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초부터 1일 1전기가오리를 했더니 체력이 몹시 달린다. 전기가오리의 후원자로서 가장 기대하는 것은 물론 공부 모임 같은 비물질적 혜택이지만 간혹 제공되는 물질적 혜택에도 당연히 설렌다. 이번 달에 오는 것들 중 내가 가장 기대했던 것은 한나 아렌트 책자였다. 그런데 다른 우편물과 함께 아일랜드 식탁에 놓여 있는 책자들을 아무리 뒤져 봐도 아렌트가 없다. 짝꿍이 택배를 정리한 지라 혹시 아렌트 없었냐고 물어보니 상자를 열면서 분명 옆으로 살짝 고개를 튼 흑백의 아렌트 사진을 봤다는 거다. 그런데 그게 어디 갔어? 어? 그러게? 이 바보가 정리하다 그걸 어영부영 택배 상자랑 같이 버려버린 것이다.

그 뿐만이 아니다. 어제 저녁에 평소 즐겨가던 이탈리아 식당에서 외식을 했다. 우리 둘 다 그곳의 계절 샐러드를 좋아한다. 신선한 채소와 결대로 찢은 생 모짜렐라 치즈에 바질, 절인 토마토, 오렌지, 캐러멜라이징한 피칸이 올라가 있는 아이다. 얼마 남지 않은 마지막 샐러드를 두고 경쟁이 붙었고 짝꿍이 제 나눔접시에 욕심껏 샐러드를 가져갔다. 우리가 샐러드 접시를 다 비움과 동시에 직원분이 파스타를 가져오셨다. 이곳의 섬세한 서빙은 늘 감탄스럽다. 직원분이 그 섬세함을 발휘하여 나눔접시 바꿔드릴까요? 하는 순간 짝꿍이 네 하며 어영부영 제 나눔접시를 내밀어 버렸다. 이 바보야, 거기 오렌지 두 쪽 남아있다고. 우리가 맛있어서 아껴 먹던 그 오렌지!!! 니가 마지막으로 긁어간 그거!!!!

샐러드는 가고 새 나눔 접시와 파스타만 남은 현장


어제 공부 모임은 <페미니즘과 지리학> 1장과 2장에 해당하는 1) 지리학의 남성중심성과 2) 시간지리학의 한계와 효용에 관한 것이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지배적 주체의 '동일자'와 '타자' 개념을 짚고 넘어간 게 큰 도움이 되었다. 지배적 주체는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한다. 자기 자신을 참조하여 자신과는 다른 것을 타자로 구별함으로써 스스로를 포착한다. 지배자가 되려면 피지배자가 있어야 하고, 그 지배가 효력이 있으려면 같은 층위에 있는 무언가를 지배해야 한다. 지배적 주체는 구별 받는 대상이 되지 않고, 오로지 구별하는 주체로서 초월적 위치에서 동일성을 유지한다. 그러나 타자와 비교하지 않고는 본인의 속성을 획득하지 못하기에 이들의 정체성은 너무나 허약하다. 여성이 숏컷을 했을 때 그들이 그토록 혐오와 분노를 쏟아내는 이유는 머리가 짧은 것은 남성의 전유물인데 여성이 머리를 자름으로써 그들의 동일성이 침해되었기 때문이다. 남성은 할 수 있으나 여성은 할 수 없는 것으로 규정되었던 일들을 여성이 할 때 그들의 동일성이 흔들리기에 그토록 불안해하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남성이 지식을 산출할 수 있는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여성을 지식을 산출할 수 없는 존재로 타자화해야 한다. 학계의 젠더 차별적인 구조는 여성을 학계 밖으로 내몰고 차별적 구조에 따른 개인의 행동은 다시 그 구조를 강화한다. 여성이 버티기 어려운 구조 탓에 지리학자 중 여성의 숫자가 적은 것인데 이로 인해 여성은 지리학에 관심이 없다는 편견이 강화되며, 지리학에서 여성의 경험, 공간, 장소는 배제된다.

어제 설명에서 시간지리학이 나타내지 못하는 격차를 보여주기 위해 제시된 예시가 무척 탁월하고 적절해서 공유하려고 한다. 남성과 여성이 똑같이 저녁 9시에 집에서 출발해서 홍대에서 새벽 3시까지 놀고 4시에 귀가했다고 가정하자. 시간지리학의 관점에서 이 둘의 경험은 동일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성폭력 범죄 주의 구간 범례를 켜고 지도를 보면 둘의 경험이 얼마나 달랐을지 확연히 느낄 수 있다.


성폭력 범죄 주의 구간 표시 지도


위험 없는 지도


이 책을 읽어야겠는데 인근 도서관에도 없고 중고책 시세는 이따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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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YDADDY 2023-03-15 18: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기가오리 책자는 시중에 나오더라도 금방 절판되어 구하기도 어려운데 많이 속상하셨겠어요. 더군다나 오렌지!!!! ㅠㅠ
절판된 책은 꼭 구입하셔야한다면 모르겠지만 인근 도서관이나 책이음으로 대여를 생각해보시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역시 좋은 책은 품절 후 중고가가 엄청나네요. ㅠㅠ
공부 모임에서 공부하신 내용에 대해 공유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책먼지 2023-03-15 19:14   좋아요 4 | URL
대디님 아시는군요!!! 저 너무 속상한 나머지 짝꿍에게 영 브륄의 아렌트 철학 전기를 받아냈습니다!!! ㅋㅋㅋㅋㅋ
인근 도서관과 상호 대차되는 도서관 다 뒤져도 없어서ㅜㅜ 좀 멀리까지 가야 빌릴 수 있을 것 같아요!! 이거 기다리면 누가 다시 내줄까요?? 희망 없을까요?? ㅠㅠ 가오리님이 이 푸 투안 추천하시기에 비슷한 주제를 다루고 있는 다른 책을 찾아볼까 생각하고 있어요!!! <여자를 위한 도시는 없다> 요거도 괜찮아 보이네요..???

수이 2023-03-17 09:03   좋아요 1 | URL
아렌트 철학 전기 받아낸 건 진짜 잘하셨어요 책먼지님, 그런데 저 그거 있잖아요, 짝꿍님이 내다버리신 그 소중한 우리 한나 언니 사진 좀 보여주세요 엉엉어어엉 내가 다 울고 싶어진다.

책먼지 2023-03-17 09:14   좋아요 0 | URL
생각하니 저도 또 눈물이…😭 아름다웠겠죠..?? 아마 틀림없이 아름다웠을 거예요.. 하아.. 아렌트 철학 전기 가지곤 안 되겠다.. 정치와 법도 받아내야겠어요!!! 으으!!!

DYDADDY 2023-03-15 19:3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책이음 회원 전환 후 책바다 서비스를 이용하시면 택배비용의 일부분을 부담하고 전국 도서관과 대학 도서관의 책을 대여할 수 있어요.
https://books.nl.go.kr/
택배 대여는 이곳에서 신청하시면 되요.
운 좋게 ‘지칭에 관하여‘를 구했는데 그 이후에는 시중에 풀지 않으시더군요. 역시.. 회원이 되어야겠죠? ㅠㅠ

우끼 2023-03-15 22:28   좋아요 3 | URL
시중에 책 내는 것도 요즘 고려하고 계시다고 들었어요 !! 공부모임에서요..

책먼지 2023-03-15 22:42   좋아요 2 | URL
대디님, 공유해주신 링크 타고 들어가서 <페미니즘과 지리학> 소장하고 있는 도서관 목록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의 평안을 찾았어요!! 언제든 손에 넣을 수 있다!! 요런 깨알정보들 아낌없이 풀어주셔서 매번 진짜 감사해요!! 저 내일 바로 책이음 신청하고 대여 신청도 해보려고요!!
우끼님 저는 반만 듣고 있었나봐요!! 요즘 출판인 자부심 뿜뿜하시더니 가오리님은 다 계획이 있으셨군요!! 그나저나 저희 라이브에서 스쳤겠어요!!! 너무 반갑습니다!!!(우연성, 아이러니, 연대 읽고 싶은 책 추가하신 거 보고 우끼님 전기가오리 하시나 짐작만 하고 있었어요)
여차하면 아렌트만 한 부 살 수 있냐고 문의 넣으려고 했는데!!! 뭘 내실지 기다려봐야겠어요!!!

우끼 2023-03-15 22:49   좋아요 2 | URL
전기가오리 좋아요 ㅠㅠㅠ 덕분에 철학공부 놓치 않을 수 있었어요.. 물질적 혜택때문에 구독시작했다가 혼자공부 힘들어서 공부모임 시작한 이후로 전기가오리 팬 된 사람입니다 ㅠㅠㅠ 요즘 출판물보다 공부모임을 더 좋아하는 중이에요… 사실 저도 먼지님이 전기가오리 이야기해주셔서 내적친밀감 느끼면서 글읽고있었어요 ㅎㅎㅎ 홍보해주셔서 감사합니다(???단지 후원자일 뿐이지만..)

DYDADDY 2023-03-15 23:05   좋아요 1 | URL
책먼지님 // 저도 갬색해보았는데 생각보다 많은 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더군요. 대학도서관은 택배비용을 전액 부담해야 하니 일반도서관으로 신청하시면 니역도서관에서 택배비용을 일정부분 부담해줄겁니다. 지자체마다 다르다보니 직접 해보셔야 할거에요. 마음의 평안을 찾으셨다니 다행입니다. ^^

DYDADDY 2023-03-15 23:06   좋아요 1 | URL
우끼님 // 전기가오리를 하고는 싶지만 시간 문제로 바라보고만 있습니다. ㅠㅠ 후원회원이 되면 혹시 전기가오리에서 공부하는 책자를 받을 수 있는 건가요?

우끼 2023-03-15 23:19   좋아요 2 | URL
네네 맞아요!! 후원자가 되시면 출간된 다양한 책으로 진행하는 공부모임 참여(한국어 책 및 영어권에서 출간된 책의 중심내용 요약 설명 해주시고, 그걸 듣고 책을 읽은 후원자가 공부한 내용 요약하면 피드백 받을 수 있음), 전기가오리 번역 출판물 댁으로 배송 ,월4회 영어공부 학습지 제공 ,설명배달(각 지역으로 출장)에 참여할 수 있어요!
과거 출판물도 추가로 보내주시더라구요!

2023-03-15 23: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DYDADDY 2023-03-15 23:53   좋아요 2 | URL
우끼님 // 우끼님과 책먼지님에게 자극받아 후원회원 신청했습니다. 실시간 강의는 거의 참석 못하는 불량 회원이 되더라도 후원에 목적을 두려 합니다.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

2023-03-15 23: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DYDADDY 2023-03-16 00:20   좋아요 2 | URL
우끼님 // 지금의 전기가오리 페이지가 만들어지기 오래 전부터 언젠가는 해야지 했는데 이렇게 시작하게 되네요. 책먼지님과 우끼님이 결심을 도와주셔서 고마워요. 안온한 밤 되시길 바라요. ^^

2023-03-16 00: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잠자냥 2023-03-15 19:4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어디다 버리셨습니까? 제가 그 동네로 ㅋㅋㅋ

책먼지 2023-03-15 22:43   좋아요 1 | URL
저희 동네에선 이미 떠났습니다.. 또륵.. 쓰레기 수거해주시는 분들 진짜 부지런하시더라고요ㅠㅠ

단발머리 2023-03-15 21:55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공부해주신 것 정리해주시니 참 좋아요. 우아.... 이런 고급 커뮤니티가 있었군요. 반엘리트주의를 주창하는 학문 공동체라니....
대략 어느 쪽인지 알려주시면 아렌트님은 제가 접선하는 걸로 ㅋㅋㅋㅋㅋ 잠자냥님한테 알려 주지 마시고요 ㅋㅋㅋㅋㅋ 저한테

책먼지 2023-03-15 22:48   좋아요 2 | URL
후후후 공부한 거 정리하는 척하면서 사실 홍보하는 것입니다!! 요즘 후원자들 자꾸 떠난다고 하기에 저라도 영업을.. 단발님 지금 살짝 넘어오신 거 맞죠?
ㅋㅋㅋㅋㅋㅋㅋㅋ 아렌트 진짜 생각할수록 맘이 애립니다.. ㅠㅠ 단발님께도 자냥님께도 있기만 하면 다 드리고 싶다!!! 아 차라리 누가 발견하고 주워갔으면 덜 아까울 것 같아요ㅠㅠ

2023-03-15 22: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3-15 22: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3-15 23: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3-15 23: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3-15 23: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우끼 2023-03-15 23:4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으악 아렌트책.. ㅜㅜ 오렌지 너무 아까워요 ㅠㅠㅠㅠㅠ
와 아직 저 전기가오리 페미니즘과 지리학 못들었는데 시간지나기전에 꼭 들어야겠어요 요약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책먼지 2023-03-15 23:50   좋아요 2 | URL
ㅋㅋㅋㅋㅋㅋㅋ 우끼님!!! 저희 영업 성공했어요!!!

DYDADDY 2023-03-15 23:58   좋아요 2 | URL
우끼님과 책먼지님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댓글을 달아주실 정도인데 영업을 안당할 수가 없네요. ㅎㅎㅎ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

2023-03-16 08: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3-16 11: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공쟝쟝 2023-03-17 07:0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제가 전기 가오리라는 신문물을 이렇게 책먼지님을 통해 알게 되네요. 뭐 그런게 있다고는 알고 있었는 데 찾아보려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사실 알라딘 내 페미 책 읽기 따라가기도 벅찼다...) 언젠가 요구가 생기면 꼭 가장 먼저 먼지님께 물어보고 도움을 구하겠습니다! 철!!!학!!!!!!!
*지배자가 되려면 피지배자가 있어야 하고, 그 지배가 효력이 있으려면 같은 층위에 있는 무언가를 지배해야 한다. 지배적 주체는 구별 받는 대상이 되지 않고, 오로지 구별하는 주체로서 초월적 위치에서 동일성을 유지한다.*
저는 이 문장이 좋아요. 그러니까. 저는.. 피지배당하지 않기로 했어요. 나도 모르게 어느새 피지배를 자처하고 있었더라고요. 저는 똑바로 정신차리지 않으면 스스로를 타자화하기가 수월한 캐릭터를 지닌 여성이었던 거죠. 그런 의미에서 보부아르 읽기는 저에게 굉장한 경험이었습니다. !! 내가 나를 타자화하지 않기 위해서 열심히 읽고 쓰고 생각하고 있어요. 헤헷. 그게 나의 철학함이라고 여긴답니다.

책먼지 2023-03-17 08:57   좋아요 3 | URL
댓글에서마저 치열한 사유가 느껴지는 쟝님.. 하아.. 아침부터 또 이렇게 멋져버리시는군요🥹
쟝님 마음에도 전기가오리의 씨앗을 심고 말았군요!! 어떡하죠? 영업 너무 성공해버려가지고!!!
저는 여기 서재 와서 저의 여성주의 책읽기가 너무 얄팍했던 걸 깨닫고 이 부분을 채워넣으려고 합니다!! 서로에게 배울 점을 찾아내는 이게 참 알라디너의 자세인 것이죠??? (철학도 여성주의도 사실 제가 쟝님께 도움 청해야 할 판..)
피지배 자처한 거, 스스로를 타자화하고 있던 거 다 절절히 공감합니다ㅠㅠ 저 역시 말 잘 듣고 좋은 건 양보하는 k장녀 그 자체!!! 지배자의 세뇌가 저에게 체화되어 있단 걸 느낄 때마다 여전히 문득문득 소스라칩니다ㅠㅠ 보부아르 이 난 사람..💕(남자보는 눈은 좀 없으셨다!!) 쟝님의 철학함을 열렬히 응원합니다!!!

다락방 2023-03-17 10:0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페미니즘과 지리학 제발 어느 출판사에서든 개정판 내주었으면 좋겠어요. 제발요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