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번역이 안 된 우리나라 古典籍은 대략 6천5백여 책이다. 최근의 정책연구 결과에 따르면, 현재와 같은 속도라면 이들 서적이 번역되려면 약 1백 여년 이상의 기간이 소요된다고 한다. 그것도 장담할 수 없다. 고전 번역에 뜻을 둔 인재들이 드문 데다, 지금까지 번역을 담당해왔던 소수의 漢學元老들이 점차 고령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요즘 따라 특히 고전번역원을 설립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일고 있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한국 고전번역이 지닌 구조적 문제점과 고전번역원 설립 추진 현황에 대해 살펴봤다. <편집자>
모든 飜譯은 疏通을 위한 것이다. 漢字와 漢文은 지난 2000년간 우리나라에서 소통의 기본 도구였다. 하지만 근대화는 한문을 급격하게 퇴장시켰다. 결국 한문은 死語가 되었으며, 더 이상은 소통할 수 없는 言語가 되었다. 이를 한글로 바꾸어 주는 ‘번역’은 바로 과거와 현재를 소통할 수 있도록 對話의 場을 마련하는 일이다.
‘朝鮮王朝實錄’등 대표적인 한국 古典籍의 번역은 學問的 疏通의 장을 크게 확대하였다. 방대한 내용에 대한 용이한 접근으로 소장학자들은 자신의 연구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자신이 원하는 더 많은 정보를 이전보다 훨씬 쉽고 간편하게 얻게 된 것이다. 그 결과 조선시대 연구에 커다란 진척을 가져왔으며, 양적 확대는 물론 질적 제고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學問的 疏通과 함께 文化的 疏通의 場도 확대되었다. 번역된 ‘조선왕조실록’에서 많은 소재들이 발굴되었으며, ‘대장금’이나 ‘왕의 남자’의 경우가 그 예라 하겠다. 인터넷에는 자신의 조상에 대한 각종 기록을 모으고 정리하여 제공하는 홈페이지들이 생겨나고 있다. 이들 역시 많은 부분 번역된 자료에 의지하고 있다. 이런 사이트들이 급격하게 증가하는 것을 보면 우리가 가진 우리 文化에 대한 갈증의 정도를 짐작할 수 있다. 우리의 역사와 문화의 源泉인 동시에 總體이면서도 漢文이라는 장애에 가로막혀 접근하지 못했던 古典籍을 누구나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게 만든다는 점에서 飜譯은 곧 ‘古典資料 活用의 민주화 운동’이라고 할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수행되는 漢文古典의 번역은 여타의 일반적인 번역과는 다른 역사적 特殊性을 가지고 있다. 첫째는 갑오경장이전에는 漢文이 公式的인 文語였다는 점이다. 한글이 창제되기 이전은 물론이고 한글이 창제된 이후에도 국가의 공식적인 기록은 물론이요 개인의 문자생활 역시 대부분이 한문으로 이루어졌다. 전통시대에 생산된 문헌의 95%이상이 한문으로 기록된 것이다. 따라서 번역 대상이 매우 방대하다. 조사 결과 번역되어야 할 古典籍은 세계문화유산인 ‘承政院日記’ 등 번역된 책으로 계산하여 대략 6,500여 책에 달하며 현재와 같은 방식으로 번역할 경우 대략 1백 년 이상 소요될 것으로 추정된다. 국가가 재정적 지원을 할 수 밖에 없는 이유이다.
둘째는 번역 대상이 규모가 방대한 기록물이라는 점이다. 세계기록문화유산인 ‘조선왕조실록’은 4천 7백만 자에 달하며, ‘承政院日記’도 2억 4천만 자나 된다. 그 규모가 실로 엄청나다. 이런 거질의 번역은 당연히 개인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 따라서 ‘集團飜譯’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개별적 차원에서 특정문헌에 대하여 집중적으로 번역하는 것과는 달리 ‘집단번역’은 다수의 역자가 協業하는 형식이므로 관리가 매우 중요하다. 번역 시스템과 그를 수행할 전문 기관이 필요한 이유이다.
셋째는 한문교육의 단절이다. 정부의 한글전용정책 등 여러 가지 사회적 배경이 있었지만 한문에 대한 전문교육이 제도권에 편입된 것은 1973년 성균관대학교에 漢文敎育學科가 설치되면서 부터이다. 따라서 1894년 갑오경장으로 한문이 公式文語로서 자격을 상실한 이후 한문에 대한 교육은 거의 80여년 이상 제도권에서 외면 받았다. 특히 본격적인 번역인력의 양성은 지난 1974년 비제도권인 民族文化推進會에 國譯硏修院이 설립되면서부터이다. 역자의 양성을 비제도권에 맡긴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학문 일반과 원활한 연계에 한계가 있다는 점에서 문제가 된다. 학계의 연구 성과가 충분히 반영되기 어려운 것이다.
그간 고전의 번역사업은 원로 원학자와 번역분야 참여자들의 피나는 노력으로 양은 물론 질적으로도 괄목할 만한 실적을 거두었다. 국고의 지원 하에 民族文化推進會가 주축이 되고 世宗大王記念事業會 등이 수행한 번역은 지난 40여 년간 모두 500여 억 원 이상이 투입되었으며, 번역한 책 수가 1,600여 책을 넘기고 있다. 특히 ‘朝鮮王朝實錄’의 完譯은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학계는 물론이고 문화계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이러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이들 번역서들은 難解한 文章, 부족한 註釋, 硬直된 逐字譯 내지 과도한 意譯 등에서 오는 疏通의 불완전성에 대하여 적지 않은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古典飜譯은 지난 40여 년간 政府가 민간 번역단체에 補助金을 지원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왔다. 따라서 보조금의 성격상 1년 내에 번역에서 출판까지 전 과정을 마쳐야만 했다. 더구나 예산 지원에 대한 법적 근거가 없기 때문에 재정형편에 따라 예산이 책정되었고, 항상 제로베이스에서 검토되면서 언제나 우선순위에서 멀리 있었다. 자연히 예산의 안정적 확보나 체계적인 지원은 기대하기 어려웠고, 국역 단체들은 단기간 실적위주의 사업운영이 불가피하였다. 미래를 보장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장기적인 계획은 수립될 수 없었고, 금년의 사업실적이 차기년도 예산확보의 관건이 되었기에 조속한 완료가 강요되었다. 번역대상을 적은 분량으로 분할하고 외부에 있는 다수의 역자에게 위촉하여 번역기간을 단축함으로써 사업을 기간 내에 완성하는 “위촉제 분할번역의 방식”이 성행하게 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誤譯과 같은 번역 내용의 不實化는 구조화되었으며 개선될 여지는 없어 보인다. 이런 국고 보조금 지원방식에서 오는 문제점은 크게 다음 세 가지로 요약된다. 장기적인 종합 계획 없이 수행되는 고전국역사업 번역 사업에서 가장 큰 문제는 국가적 차원에서의 종합적인 장기계획이 없다는 것이다. 국고의 지원에 의한 번역이 시작 된지 무려 40년이 지난 지금에도 여전히 체계적으로 짜여진 중장기 종합계획이 없다는 것은 정책의 부재를 말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더구나 번역의 대상이 巨帙이라는 점에서 계획의 부재는 그 심각성을 더한다. 대표적인 번역서인 『朝鮮王朝實錄』에서 각 조대별 서명조차 통일하지 못했으며, 내용에도 문제점이 적지 않다는 것이 학계의 지적이다. 계획의 부재가 번역의 부실로 이어진 대표적인 경우이다. 특히 번역을 담당하고 있는 행정기관이나 번역기관 간의 조정 기능은 어디에도 없다. 국가의 예산으로 동일한 서책을 중복 번역하거나, 동일기관 내에서 번역의 대상이 시대별 내용별로 편중화 현상을 보이는 것은 종합계획의 부재에서 온 결과이다.
원전의 정리 없이 번역에만 치중된 기형적 구조 번역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번역 대상인 原典에 대한 整理의 문제이다. 훌륭한 번역이 있기 위해서는 체계적인 원전의 정리가 선행되어야 한다. 정리되지 않은 원전의 번역은 번역의 안정화를 저해하며 이는 곧 번역의 品質 저하로 직결된다. 일반 고전 중에서 문집의 경우에는『韓國文集叢刊』과 같이 일정한 정리 과정을 거친 텍스트가 있지만, 대부분의 문헌은 그렇지 못하다. 특히『승정원일기』나 『日省錄』과 같은 대형의 國故文獻은 寫本의 형태로 남아 있으며, 이는 번역에 앞서 학술적인 定本化 작업이 필수적이다. 그러나 번역에 대한 예산 지원은 있지만 번역 대상서의 정리를 위한 예산의 지원은 거의 없거나 턱없이 부족하다. 이는 모든 實積이 오직 飜譯중심으로 파악되고 지원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번역만을 중시하는 풍토가 결과적으로 번역의 부실을 낳는 것이다. 자연히 번역대상서의 정리가 전문화되지 못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역자의 과중한 부담으로 번역이 부실화 되는 문제가 초래되었다. 校勘을 비롯하여 註釋, 標點, 索引 등 飜譯에 선행되어야 하는 原典의 정리에 대한 예산 지원도 충분하게 이루어질 때 번역이 정상적인 궤도에 오를 것이다.
위촉제, 부실 번역의 근원 현재 국고로 지원되는 번역의 대부분은 개인 위촉에 의존하고 있다. 대략 연간 200자 원고지로 10만매 정도가 번역되는데 이중 75%인 7만 5천여매가 위촉이다. 그리고 분할되어 위촉된 원고들은 副業的 형태의 번역으로 수행된다. 전문가 집단이 양성될 수 없는 환경인 것이다. 그저 일정한 고료를 받고 부분적인 번역을 하는 다수의 부업적 역자집단 만이 형성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번역의 품질문제를 논하기는 어렵다. 실제로 지난 5년간의 번역상황을 조사해 보면 『承政院日記』와 같은 국고문헌에서 분할번역의 정도가 더욱 심화되었다. 또 역자간의 번역에서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편차도 더욱 벌어지고 있다. 이러한 문제들은 고전의 번역이 “위촉제”로 운영되는 한 번역의 질적 제고는 지난하다는 것을 말해 준다.
이상에서 볼 수 있듯이 補助金 방식의 지원은 고전번역을 부실하게 만드는 모든 문제점의 근원이다. 해결방안은 장기적인 종합계획 하에 예산의 안정적 지원체계를 구축하는 것이다. 즉 국가에서 조속히 정부출연기관으로 ‘韓國古典飜譯院’을 설립 운영하는 것이 고전번역의 구조적인 문제점을 해결하는 가장 분명한 방안이다.
지난해 필자는 교육인자원부의 지원으로 한국학술진흥재단의 과제를 받아 ‘韓國古典飜譯院’과 ‘古典飜譯大學院’의 설립을 위한 정책연구의 책임을 맡아 연구 결과 위와 같은 결론에 도달했고, 공청회를 열어 ‘韓國古典飜譯院’의 설립에 대한 대체적인 합의를 도출한 바 있다. 그리고 금년 초에는 유기홍 의원 등 32명의 국회의원에 의해 “한국고번역원설립법안”이 발의된 것으로 듣고 있다. 고전국역은 물론이고 人文學의 발전을 위하여 매우 고무적인 일이다. 차제에 반드시 이 법안이 통과되어 안정된 번역시스템이 구축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신승운 / 성균관대·서지학 필자는 성균관대에서 ‘성종조의 문사양성과 문집편간’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민족문화추진회 국역부장, 편찬부장, 국역연수원 교수 등을 역임했다. 번역서로는 군서표기(국역 홍재전서 제18집), 청장관전서(공역) 등 다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