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모든 것이 완성되면......

내가 마지막 펜놀림까지 끝내고 나면

나는 옳거나 그르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우리가 오늘 헤어진다고 해도 그는 내 삶에서 횃불 노릇을 할 거야.

- <츠바이크의 발자크 평전 중>

 

오노레 드 발자크의 이야기다. 그리고 그가 십칠여 년간 오매불망 자신의 아내가 되기를 꿈꾸다 거의 죽음에 이르러서야 부부가 된 한스카 부인이 자신의 여동생에게 보낸 발자크에 대한 속내의 이야기다. 하지만 이 두 이야기는 모두 어떤 의미에서 실현되지 못하거나 거짓이었다. 발자크는 빅토르 위고의 조사에서 이야기된 것처럼 모두에게 위대한 평등이자 자유인 죽음 앞에서 이 모든 것을 끝내 완성하지 못했고 그럼에도 그가 '옳았다'는 것을 그의 작품들로 증명해 내었고 그가 자신의 부와 명예를 담보로 한 지극히 세속적이고 속물적인 숭배를 바친다는 것을 항상 의식하고 있었던 한스카 부인은 끝까지 그의 사랑을 계산했으니까. 그녀의 발자크에 대한 정확한 감정은 그 어떤 누구도 장담할 수 없을 만큼 복합적이고 모순적이고 베일에 싸여 있다. 그녀는 발자크의 오랜 연인이 되고 그와 끊임없이 주고받은 편지를 보관함으로써 자신을 역사 속의 한 존재로 승격시켰지만 그럼으로써 자신의 진정성과 자신의 충절을 의심받는 불충을 저질렸다. 그녀 또한 발자크처럼 불멸을 택했다. 발자크를 사랑했던 이 책의 저자 슈테판 츠바이크는 이 여자를 미워한 것처럼 보인다.

 

 

 

 

 

 

 

 

 

 

 

 

 

 

 

 

 

 

슈테판 츠바이크의 생의 역작 <발자크 평전>은 그의 죽음으로 발자크의 저 거대한 인간 세계의 축도를 언어로 완성해 내고자 했던 꿈이 좌절된 것과 같은 길을 걸었다. 역설적으로 슈테판 츠바이크를 지배했던 발자크의 삶, 문학에 대한 사랑과 경탄은 영원히 완결될 수 없는 생명을 얻었다. 완성되지 못했기 때문에 열려 있고 그 열려 있는 통로는 여전히 끊임없이 들숨과 날숨이 오고간다. 삶과 인간 세계 전체를 그렇게 자신의 작품 안에서는 현명하게 조망할 수 있었던 이 사내는 삶에서는 항상 실패했고 그 실패는 슈테판 츠바이크 자신이 그러했던 것처럼 "배가 막 항구를 보았기 때문에 그는 파도치를 바다를 향해 키를 돌렸다."와 같다. 발자크는 귀족을 숭배했고 돈을 숭앙했고 돈을 가진 귀족 여자를 만나 자신의 삶을 전복시키고 그것을 딛고 뛰어 오르기를 바랐다. 항상 무모하게 사업을 벌였고 실패하고 또 시도하고 쓰지도 않은 소설들을 미리 팔아 챙긴 돈을 흥청망청 쓰고 빚쟁이들로부터 도망다녔다. 우스꽝스럽게도 그는 돈 많은 여자들이 자신의 삶을 구제해 줄 수 있다고 믿고 실제 끊임없이 그러한 후보자들을 물색하고 쫓아다니고 그녀들에게 시간, 돈, 열정을 낭비했다. 파리가 모두 잠자리에 들고 난 다음 수도복을 입고 미친듯이 쓰고 또 쓰고 열번 이상을 고쳐 쓰며 인간의 그 어리석은 욕망을 그 좌절하는 행함을 생생하게 그려내는 성실하고 열정적인 작가의 모습 또한 발자크의 것이었다. 발자크는 몸소 자신의 삶과 자신의 존재에서 가장 섞이기 힘든 그 모든 복합적이고 모순적인 요소들을 한데 뭉뚱그려 달고 다닌 인간이다. 서머싯 몸이 그를 진실성이 없는 자기 중심적인 인간이라 비난해도 "그는 내가 주저 없이 천재라고 부르고 싶은 유일한 작가"라고 상찬한 것이 한데 만날 수 있었던 것과 같은 맥락일 것이다. 그는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슈테판 츠바이크가 "발자크라는 현상은 모든 논리적인 결론이 빗난간다."라고 이야기했던 것은 차라리 하나의 사족이다. 그리고 어쩌면 그러한 그의 서글프고 어리석고 무모한 삶이 우리 자신들의 삶이 극단적으로 극화되었을 때와 닮아 있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은 하나의 예언 같다. 모든 인간과 모든 삶은 언제나 항상 그러한 가능성으로 가장 쉽게 흘러가기 마련이니까.

 

 

 

 

 

 

 

 

 

 

 

 

 

 

 

 

 

 

 

 

영악한 두 딸에게 아낌없이 퍼주고 죽어가는 고리오 영감도 발자크가 그려내려 했던 <인간희극>의 인간 군상의 한 축도다. 모든 것을 계산하고 모든 것을 감안하고 현명하게 살아가고 싶은 소망이야 누구에게나 있지만 삶은 그렇게 녹록하게 손 안에 들어오는 것이 아니다. <나귀 가죽>에서 골동품상 노인이 우리 인간 자신의 존재 원천을 고갈시키는 것으로 삶의 동인인 '바람'과 '행함'을 든 것도 결국 그러한 삶과 존재의 생래적인 모순, 한계를 인정한 것이다. 그러니 발자크의 눈이 멀어서도 한스카 부인의 곁에서 귀족 생활을 누리려 했던 그의 어리석음은 그 자신이 마지막으로 쓰다 만 가장 서글픈 삶의 텍스트다. 그러한 그의 마지막을 목격하고 그의 장례식에서 조사까지 낭독한 사람이 빅토르 위고였다. 빅토르 위고는 이 성취로는 위대했고 삶으로는 어리석었던 남자의 삶을 가장 고결하고 우아하게 압축하는 언어를 선물한다. 마침표다.

 

발자크라는 이름은, 신사 여러분, 미래에 우리 시대를 알리는 빛나는 흔적 속으로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슈테판 츠바이크가 "밀도가 전부다."라고 했던 이야기는 발자크에게서 가장 온당한 밀도를 얻는다. 그는 단 하루도 '산다는 의미'에서 낭비하지 않았다. 그 나머지가 낭비된 것은 사실 이러한 의미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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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02-09 2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유분방하게 살면서도 글 쓰는 일에 충실한 발자크의 삶은 시도니 가브리엘 콜레트의 삶과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콜레트가 소녀였을 때 독서를 좋아했어요. 그녀가 제일 좋아했던 작가가 발자크였습니다.

설 연휴 잘 보내셨습니까? 마지막 연휴 잘 보내시길 바랍니다. ^^

blanca 2016-02-10 10:59   좋아요 0 | URL
이렇게 통찰력 있는 글을 써낸 사람이 어쩌면 이렇게 밥 먹듯이 사기를 당하고 사업에 실패하고 여자들 꽁무니를 쫓아다니는 행태를 거의 죽을 때까지 계속했을까, 하는 의문이 들면서도 어쩌면 발자크가 실생활에서는 그랬기에 이러한 글들을 남길 수 있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고 그랬어요. 벌써 연휴 마지막 날이네요. cyrus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공부하기 싫을 때면 스무 살의 오월에는 꼭 사랑이라는 걸 해 볼 거라며 전의를 불태웠다. 그리고 정말 거짓말처럼 스무 살 오월에 그 남자를 만났다. 그것은 첫사랑이라기보다는 하나의 팬심이었다. 나는 지금 아이들이 아이돌을 따라다니듯 짝사랑인지 아니면 서로 주고 받는 것이 사랑인 지도 인식하지 못한 채 맹렬히 그 '첫사랑'이라는 것이라고 나름대로 명명한 것에 매달렸다. 그것은 백일도 채 못 가 사그라질 잉걸불이었다. 초라하고 부끄러운 하지만 유일무이한 경험이었다. 스무 살로 돌아가면  그 남자에 퍼부었던 그 아낌없던 유치한 감정들이 도드라지며 떠오른다. 최선을 다했기에 어리석었지만 후회는 없다.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간다 해도 나미의 "슬픈 이별"의 가사처럼 "또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리려나" 싶지만 나는 어쩌면 또 똑같은 실수를 저지르고 후회하고 또 후회할 것이다. 그게 젊음이니까. 그게 또 첫사랑의 무모함이니까.

 

 

 

 

 

 

 

 

 

 

 

 

 

 

 

 

 

 

2011년 당신의 부음을 명확히 기억한다. 그 날은 눈발이 흩날렸고 첫아이를 낳았던 집에서 씩씩대며 이사나가던 날이었으니까. 아저씨들이 짐을 꾸릴 때 나는 우연히 당신의 부음을 들었다. 마음 한켠이 스산해져 와서 동생에게 문자를 보내던 기억이 난다. '인터뷰'  벌써 당신의 죽음이 오년을 훑고 지나갔고 당신과 친분이 있던 사람들이 애정을 담아 기록했던 당신과의 대화, 대담들이 다시 뒤로 보내었던 시간들을 불러 모은다. 특히나 정이현 작가가 에필로그처럼 덧붙인 말.

 

우리는 주로 맛있는 밥을 같이 먹었다. 어떤 약속은 지켜졌고 어떤 약속은 그렇지 않았다.

-<우리가 참 아끼던 사람> 중 

 

박완서 작가와 정이현 작가의 거리가 그 다른 어떤 설명도 필요 없는 관계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문장. 지켜진 약속과 그렇지 못한 것들이 지나가도 변함없는 관계의 친밀감은 많은 설명이 필요치 않을 것이다.

 

<그 남자네 집>에 대한 이야기가 계속 거론된다. 내가 읽은 것은 단편인데 그것이 후에 장편이 된 모양이다. 갑자기 그 이야기가 다시 읽고 싶어져 찾아보니 세상에, 2007년 박완서 작가의 친필 서명이 있는 <친절한 복희씨>에 몇 번이나 줄을 그으며 읽은 흔적이 있는 그 이야기가 여전히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또 돌아가고 또 가고. 문장들이 낯설지 않다.

 

 

 

 

 

 

 

 

 

 

 

 

 

 

이미 노년에 접어든 화자가 후배의 집들이에 간 김에 그 근처에 살았던 자신의 청년기와 첫사랑을 회상하는 이야기다. 6.25라는 시대사를 관통하는 이야기는 지극히 역사적이고 지극히 사적이다. 시대의 격동은 '나의 첫사랑'을 두고 흘러가지 않는다. 그녀의 선택은 안일했지만 당연했다. 아름답지만 미숙했던 첫사랑을 저버린 것은 아이를 낳고 그 아이를 흔들림 없이 양육할 굳건한 우산 같은 남자를 택해야만 한다고 믿었을 화자에게 당연한 귀결이었다. 그것이 비단 그 때만의 시대상이었을까. 모든 허룩하고 순전한 첫사랑의 귀결 앞에는 그 동화의 마지막을 싹둑 잘라 낼 엄혹한 현실이 다양한 형태로 다가온다. 이 가식 없는 이야기를 이루는 문장들은 하나 하나가 다 필사하고 싶을 만큼 인간에 삶에 밀착해 있어 뚫고 들어온다. 이야기란 모름지기 이래야만 영원히 살아 꿈틀댈 것이다. 절망하기엔 이르다.

 

졸업식 날 아무리 서럽게 우는 아이도 학교에 그냥 남아 있고 싶어 우는 건 아니다.

<중략>

 

나에게 그가 영원히 아름다운 청년인 것처럼 그에게 나도 영원히 구슬 같은 처녀일 것이다.

-<그 남자네 집> 중

 

첫사랑은 이런 것이다. 결국은 이렇게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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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01-28 12: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박완서님이 쓴 소설 중에 슬프면서도 쓸쓸한 여운을 주는 첫사랑을 소재로 한 작품이 있습니다. 제목이 `그 여자네 집`입니다. 고등학교 문학 교과서에도 나왔던 소설이에요. ^^

blanca 2016-01-28 15:55   좋아요 0 | URL
<우리가 참 아끼던 사람>에도 그 이야기가 나오더라고요. 작가가 난감해 하는 반응이어서 김영하 작가도 그렇고 교과서에 작가들 작품이 실리는 게 한편 작품을 규격화하거나 인위적인 해석에 대한 부담감으로 작용하기도 하는가 봅니다.

2016-02-05 23: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2-07 17: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해마다 다이어리를 열심히 쓰는 편이다. 신기한 게 갈수록 글씨가 커지고 흘려 쓰게 된다. 서른 언저리의 다이어리의 글씨는 내가 쓴 게 분명한데도 읽으려면 눈이 피곤할 정도로 빽빽하다. 가소로운 것은 해마다 나이 많이 먹었다,고 겁에 질려하는 모습. 특히 서른 언저리에 그러고 앉아 있었던 과거의 나를 보면 슬쩍 귀엽기까지 하다.

 

이제는 정말 더 이상 젊지는 않다,고 느끼게 됐는데

 

육십대 내내 나는 여전히 중년 언저리에 있다고 느꼈다. 중년이라는 해변에 안착한 건 아니고 그 연안을 항해하고 있어 중년이 소리쳐 부르면 닿을 거리에 있다고 말이다. 일흔 번째 생일에도 그 느낌은 바뀌지 않았는데, 그건 내 생일이 지난 것도 거의 몰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흔한 번째 생일이 되자 그 느낌은 결국 바뀌었다. '일흔이 넘었다'는 건 늙은 것이다.

-다이애너 애실 <어떻게 늙을까> 중

 

엥? 일흔까지 중년? '늙었다'는 건 일흔은 되어야 하는 건가? 저자 다이애너 애실은 1917년생이다. 물론 생존 작가. 은퇴는 75세에 했다. 문학 전문 출판사를 설립하고 그곳의 편집자로 필립 로스, 잭 케루악, 진 리스, 존 업다이크를 발굴했다고 작가 소개란에 나와 있다.

 

 

 

 

 

 

 

 

 

 

 

 

 

 

 

손바닥 만한 책. 이백여 페이지. 낯선 이름. 게다가 여든 아홉의 할머니가 어떤 이야기들을 해 줄 수 있을까. 그녀는 그렇게 일흔한 번째 생일이 되자 드디어 "늙은 게 뭔지 여러모로 따져보고 헤아려 볼 때가 되었음을 알았다." 그녀는 결혼하지 않았고 아이를 낳을 뻔 했지만 중간에 잃었고 무신론자고 자신의 가계를 따져가면 대부분 장수하며 얼마 안 앓다 감내할 수준의 고통을 겪다 죽음을 맞은 이들이 대부분이라 자신의 늙음과 죽음에 대하여서도 낙관한다. 대단히 건조한 듯한 어투지만 난감할 수준으로 솔직하기도 하고(여기서 버트란드 러셀과 같은 나라 출신, 비교적 건강한 몸으로 장수한 것의 공통점) 젊은 시절의 다소 화려한 연애 편력에도 그다지 죄책감이나 거리낌을 느끼지 않고 이야기하는 모습, 그러나 때때로 삶에 대하여 예리한 통찰력을 꾸미지 않고 이야기하는 대목이 매력적이다. 이런 여든 아홉이라면 한번 해볼만 하지 않을까 싶은 마음이 솔직히 든다. 우울하거나 자조적이지 않다. 죽음에서 멀지 않은 나이에 떠올리는 이러한 기계론적 연상은 이 할머니의 담담한 말들 앞에서 밀려나간다.

 

그런데 이제 막 인생을 시작해 모든 가능성이 열린, 앞날이 창창한 이들을 간간이 보게 되면 우리는 그저 가느다란 검은 선 끄트머리에 있는 점이 아니라 시작과 성숙과 쇠락, 그리고 새로운 시작으로 가득한 광대하고 다채로운 강의 일부라는 사실, 아직도 그 일부이며 우리의 죽음 역시 아이들의 젊음과 마찬가지로 그 일부라는 사실을 떠올리게 된다.

-p.110 

 

오늘 한 무리의 할머니들이 엘리베이터에 탔다. 만면에 가득한 웃음들. 아기 둘을 둘러싸고 이쁜 언니들이라고 당신들을 지칭하며 발산하는 느낌은 강퍅함도 서글픈 기운도 아니었다. '어떻게 늙을까' 그냥 한번씩만 물어보며 걸어가도 그 길은 조금 더 넓어질 것 같다. 떠밀려 가다 보면 다이애너 애실의 말처럼 때로 "그저 가느다란 검은 선 끄트머리에 있는 점 " 이 되어버릴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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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6-01-26 11: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브랑카님 아직도 젊으신데 벌써부터 이런 쪽의 책을 너무 탐독하시는 거 아닙니까?ㅎㅎ
사실 그렇더군요. 예전엔 60도 많다 싶었는데 저의 어머니 60대에 할머니란 소리 듣기 싫어하시더군요.
솔직히 75세도 좀 억울할 것 같아요. 100세 가까이 산다고 치면.
옛날 70대와 지금의 70대는 다르죠.
올해 저의 어머니가 80이신데 작년에 그리 아프셔서 그런지 이제 빼도 박도 못한 노년이다 싶더군요.
저도 중년이고 보니 마음은 하나도 안 바뀌었는데 나이만 든다는 게 좀 억울하다 싶더군요.
예전엔 몸도 마음도 다 청춘이었는데.
그러니 우리 2,30에 중년이면 나이 꽤 많은 줄 알고 줄긋기를 했다는 게 참 의미가
없어져요. 지금의 2, 30대가 우릴 보면 그러고 있겠지 하면 이 나이차란 극복할 수 없는 건가 싶기도 하구요.ㅠ

blanca 2016-01-26 15:55   좋아요 1 | URL
스텔라님, 정말 그렇죠? 제가 요즘 보는 책들이 너무 한 분야로 집중된다는 느낌이... 아직 젊다고 얘기해 주시니 갑자기 기분이 정말 확 젊어진 것 같고 좋네요.^^ 맞아요, 제 예전 다이어리만 봐도 얼마나 가소로운지 실소가 자꾸 나온다니까요. ㅋㅋ 나중에 읽으면 지금 제 글이 또 그렇게 느껴질까 걱정입니다.
 

애거서 크리스티는 추리 소설도 좋지만 '메리 웨스트매콧'이라는 필명으로 낸 여섯 편의 장편의 묘미도 기막히다. 대단히 심오하거나 스토리라인이 걸출한 이야기들은 아니지만 한 권 한 권마다 그녀의 삶에 대한 깊은 통찰, 예리한 직관, 언제나 무리없는 이야기 진행력이 말 그대로 참 좋다. 그런데 유독 한 대목이 참 인상적이라 여러 번 펼쳐 보게 된다.

 

 

그녀는 인간의 본성이 지닌 독특한 모순에 대해서도 얼마쯤 알게 됐다. 과거에는 젊은 사람다운 독단에 빠져 사람을 흔히 '착하다'  또는 '나쁘다'로만 평가했지만 사람을 평가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배우게 됐다. 그녀는 믿기 어려울 정도의 용기를 내어 부상자를 구했던 사람이 방금 자기가 목숨을 내걸고 구한 사람의 작은 물건을 훔치는 비열한 지경으로 전락하는 꼴도 보았다.-애거서 크리스티 <딸은 딸이다> 중

 

 

 

 

 

 

 

 

 

 

 

 

 

 

절대적으로 선하거나 절대적으로 악한 사람의 양 대척점에는 분명 아주 소수만 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그것조차도 하나의 환상이나 허상일지도 모른다. 많은 사람들이 그 다양한 스펙트럼에 흩어져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 사람이 그럴 줄 몰랐어", 혹은 "그 사람은 그럴 리가 없다",는 말이 얼마나 빈약한 표현인 지를 기억하려고 한다. 나부터도 과거의 수많은 기억 속에서 꺼내어 보기도 부끄러울 만한 모습들이 있고 지금의 나를 이루는 일부로 통합하기 어려운 발언이나 행동을 했던 적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버트런드 러셀의 자서전을 읽는데 그러한 점을 감안하더라도 참으로 혼란스럽다. 구십이 넘은 나이에도 반핵 운동 시위에 나섰던 행동하는 지성이자 <행복의 정복>의 저자가 너무 솔직하니 난감할 정도다. 그 솔직함의 잣대는 특히나 자신의 연애, 타인에 대한 평가에서 두드러지니 더욱 그러하다. 평화주의자, 반전주의자이자 여성의 참정권을 위해 적극적으로 나섰던 러셀이 아내를 두고 귀족 집안의 (이 대목이 강조되는 부분도 사실 프루스트가 귀족 가문을 동경해 마지 않았던 속물성과 큰 차이 없어 보인다) 유부녀와 벌이는 애정 행각도 시작해 불과했다. 그 여인과 소원해지며 또 다른 젊고 아름다운 여자가 그의 관심을 끄는 대목까지 와 있다. 이미 훌쩍 노년기에 있는 작가가 자신의 삶을 반추하며 그저 그것을 미화하거나 하나의 거대한 조작으로 몰고 가는 것보다야 이런 솔직함이 더 그 글을 쓰는 취지에 맞을 것이다. 그리고 아직 나는 그의 삶의 중년기까지도 이르지 못한 터다. 이미 늙어 자신의 삶을 큰 그림으로 조감하는 사람 앞에서 고작 그의 반도 못 산 내가 느끼는 이러한 당혹감은 미숙한 것일런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이 위대한 러셀에 대한 환상이 조금씩 허물어져 가는 중이다. 더해서 D.H. 로렌스와의 교유에서 그의 적나라한 실체를 고발하는 대목은 더욱 그러하다. 로렌스의 <아들과 연인>에는 그의 가난했던 유년 시절과 청년기가 눈물겹도록 아름답게 그려져 있다. 한 장면 한 장면이 다 생생하게 떠오를 정도로 그의 묘사력과 언어는 로렌스만의 독특한 마력이 있었다. 그런데 뒤에서는 이런 사람이었다니... 러셀의 이야기에 의하면 그는 헛된 망상에 사로잡힌 파시스트였다. 게다가 사상도 없이 그저 아내의 사상을 언어화하는 꼭두각시이기도 했다.

 

아, 어쩌나. 자서전이나 평전을 좋아하는데 이렇게 난감하기는 또 처음이다. 아직 반도 안 왔으니 더 주욱 나가면 이러한 그의 뜨거운 솔직함도 인간에 대한 이해나 삶을 알아가는 데에 일부분으로 잘 통합될까. 이것은 마치 내가 존경하는 은사님이나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애정을 표현하는 앞에서 의미심장한 비웃음으로 입술을 떼기 시작하는 그의 측근을 만나 껄쩍지근한 뒷얘기를 듣는 느낌과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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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집 2016-01-22 19: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예전에 프랑크 로이드 라이트 자서전 읽고 대단한 건축가구나했는데, 그가 엄청난 인종차별주의자에 유부녀와 놀아나 결혼까지 했다는 사실 알고 경악했어요.,책에는 어찌나 자수성가한 인물로 묘시했던지..하아 흑인집사가 그이 멸시와 모욕을 견디다 못해 그의 처자식을 죽일 정도로 개같은 인성의 소유자더라구요. 하....

blanca 2016-01-23 09:49   좋아요 0 | URL
아, 저도 어렴풋이 서재에서 읽었던 기억이 나요. 유명인들이나 역사적으로 위대한 업적을 남긴 사람들도 사생활에서 비도덕적이었거나 그의 세평과 맞지 않는 뒷모습이 많더라고요. 그래도 제가 기대했던 러셀상이 있어서 참, 타인이 쓴 평전도 아니고 자서전인데 실망스러운 면이 많이 보이네요. 그래도 적어도 자신을 포장하거나 미화하기보다는 되도록 있는 그대로 그리려 하는 그 정직성 만큼은 돋보여요.
 
입 속의 검은 잎 문학과지성 시인선 80
기형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8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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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이 그의 시가 '그로테스크하다'고 평할 때 고개를 갸우뚱했다. 내가 떠올리는 그로테스크는 괴괴하고 음습한 분위기다. 서른이 안 되어 새벽의 극장에서 죽어간 시인의 시에는 왠지 어울리지 않는 평이라고 생각했다. 그로테스크는 진지하거나 무겁지 않다고 여겼다. 그것은 그렇게 보이기 위한 과장이라고.

 

기형도의 시집에는 맞춤하게 김현의 비평이 첨부되어 있다. 그는 다시금 그의 시를 그로테스크하다고 평하고 그것에 대하여 설명한다. "그로테스크라는 말은 원래 무덤을 뜻하는 그로타에서 연유한 말이다"라는 김현의 한 문장으로 드디어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렇다면 내가 만난 기형도는 충분히 그로테스크하다. 사람은 부수적인 것이지, 본질적인 것이 아니다,라는 비평가의 이야기는 기형도의 시와 닮았다.

 

어차피 우리 모두 허물어지면 그뿐, 건너가야 할 세상 모두 가라앉으면 비로소 온갖 근심들 사라질 것을.

그러나 내 어찌 모를 것인가. 내 생 뒤에도 남아 있을 망가진 꿈들, 환멸의 구름들,

그 불안한 발자국 소리에 괴로워할 나의 죽음들.

-<이 겨울의 어두운 창문> 중

 

 

기형도는 세상과 아니 기본적으로 삶과 불화했던 것 같다. 그는 "나는 인생을 증오한다"고 표현한다. 불행하다,고 되뇌인다. 공장에 다니는 큰누이, 병든 아버지, 헛된 희망을 가지며 생활을 꾸려나가야 했던 어머니를 둔 소년은 학교에서 받은 상장도 마음껏 자랑하지 못했던 아픈 추억들을 가진 그였다. 그러나 그의 개별적 삶은 그만의 "헛것"이나 절망이 아니다. 그는 기본적으로 생명을 가지고 삶을 살아내야 하는 존재가 가지는 본원적 상처와 고통을 철저히 응시한다. 그러니 "어차피 우리 모두 허물어지면 그뿐,"이라는 자조적인 목소리는 그만의 것이 아니다. 눈부시게 푸른, 푸르렀던 청춘은 조로했다. 그는 이미 늙어서 알아야 할 것들을, 깨달아야 했을 것들을 너무 일찍 농밀하게 가져버렸다. 그러니 "찾지 말라, 나는 곧 무너질 것들만 그리워했다"는 그의 고백은 곧 유언이 될 터였다.

 

<봄날은 간다>에서 "여자는 자신의 생을 계산하지 못한다"는 안타까움은 어쩌면 너무 많이 느끼고 보고 듣고 알아버린 그가 가져가야 하는 다른 모든 이들의 삶의 환멸, 절망을 이미 이 시인에게 지게 한 우리 모두에 대한 성찰일 지도 모른다.

 

너무 아픈 시. 그의 죽음 앞에서 김훈이 "가거라, 그리고 다시는 생사를 거듭하지 말아라. 인간으로도 축생으로도 다시는 삶을 받지 말아라."(김현 해설 발췌) 라는 이야기는 기형도가 미처 다 하지 못한 이야기, 그리고 삶의 그 무수한 희망, 헛된 시도, 생에 대한 끄달림을 한 마디로 다 끌어다 버리는 마침표 같아 스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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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01-19 21: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지금처럼 마음 깊숙이 시리게 하는 겨울밤이면 생각나는 시집입니다.

blanca 2016-01-20 18:39   좋아요 0 | URL
이미 읽으셨군요! 두어 번 더 읽어야 좀 이해가 될까 아직 저에게 기형도 시는 낯설고 다가가기 힘든 감이 있더라고요.

희선 2016-01-21 0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형도는 이름부터 시인 느낌이 많이 납니다 사람들이 많이 아는 건 <질투는 나의 힘>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그런 말 생각하기도 했는데) 맨 뒤에 나오는 <엄마 걱정>은 국어 책에 실렸다고도 하던데, 중학교인지 고등학교인지... 동시 같지만 슬픔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나이도 많지 않았을 때 그런 시들을 쓰다니... 제가 기형도 시를 제대로 본 건 아니지만, 그런 어둠이 좋기도 했다고 할까 그런 때도 있었네요


희선

blanca 2016-01-21 09:15   좋아요 0 | URL
아, <엄마생각> 저도 너무 좋아서 몇 번이나 다시 읽었어요. 정제된 간결한 맛이 교과서에 딱 실릴 만한 모습이긴 해요. 저는 너무 뒤늦게 읽어서 그 치기 어린 청춘 특유의 맛에 쉽게 동화되지 못하는 아쉬움은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