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거서 크리스티는 추리 소설도 좋지만 '메리 웨스트매콧'이라는 필명으로 낸 여섯 편의 장편의 묘미도 기막히다. 대단히 심오하거나 스토리라인이 걸출한 이야기들은 아니지만 한 권 한 권마다 그녀의 삶에 대한 깊은 통찰, 예리한 직관, 언제나 무리없는 이야기 진행력이 말 그대로 참 좋다. 그런데 유독 한 대목이 참 인상적이라 여러 번 펼쳐 보게 된다.

 

 

그녀는 인간의 본성이 지닌 독특한 모순에 대해서도 얼마쯤 알게 됐다. 과거에는 젊은 사람다운 독단에 빠져 사람을 흔히 '착하다'  또는 '나쁘다'로만 평가했지만 사람을 평가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배우게 됐다. 그녀는 믿기 어려울 정도의 용기를 내어 부상자를 구했던 사람이 방금 자기가 목숨을 내걸고 구한 사람의 작은 물건을 훔치는 비열한 지경으로 전락하는 꼴도 보았다.-애거서 크리스티 <딸은 딸이다> 중

 

 

 

 

 

 

 

 

 

 

 

 

 

 

절대적으로 선하거나 절대적으로 악한 사람의 양 대척점에는 분명 아주 소수만 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그것조차도 하나의 환상이나 허상일지도 모른다. 많은 사람들이 그 다양한 스펙트럼에 흩어져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 사람이 그럴 줄 몰랐어", 혹은 "그 사람은 그럴 리가 없다",는 말이 얼마나 빈약한 표현인 지를 기억하려고 한다. 나부터도 과거의 수많은 기억 속에서 꺼내어 보기도 부끄러울 만한 모습들이 있고 지금의 나를 이루는 일부로 통합하기 어려운 발언이나 행동을 했던 적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버트런드 러셀의 자서전을 읽는데 그러한 점을 감안하더라도 참으로 혼란스럽다. 구십이 넘은 나이에도 반핵 운동 시위에 나섰던 행동하는 지성이자 <행복의 정복>의 저자가 너무 솔직하니 난감할 정도다. 그 솔직함의 잣대는 특히나 자신의 연애, 타인에 대한 평가에서 두드러지니 더욱 그러하다. 평화주의자, 반전주의자이자 여성의 참정권을 위해 적극적으로 나섰던 러셀이 아내를 두고 귀족 집안의 (이 대목이 강조되는 부분도 사실 프루스트가 귀족 가문을 동경해 마지 않았던 속물성과 큰 차이 없어 보인다) 유부녀와 벌이는 애정 행각도 시작해 불과했다. 그 여인과 소원해지며 또 다른 젊고 아름다운 여자가 그의 관심을 끄는 대목까지 와 있다. 이미 훌쩍 노년기에 있는 작가가 자신의 삶을 반추하며 그저 그것을 미화하거나 하나의 거대한 조작으로 몰고 가는 것보다야 이런 솔직함이 더 그 글을 쓰는 취지에 맞을 것이다. 그리고 아직 나는 그의 삶의 중년기까지도 이르지 못한 터다. 이미 늙어 자신의 삶을 큰 그림으로 조감하는 사람 앞에서 고작 그의 반도 못 산 내가 느끼는 이러한 당혹감은 미숙한 것일런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이 위대한 러셀에 대한 환상이 조금씩 허물어져 가는 중이다. 더해서 D.H. 로렌스와의 교유에서 그의 적나라한 실체를 고발하는 대목은 더욱 그러하다. 로렌스의 <아들과 연인>에는 그의 가난했던 유년 시절과 청년기가 눈물겹도록 아름답게 그려져 있다. 한 장면 한 장면이 다 생생하게 떠오를 정도로 그의 묘사력과 언어는 로렌스만의 독특한 마력이 있었다. 그런데 뒤에서는 이런 사람이었다니... 러셀의 이야기에 의하면 그는 헛된 망상에 사로잡힌 파시스트였다. 게다가 사상도 없이 그저 아내의 사상을 언어화하는 꼭두각시이기도 했다.

 

아, 어쩌나. 자서전이나 평전을 좋아하는데 이렇게 난감하기는 또 처음이다. 아직 반도 안 왔으니 더 주욱 나가면 이러한 그의 뜨거운 솔직함도 인간에 대한 이해나 삶을 알아가는 데에 일부분으로 잘 통합될까. 이것은 마치 내가 존경하는 은사님이나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애정을 표현하는 앞에서 의미심장한 비웃음으로 입술을 떼기 시작하는 그의 측근을 만나 껄쩍지근한 뒷얘기를 듣는 느낌과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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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집 2016-01-22 19: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예전에 프랑크 로이드 라이트 자서전 읽고 대단한 건축가구나했는데, 그가 엄청난 인종차별주의자에 유부녀와 놀아나 결혼까지 했다는 사실 알고 경악했어요.,책에는 어찌나 자수성가한 인물로 묘시했던지..하아 흑인집사가 그이 멸시와 모욕을 견디다 못해 그의 처자식을 죽일 정도로 개같은 인성의 소유자더라구요. 하....

blanca 2016-01-23 09:49   좋아요 0 | URL
아, 저도 어렴풋이 서재에서 읽었던 기억이 나요. 유명인들이나 역사적으로 위대한 업적을 남긴 사람들도 사생활에서 비도덕적이었거나 그의 세평과 맞지 않는 뒷모습이 많더라고요. 그래도 제가 기대했던 러셀상이 있어서 참, 타인이 쓴 평전도 아니고 자서전인데 실망스러운 면이 많이 보이네요. 그래도 적어도 자신을 포장하거나 미화하기보다는 되도록 있는 그대로 그리려 하는 그 정직성 만큼은 돋보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