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모든 것이 완성되면......
내가 마지막 펜놀림까지 끝내고 나면
나는 옳거나 그르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우리가 오늘 헤어진다고 해도 그는 내 삶에서 횃불 노릇을 할 거야.
- <츠바이크의 발자크 평전 중>
오노레 드 발자크의 이야기다.
그리고 그가 십칠여 년간 오매불망 자신의 아내가 되기를 꿈꾸다 거의 죽음에 이르러서야 부부가 된 한스카 부인이 자신의 여동생에게 보낸 발자크에 대한 속내의 이야기다. 하지만 이 두 이야기는 모두 어떤 의미에서 실현되지 못하거나 거짓이었다. 발자크는 빅토르 위고의 조사에서 이야기된 것처럼 모두에게 위대한 평등이자 자유인 죽음 앞에서 이 모든 것을 끝내 완성하지 못했고 그럼에도 그가 '옳았다'는 것을 그의 작품들로 증명해 내었고 그가 자신의 부와 명예를 담보로 한 지극히 세속적이고 속물적인 숭배를 바친다는 것을 항상 의식하고 있었던 한스카 부인은 끝까지 그의 사랑을 계산했으니까. 그녀의 발자크에 대한 정확한 감정은 그 어떤 누구도 장담할 수 없을 만큼 복합적이고 모순적이고 베일에 싸여 있다. 그녀는 발자크의 오랜 연인이 되고 그와 끊임없이 주고받은 편지를 보관함으로써 자신을 역사 속의 한 존재로 승격시켰지만 그럼으로써 자신의 진정성과 자신의 충절을 의심받는 불충을 저질렸다. 그녀 또한 발자크처럼 불멸을 택했다. 발자크를 사랑했던 이 책의 저자 슈테판 츠바이크는 이 여자를 미워한 것처럼 보인다.
슈테판 츠바이크의 생의 역작 <발자크 평전>은 그의 죽음으로 발자크의 저 거대한 인간 세계의 축도를 언어로 완성해 내고자 했던 꿈이 좌절된 것과 같은 길을 걸었다. 역설적으로 슈테판 츠바이크를 지배했던 발자크의 삶, 문학에 대한 사랑과 경탄은 영원히 완결될 수 없는 생명을 얻었다. 완성되지 못했기 때문에 열려 있고 그 열려 있는 통로는 여전히 끊임없이 들숨과 날숨이 오고간다. 삶과 인간 세계 전체를 그렇게 자신의 작품 안에서는 현명하게 조망할 수 있었던 이 사내는 삶에서는 항상 실패했고 그 실패는 슈테판 츠바이크 자신이 그러했던 것처럼 "배가 막 항구를 보았기 때문에 그는 파도치를 바다를 향해 키를 돌렸다."와 같다. 발자크는 귀족을 숭배했고 돈을 숭앙했고 돈을 가진 귀족 여자를 만나 자신의 삶을 전복시키고 그것을 딛고 뛰어 오르기를 바랐다. 항상 무모하게 사업을 벌였고 실패하고 또 시도하고 쓰지도 않은 소설들을 미리 팔아 챙긴 돈을 흥청망청 쓰고 빚쟁이들로부터 도망다녔다. 우스꽝스럽게도 그는 돈 많은 여자들이 자신의 삶을 구제해 줄 수 있다고 믿고 실제 끊임없이 그러한 후보자들을 물색하고 쫓아다니고 그녀들에게 시간, 돈, 열정을 낭비했다. 파리가 모두 잠자리에 들고 난 다음 수도복을 입고 미친듯이 쓰고 또 쓰고 열번 이상을 고쳐 쓰며 인간의 그 어리석은 욕망을 그 좌절하는 행함을 생생하게 그려내는 성실하고 열정적인 작가의 모습 또한 발자크의 것이었다. 발자크는 몸소 자신의 삶과 자신의 존재에서 가장 섞이기 힘든 그 모든 복합적이고 모순적인 요소들을 한데 뭉뚱그려 달고 다닌 인간이다. 서머싯 몸이 그를 진실성이 없는 자기 중심적인 인간이라 비난해도 "그는 내가 주저 없이 천재라고 부르고 싶은 유일한 작가"라고 상찬한 것이 한데 만날 수 있었던 것과 같은 맥락일 것이다. 그는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슈테판 츠바이크가 "발자크라는 현상은 모든 논리적인 결론이 빗난간다."라고 이야기했던 것은 차라리 하나의 사족이다. 그리고 어쩌면 그러한 그의 서글프고 어리석고 무모한 삶이 우리 자신들의 삶이 극단적으로 극화되었을 때와 닮아 있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은 하나의 예언 같다. 모든 인간과 모든 삶은 언제나 항상 그러한 가능성으로 가장 쉽게 흘러가기 마련이니까.
영악한 두 딸에게 아낌없이 퍼주고 죽어가는 고리오 영감도 발자크가 그려내려 했던 <인간희극>의 인간 군상의 한 축도다. 모든 것을 계산하고 모든 것을 감안하고 현명하게 살아가고 싶은 소망이야 누구에게나 있지만 삶은 그렇게 녹록하게 손 안에 들어오는 것이 아니다. <나귀 가죽>에서 골동품상 노인이 우리 인간 자신의 존재 원천을 고갈시키는 것으로 삶의 동인인 '바람'과 '행함'을 든 것도 결국 그러한 삶과 존재의 생래적인 모순, 한계를 인정한 것이다. 그러니 발자크의 눈이 멀어서도 한스카 부인의 곁에서 귀족 생활을 누리려 했던 그의 어리석음은 그 자신이 마지막으로 쓰다 만 가장 서글픈 삶의 텍스트다. 그러한 그의 마지막을 목격하고 그의 장례식에서 조사까지 낭독한 사람이 빅토르 위고였다. 빅토르 위고는 이 성취로는 위대했고 삶으로는 어리석었던 남자의 삶을 가장 고결하고 우아하게 압축하는 언어를 선물한다. 마침표다.
발자크라는 이름은, 신사 여러분, 미래에 우리 시대를 알리는 빛나는 흔적 속으로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슈테판 츠바이크가 "밀도가 전부다."라고 했던 이야기는 발자크에게서 가장 온당한 밀도를 얻는다. 그는 단 하루도 '산다는 의미'에서 낭비하지 않았다. 그 나머지가 낭비된 것은 사실 이러한 의미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