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플에 대한 나의 입장

우선 두 약자의 입장에서 다가가려 합니다. 그리고 이 문제에 대한 단서는 스피노자의 금언에서부터 찾고자 합니다. 두 약자라 함은 악플에 피해를 입었던 사람들과 피해를 입을 수 있는 잠재적 피해자들이 그 하나이며, 악플러가 그 둘입니다. 악플러는 '인간말종'이나 '비정한 사람들'이라고 보는 견해에 대해서는 다소 다른 입장입니다. 악플러들은 경직되고 폐쇄된 사회구조 안에서 상처 입은 피해자라는 관점을 덧붙여 제안하고자 합니다. 두 번째 약자에 대해서는 많은 논의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스피노자의 금언을 옮기면 다음과 같습니다. "감정은 보통 사람이 좀처럼 이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감정은 사람도 죽일 수 있고, 스스로 죽이고도 힘이 남는다. 보통 사람은 감정에 예속되기 마련이다. 감정을 제어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이다. 첫 번째 방법은 기존 감정보다 더 큰 감정으로 제어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이 방법은 신의 영원한 사랑의 감정 등 고귀한 감정적 가치를 제외하고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두 번째 방법은 감정을 이해하는 것이다. 내가 감정을 진정 이해할 때 그것은 더 이상 나에게 상처를 주지 못한다." 제가 약간 윤색했습니다. 여기서 '감정' 대신 '악플'이라는 말을 넣어도 의미가 통하리라 생각합니다.


① 악성 댓글은 악플러와 악플 피해자들의 폐쇄성에 기인합니다.

악플러와 악플 피해자가 톱니바퀴처럼 아귀가 맞아야 이에 대한 피해가 생긴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악플에 대한 교육이나 이해가 충분하다면 악플에 대한 충격을 최소화시킬 수 있고,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결과로 가지 않을 수 있습니다. 악플에 피해를 입어 상처를 받거나 자살하는 피해자들은 대체로 마음이 어리거나 악플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거나, 우울증과 폐쇄적 정서를 가지고 있어서 악플 앞에 등불과 같습니다. 때문에 악플에 대한 연구와 이해가 공유되는 것만으로도 피해를 줄일 수 있습니다. 우리 사회는 악플에 대해 너무나 한심할 정도로 무방비하며 앞으로 악플러는 물론 악플의 피해자가 양산되어 어마어마한 사회적 비용을 치러야 할 것이라는 비관적인 생각이 듭니다.
첫 번째 약자로 규정된 악플의 피해자와 잠재적 피해자를 위한 매뉴얼이 요구되는 대목이기도 하며, 이를 습득한 네티즌이 악플의 상처를 스스로 극복하는 길이 대안으로 여겨집니다.


② 악플이라는 용어에 이의를 제기합니다.

악성 댓글을 규제하는 사고에는 악플러를 범죄자로 낙인찍는 사고가 내재돼 있습니다. 악플러 역시 악플 피해자와 마찬가지로 내성적이고 폐쇄적 정서를 가지고 있습니다. 악플 문제는 성폭행이나 학교폭력 문제와 마찬가지로 사회 전반적으로 축적해온 폐쇄성과 경직성에 기인한다고 봅니다. 악플러의 성향이 여러 가지이지만, 범죄자로만 규정할 수는 없습니다. 악플러를 사회의 잠재적 피해자로 보는 시각도 또한 필요합니다. 악플에 대한 규제는 악플러의 내적 피해의식을 보듬어줄 수 없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반발심만 유발할 뿐입니다. 
악플이라는 용어 자체도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부시 대통령이 몇몇 국가를 '악의 축'으로 규정하는 것과 같이 일방적인 표현이며 우리 사회가 편향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용어입니다.
따라서 나는 악플이라는 용어 대신 제목에 단 것처럼 '벽플'(가칭)이라는 용어를 제안합니다.
벽플의 癖은 도벽 등과 같이 성벽 또는 안 좋은 버릇을 의미합니다. 자원의 해설에 의하면 "'벽'은 옆으로 비키다의 뜻. 몸의 균형이 깨져서 생기는 병의 뜻으로, 배앓이 등의 병의 뜻을 나타내었으나, 파생하여 '버릇'의 뜻도 나타냄'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질환의 일종이기도 하면서, 안 좋은 버릇의 의미로 파생된 것은 악플러의 성향을 잘 설명해 줍니다. 즉 사회 구조적인 모순으로 인해 생기는 피해의식적 행위이자, 자기도착적 배설 행위라는 의미와 동시에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풀 길 없는 '상처'에 대한 '살풀이'의 기형적 개념도 가지고 있습니다. 벽병(癖病)은 '병통'을 뜻하며, 벽성(癖性)은 '편벽된 성질, 버릇'을 뜻합니다.(이상 민중서림의 '한한대자전(漢韓大字典) 참조') '-플'은 악플과 같이 reply의 뜻입니다. 이 용어가 악플을 완벽히 대체할 수는 없겠지만, 악플이 가지고 있는 일방적인 의미에 균형을 줄 수는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사실 악플이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그 내용과 관계 없이 '언어'가 주는 '무지'의 자국이 고통스럽습니다.


③ 덮어놓고 규제와 단속을 운운하는 것은 사유하기를 포기한 행위입니다.

우리 사회의 고질적인 문제점이기도 한 '땜빵주의'는 우리 사회를 감싸고 있는 구조적이고 역사 깊은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전자팔찌 역시 '교화'가 배제된 정책이기 때문에 이것이 성폭행을 얼마나 차단할지는 미지수입니다. '학교폭력'에 대한 처벌 강화나 학교의 경찰력 강화 등의 방법 역시 '학생'을 죄인취급하는 무지의 발상에 다름아닙니다.
우리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적과 나를 구분하는 이분법적 사고에 이미 익숙해져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나는 우리 사회의 구성원들이 대부분 잠재적 범죄자이며 잠재적 범죄의 피해자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구성원들을 모독하거나 무시하려는 것이 아니라, 사회 구조에 관심을 갖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는 건강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유영철 사건이나 대구 지하철 화재 사건, 지하철에서 아주머니를 밀어서 죽음에 빠뜨리게 했던 '불특정 다수를 향한 끝모를 테러공포' 뉴스를 접하며 충격에 빠지지만 그다지 충격적인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감각이 왠만한 사건에는 콧방귀 하나 뀌지 않을 정도로 무던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속깊이 곪은 상처들이 곳곳에서 터지는 것이라고 판단되기 때문입니다.
백두대낮에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미국의 총기난사와 같은 일이 한국에서 일어난다면 나도 우리 사회에 대한 희망을 단념하게 되겠죠.


④ 벽플(악플)은 '해소'의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합니다.  

"악플은 정신병, 금지하면 금단증세"라는 의견이 나왔습니다. 이 원리는 간단합니다. 악플러가 일상에서 받은 억압과 상처를 악플이라는 기형적인 방법으로 풀고, 상처를 다른 사람에게 전이시킬 때 자신의 상처가 치유되는 희한한 구조입니다. 하지만 악플 개인의 입장에서 봤을 때 억압을 해소하지 않으면 스트레스가 지속되거나 다른 형태의 범죄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악플'은 필요악적 요소가 있습니다.
하지만 '필요악'으로만 봉합한다면 무책임한 일입니다.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방식은 여러가지입니다. 담배를 피기도 하고, 야동을 보기도 하고, 책을 읽기도 하고, 등산을 하기도 하고. 사람 안에 내재된 억압은 어떤 형태로든 해소되어야 하는데, 긍정적인 해소를 '해소'라 하고, 부정적인 해소를 '배설'이라 한다면 자신의 정보에 '해소'에 대한 것이 없고, 오직 '배설'만 있는 사람도 적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볼떼르는 "사람은 자신에게 옳지 않다는 말을 들을 때 가장 분개한다"고 하였고, 파스칼은 "그에게 틀렸다고 이야기한다면 당연히 화를 내지만, 그의 의견이 옳다는 것을 전제하고 다만 다양한 관점이 있는데 한정된 관점에서만 보았음을 이야기하거나 새로운 관점을 이야기해주면 그는 화를 내지 않는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악플러에게도 이른바 '배설'에서 '해소'로 전환할 수 있는 기회가 있습니다. 이 점에 유의해야 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