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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총을 받은 사람의 우화 ㅣ 옥타비아 버틀러의 우화
옥타비아 버틀러 지음, 장성주 옮김 / 비채 / 2023년 5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야기의 줄기를 따라가야 하는 독자에게 주인공 로런 올라미나의 일기는 현재로 기능한다. 즉, 거기에 붙은 딸 라킨의 주석은 모두 사후적인 것이 된다. 갓난아이일 때 납치당해 입양아로 자란 라킨은 그를 납치한 극우 기독교 분파의 가치관을 주입받으며 억압 속에 자란다. 해당 기독교 분파는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익숙한 슬로건 아닌가. 이 책이 현실을 예언했기에 새삼 차트를 역주행해 베스트셀러가 됐다고 한다)라는 기치를 내걸고 당선된 재럿 대통령을 등에 업고 광신과 맹목 속에 그들만의 십자군 전쟁을 치른다. 로런이 일군 공동체에도 침입해서 납치, 폭력, 강간, 살인, 약탈을 자행한다. 공동체의 삶의 터전인 에이콘을 '재교육소'로 만들어서 사람들을 강제로 수용하고 목줄을 채워 노예로 부리며 '교화'시킨다. 라킨은 이런 자들이 가르치는 정통 기독교 교리를 배우며 자랐고 따라서 라킨에게 로런의 '지구종'은 사이비 종교이고 로런은 '사이비 교주'에 불과하다. 이처럼 이 책의 두 주요 화자 사이에는 커다란 시점과 관점의 격차가 존재한다. 게다가 '잃어버린 딸'과 '딸을 찾지 못한 엄마'라는 데서 오는 권력차도 있다. 로런을 부당하게 비난해도 괜찮은 존재가 있다면 그건 라킨뿐일 것이다. 두 화자의 엇갈리는 관점 사이에서 독자는 어느 화자도 온전히 신뢰할 수 없으며 양쪽 모두를 어느 정도 의심하게 된다. 이로 인해 발생하는 긴장감이 책 전반을 지배한다.
이 책은 묻는다. 그토록 사랑을 강조하면서 정작 사람들이 서로에게서 등돌리게 만드는 종교가 과연 옳은가. 그 대척점에 있다고 할 수 있는 올라미나의 '지구종'에도 전혀 설득되진 않았으나 굳이 골라야 한다면 나는 사람들이 서로에게 잘해주는 쪽을 고를 것이다. 광기와 굴종, 배반을 경계하고 이성과 상식, 배려에 가치를 두는 쪽이 당연히 더 낫다.
한편 이 책은 최악의 인간성은 어떤 기전과 형태로 발현하는지 보여주는 생태 보고서 같다. 보고 있기 괴로울 정도로 극악한 온갖 인간군상이 등장하는 와중에도 최악의 빌런을 꼽자면 로런의 남동생인 마크를 들 수 있을 것 같다. 마크는 얼핏 보기에 무해하고 심지어 선한 사람으로까지 보인다. 그러나 지나칠 정도로 인정 욕구가 강하고 자신의 인정 욕구를 채우기 위해 그 어떤 비겁한 선택도 할 수 있는 사람이다. 마크가 엇나간 데 로런의 잘못이 없다고 할 수는 없다. 로런은 자신이 일군 공동체에서 마크가 필요 이상의 영향력을 행사하거나 '지구종'을 망칠까봐 그가 공개적으로 망신을 당하도록 내버려뒀다. 하지만 로런은 마크를 성노예 포주에게서 구출해왔고 그의 생명을 구했다. 반면 마크는 자신이 몸담고 있는 교파가 로런에게 잔학행위를 저질렀음을 알면서도 그를 외면했고 로런을 설교의 재료로 써먹었으며 진즉 라킨의 행방을 찾고도 로런에게 알리지 않았다. 로런이 라킨을 애타게 찾는 걸 알면서도 진심으로 찾는 것 같지 않다며 로런을 비난했다. 아마 그런 식으로 상대를 비난하면서 본인이 저지른 짓을 정당화했을 것이다. 세 살에 아이를 찾고도 열여덟 살이 될 때까지 입양 가정에 방치함으로써 로런이 딸을 찾을 기회뿐만 아니라 라킨이 사랑받으며 자랄 기회 역시 박탈했다.
우화 시리즈 1권에 해당하는 <씨앗을 뿌리는 사람의 우화> 이후 후속편이자 완결판인 <은총을 받은 사람의 우화>가 번역되어 나오기까지 1년 넘게 기다렸다. 1권의 주요 문제가 '일단 살아남기'였다면 2권의 주요 문제는 '어떻게 살 것인가'에 더 가깝다. 1권이 로런이라는 개인과 그 개인을 구성하는 특질(초공감능력 등)에 더 집중했다면 2권은 보다 구조적인 문제에 집중하고 있다. 따라서 2권은 더 나은 삶과 안정을 바라면서 되려 불안과 분열을 조장하는 사람을 지도자로 뽑아버린 이들에게 충분히 '우화'로 기능할 것이다.
"우린 온갖 방식으로 학대당했어요. 모두 상처받은 사람들이죠. 온 힘을 다해 낫는 중이고요. 그러니까, 아니에요. 우린 정상이 아니에요. 정상인 사람들은 우리가 이겨낸 걸 이겨낼 필요가 없었어요. 만약 정상이었다면, 우린 이미 죽었을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