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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자도사 사회
송병기 지음 / 어크로스 / 2023년 2월
평점 :
우울이 극에 달했을 때의 내가 아니라 비교적 정상일 때의 내가 꿈꾸는 죽음은 건강하게 살다 수명이 다해 집에서 자다가 죽는 것이다. 대재앙으로 모두가 공멸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그러나 통계는 후자만큼 전자도 판타지임을 보여준다.
이 책에 따르면 1991년에는 재택사 비율이 75%, 병원사 비율이 15%였고, 1999년의 재택사 비율은 60%, 병원사 비율은 30%였다. 당시만 해도 죽음은 집에서 이루어지는 일이었다. 그런데 약 10년 후인 2008년에는 재택사 비율이 22.4%, 병원사 비율이 63.7%로 반전되며, 2020년에는 병원사 비율이 75.6%까지 치솟는다. 이제 열에 여덟은 병원에서 죽는 것이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생애 말기 돌봄이 요양원과 요양병원으로 시설화되었기 때문이다. 요양원엔 의사가 없고, 요양병원엔 요양보호사가 없다. 또한 이들 시설은 노인성 질환에만 특화되어 있다. 따라서 암 말기 환자나 기타 위중증 환자의 경우 생애 말기에 증세에 따라 대학병원과 요양병원과 요양원을 전전하다 그 사이 어디에선가 임종을 맞는다.
그렇다면 탈시설화가 답일까? 여기서 죽음은 계급 문제로 환원한다. 경제적 여력이 있거나, 드물게 운이 좋으면 집에서든 시설에서든 존엄한 돌봄과 죽음은 가능하다. 그렇지 않은 경우 돌봄과 죽음은 그야말로 비참해진다.
책에는 종교시설에서 운영하는 무연고자 돌봄 요양원이 등장한다. '응급의료에 관한 법률'에 따라 의식을 잃은 노숙인은 병원 응급실로 이송된다. 응급 처치 후 이들은 말기 돌봄을 위해 요양원에 맡겨진다. 연명 의료를 중단하기 위해서는 본인의 의사가 확인되어야 하는데 본인이 중환자라 의식이 없거나 의사 결정이 어려운 상태에서 이는 불가능하며, 무연고자이므로 친족이 대신 결정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따라서 이들은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연명 치료를 받게 된다. "생명은 신의 영역이므로 인간이 함부로 그 가치를 매길 수 없"고 "모든 생명은 지속되어야"하기 때문이다(79).
강남의 한 요양원에서는 "어르신들이 입으로 음식물을 섭취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좋은 돌봄"이기에 "시간이 많이 걸리고 힘이 들어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입소자들의 식사 수발"을 들 때(82) 무연고자 요양원에서는 입소자들의 삶의 질과 관계없이 그저 살려만 놓기 위해 비위관 삽입이 결정된다. 이렇게 "숨 쉬고 먹는 콧구멍을 가진 존재로 전락한 노인들은 10여 년간의 조용한 와상 생활 끝에 '자연사'한다(81)".
그토록 생명을 존중한다는 이 요양원의 간호부장의 말이 가관이다. "아, 저는 절대 싫어요. 저는 이런 상황이 생기지 않도록 나이가 좀 더 들면 사전의료의향서를 꼼꼼하게 써놓을 생각이에요. 가족들에게도 내 생각을 명확하게 이야기해놓아야죠(81)."
죽음의 계급별 격차는 현충원에서도 극명하게 드러난다. 생전의 계급별로 묘역의 위치와 면적이 차등적으로 배치된다.
나는 이 책이 객관적으로 좋은 책이라 좋은 건지 내 의견과 구미에 맞아서 좋은 건지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로 저자의 생각에 전반적으로 동의한다. 특히 좋았던 부분은 다음과 같다.
1) 저자는 가사노동이 '노동'으로 취급되지 않고 있음을 지적한다(실비에 페데리치 돋음).
2) 돌봄 노동이 젠더화되어 있어서 그 가치가 절하되었고, 돌봄 노동에 종사하고 계신 분들이 정당한 임금과 사회적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다. 결국 이것은 치료와 진단은 돈이 되는 반면 돌봄은 돈이 되지 않아서 병원에서 늘 호스피스 병동 수가 턱없이 모자라는 문제로 이어진다(성 차별 = 다 같이 죽자는 겁니다).
(85) 효, 도리, 연명의료결정법과 같은 '선언적 윤리'는 개개인이 경험하는 '일상적 윤리'와 끊임없이 상호작용 한다. 문제는 그러한 윤리가 당사자인 노인을 끊임없이 배제하고 있다는 점이다. 고령화사회가 필연적으로 직면하게 된 문제를 윤리의 이름으로 가족, 특히 여성(요양보호사, 간호사, 딸, 며느리 등) 책임으로 전가하고 있다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존엄하지 못한 돌봄의 경험은 결국 존엄하지 못한 죽음으로 이어진다. 생애 말기 돌봄을 담당하는 주체의 열악한 노동조건을 개선하지 않으면서 의료적, 생물학적 돌봄만을 최선으로 여긴다. 대부분 병원에서 죽기 때문에 그 '나머지' 죽음은 잘 보이지도 않는다. 노화와 죽음에 대한 터부와 혐오는 그 위에서 싹튼다.
3) 인구 위기론, 즉, 저출산과 고령화가 심각한 문제라는 인식은 성장주의적 관점에서의 정치적 상상의 산물에 불과하다(이번 달 정희진 쌤 오디오 매거진 "저출산은 문제가 아니예요"와 같은 맥락). 생산가능인구 대 '의존적 노인'의 대결 구도가 사회적 갈등을 낳고 우리 모두는 존엄한 노년을 기대할 수 없게 된다.
(42) 다시 말해 국가는 '정상 가족'을 기대하기 힘든 시대를 위기로 상정했고, 발전에 쓸모 있는 인구와 쓸모없는 인구를 분류했다. 의존적 노인은 이러한 정치적 상상과 인식 속에서 선별되고 의료적, 생물학적 차원으로 규정된 '인구'라고 할 수 있다.
노화가 극도로 기피하고 두려워해야 할 무언가가 된다는 건 얼마나 슬픈 일인가. 나이가 들어도, 돌봄이 필요해져도 사회가 우리를 환대하고 필요로 하며 우리에게 좋은 삶을 보장해준다는 선례가 쌓이면 삶은 지금처럼 불안하지 않을 것이고, 우리는 조금쯤 덜 열심히 살아도 될 것이고, 서로에게 조금 더 관대해질 수 있지 않을까.
4) '웰다잉' 열풍에 죽음마저 "개인의 노력으로 대비해야 하는 일"로 취급되는 것에 우려를 표하고 있다.
5) 저자가 정세랑 작가의 <시선으로부터>를 읽었고, 그것을 누군가의 죽음을 기리는 좋은 방식으로 제시한다. 저자는 여러 소설을 인용하고 있는데 그중 은모든 작가의 <안락>, 강화길 작가의 <음복>이 궁금하다.
이처럼 사람은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권리주체인 동시에, 서로 섞이고 의존하는 나눔의 존재다. 그런데 냉동 인간을 둘러싼 담론은 인간 삶의 조건에 대한 ‘구조적 무지‘를 강화하고 있다. 그 기술적 가능성은 개인의 권리(특히 선택의 자유)와 사회적 맥락을, 또 삶과 죽음을 대립시킨다. 생애 주기를 통틀어 누구나 겪는 질병, 노화, 의존을 극복의 대상으로 삼거나 기술적 실패로 여기는 규범을 확산시킨다. 과학기술이 사회적 맥락과 무관하게 작동하는 듯한 착시를 일으킨다. 특히 인간을 언제나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존재로 상정한 연구 개발을 활성화한다. 반면 인간이 평생 주고받는 돌봄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인간이란 존재를 떠받치는 돌봄을 으레 있는 일로 여긴다. 돌봄을 수행하는 사람의 일상, 노고, 책임, 그리고 그를 둘러싼 사회자원의 분배 방식을 따지지 않는다. 그 돌봄 덕분에 사람이 과학, 경제, 교육, 보건, 예술, 종교, 정치, 즉 모든 사회활동을 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 P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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