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칸토
앤 패칫 지음, 김근희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누군가 앤 패칫을 일컬어 "auto-buy author"라고 했던 말이 떠오른다. 신간이 나오면 무조건 사게 되는 작가라는 뜻이다. 부끄럽게도 이 <벨칸토>가 나의 첫 앤 패칫이다. 도서관에서 빌려왔고 어차피 하루가 연체된 김에 다 읽고 갖다 주자 마음먹고 오늘 다 읽었다. 우아하고 품위 있고 통찰력 있으면서도 장난기 넘치는 소설이었다. 모든 인물에 공정하게 애정을 쏟는 작가의 다정한 냉철함이 좋았다.


페루 일본 대사관 납치 사건에서 영감을 받았다고는 하나, 소설상으로는 밀림이 있고 스페인어를 사용하고 국민들이 드라마를 무척 좋아하는 남미의 어느 나라로 설정되어 있으므로, 굳이 페루를 상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 나라가 경제 발전을 위해 사업을 유치하려고 일본인 사업가 호소카와 씨를 부통령 관저로 초청한 데서 사건은 시작된다. 명목은 호소카와 씨의 생일 파티다. 평소 그가 오페라 애호가였음을 고려해 세계적인 소프라노 록산 코스의 공연이 준비된다. 본공연이 끝나고 박수가 터질 때 갑자기 사방이 암전되며 테러리스트들이 들이닥친다. 이들의 목적은 원래 이 자리에 있었어야 할 대통령이다. 문제는 대통령이 드라마 본방 사수를 위해 만찬에 불참했단 것이다. 대통령만 납치해서 저택을 빠져나가려던 테러리스트들은 당초 계획에 없던 수십 명의 인질을 떠안고 네달 반 동안 인질극을 벌이게 된다. 고립된 환경과 특수한 상황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에 어떤 화학 작용이 벌어질 수 있는지를 앤 패칫은 연민어린 시선으로 아름답게 그려낸다.


휴가차 이 나라에 왔다가 갑자기 인질 억류 사건의 협상자로 나서게 된 적십자 대원 메스너. 내보낼 인질 명단에 포함됐지만 자발적으로 남은 아르게다스 신부. 최소 8개 국어(일본어,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스페인어, 포르투갈어, 러시아어, 체코어) 이상을 통역 가능한 침착한 능력자 겐. 제집에 초대되었다 억류된 손님들을 위해 가사 노동을 전담하고 집사 역할을 자처하는 부통령 루벤. 그외에도 반드시 필요한 순간에 용기를 내서 숨겼던 능력을 발휘하며 꼭 필요한 몫을 하는 작은 영웅들. 앤 패칫 세계의 인물들이 지닌 고요한 품위에 독자마저 자세를 바로하게 된다.


(94) 겐은 살짝 고개를 숙였다. 마음 같아서는 이런 곳까지 와주고 그들의 생명을 위해 자기 목숨을 건 메스너에게 허리까지 굽혀 정중히 인사하고 싶었지만, 그래봤자 아무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때 호소카와 씨가 앞으로 걸어나와 접시에 놓인 명함 한장을 집어 들고 메스너와 악수를 나누더니 머리가 바닥에 닿도록 허리를 굽혔다.


(130) 호소카와 씨가 아니라면 겐은 절대 이 여자에게 말을 걸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이 느끼는 동정과 연민을 타인에게 표현할 용기가 없었으니까. 호소카와 씨 역시, 설령 완벽한 영어 실력을 갖췄다 해도 그녀에게 말을 걸 용기를 내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두 사람이 힘을 합하면 일은 훨씬 쉬워진다. 두 사람의 반쪽짜리 용기가 한덩어리로 결합되어 더욱 커지기 때문이다.


(216) 하느님, 그녀는 생각했다. 이 사람은 조용히 있는 법을 아는구나. 나처럼 소리 내지 않고 말할 줄 알아.


(226) 호소카와 씨는 정신을 추스르고 잔에 물을 따랐다. 돌아가보니 록산 코스가 겐과 함께 피아노 앞에 앉아 있었다. "너무 오래 기다리셨죠." 그가 말했다.

그녀는 유리잔을 받아들고 겐의 통역을 들었다. "물을 이렇게 완벽하게 준비해서 가져오셨으니 그렇죠." 그녀가 말했다. "뭐든 완벽하게 하는 데는 시간이 오래 걸리잖아요."


(292) "위대한 예술을 창조하려고 태어나는 사람이 있고, 그 예술품을 감상하려고 태어나는 사람이 있죠.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예술을 감상하는 것도 일종의 재능입니다. 화랑에 걸린 그림을 보든 세계 최고 소프라노의 목소리를 듣든 마찬가지예요. 모든 사람이 예술가가 될 수는 없어요. 예술을 사랑하고 감상하며 누릴 줄 아는 애호가가 있어야 하는 겁니다."


(305) 그들은 퀸과 킹을 체크라는 뜻으로는 한 번, 체크메이트라는 뜻으로는 두 번 가볍게 두드렸다. 겐이 적어준 단어들을 기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게임을 끝마칠 때에도 조용했다. 승패를 인정하는 뜻으로 고개를 가볍게 끄덕여 보이고, 다음날 다시 게임을 할 수 있도록 판 위에 말을 전부 다시 늘어놓는 것이었다. 말을 아무렇게나 테이블에 흐트러뜨려놓고 방을 나가는 것은 이 두 남자에겐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312) 저들이 차라리 군인이 뚫고 있는 터널이나, 아니면 원래 기어들어온 냉방 통풍구로 다시 기어나가 밀림의 본거지로 돌아갔으면 좋겠다고 그는 생각했다. 이자들은 그다지 뛰어난 테러리스트가 아니었다. 하지만 바로 그 사실 때문에 이들이 결국 받게 될 처벌이 과하게 느껴졌다. 그는 그들을 동정했다. 인질극을 벌이는 자들에게 동정심을 느낀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락방 2023-03-12 19:4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우엇! 책먼지 님 이 리뷰 읽으면서 작가 이름은 처음이라고 생각해서 염두에 두고 있는데 내용은 너무 알겠는거에요. 이거 영화로 본건데?! 제가 비행기 안에서 무슨 영화볼까 넘기다가 줄리안 무어 주연이라고 해서 본 영화가 있거든요. 그 영화랑 완전 내용이 같은거에요! 지금 검색해보니 영화 제목도 <벨칸토> 인데 소설 원작이라고 나오네요. 와- 이렇게 만나네요. 책먼지 님은 대체 누구십니까!!

책먼지 2023-03-12 20:46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ㅋㅋㅋ 다락방님이야말로 대체 누구십니까!!! 나중에 진짜 제발 회고록 좀 꼭 써주세요ㅋㅋㅋ 까도 까도 또 나오는 이 이야기보따리!! 혼자 알기 너무 아깝습니다ㅋㅋㅋ 저는 영화가 있는 줄 몰랐는데 설마 줄리안 무어가 록산 코스 역인가요??? 소름 돋게 잘 어울려요ㅠㅠ 비행기에서 영화봤던 다락방님의 과거가 어쩌다 서재로 굴러들어와서 앤 패칫 소개하는 저의 지금과 이어지는 이 축제의 현장ㅋㅋㅋㅋ 저는 냅다 영화 찾아보러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