 것이라 생각한다.
3. 가혹한 추위가 찾아와야 푸르름이 드러난다.
歲漢然後知松柏之後凋 <논어>
(세한연후송백지후조 : 찬 겨울이 지나고 나서야 소나무 측백나무가 오래도록 푸르르구나 하고 느끼게 된다.)
나는 책을 읽고 책 어딘가에 흔적 남기기를 좋아한다. 특히 앞 껍데기나 뒤 껍데기에다가 메모를 하는데, 이 책을 읽고 나서는 위와 같은 메모가 생각나 남겼다.
대한민국은 벌거벗겨졌고, 아직도 트라우마에 휩싸여 있다.
고난이 친구를 불러모은다고, 이와 같은 시련 속에서 우리는 소중한 사람들을 알 수 있었다.
시련이 고마운 것은 사실은 친구가 아니었던 사람의 정체가 드러난다는 점이다.
이 책의 가장 고마운 점이라면
가혹한 시련에 떨어지지 않으려고 스스로를 변모해가는 사람들과
가혹한 시련에 변모하지 않으려고 바둥거린 사람들을 분명히 보여줬다는 데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