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하기 싫을 때면 스무 살의 오월에는 꼭 사랑이라는 걸 해 볼 거라며 전의를 불태웠다. 그리고 정말 거짓말처럼 스무 살 오월에 그 남자를 만났다. 그것은 첫사랑이라기보다는 하나의 팬심이었다. 나는 지금 아이들이 아이돌을 따라다니듯 짝사랑인지 아니면 서로 주고 받는 것이 사랑인 지도 인식하지 못한 채 맹렬히 그 '첫사랑'이라는 것이라고 나름대로 명명한 것에 매달렸다. 그것은 백일도 채 못 가 사그라질 잉걸불이었다. 초라하고 부끄러운 하지만 유일무이한 경험이었다. 스무 살로 돌아가면  그 남자에 퍼부었던 그 아낌없던 유치한 감정들이 도드라지며 떠오른다. 최선을 다했기에 어리석었지만 후회는 없다.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간다 해도 나미의 "슬픈 이별"의 가사처럼 "또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리려나" 싶지만 나는 어쩌면 또 똑같은 실수를 저지르고 후회하고 또 후회할 것이다. 그게 젊음이니까. 그게 또 첫사랑의 무모함이니까.

 

 

 

 

 

 

 

 

 

 

 

 

 

 

 

 

 

 

2011년 당신의 부음을 명확히 기억한다. 그 날은 눈발이 흩날렸고 첫아이를 낳았던 집에서 씩씩대며 이사나가던 날이었으니까. 아저씨들이 짐을 꾸릴 때 나는 우연히 당신의 부음을 들었다. 마음 한켠이 스산해져 와서 동생에게 문자를 보내던 기억이 난다. '인터뷰'  벌써 당신의 죽음이 오년을 훑고 지나갔고 당신과 친분이 있던 사람들이 애정을 담아 기록했던 당신과의 대화, 대담들이 다시 뒤로 보내었던 시간들을 불러 모은다. 특히나 정이현 작가가 에필로그처럼 덧붙인 말.

 

우리는 주로 맛있는 밥을 같이 먹었다. 어떤 약속은 지켜졌고 어떤 약속은 그렇지 않았다.

-<우리가 참 아끼던 사람> 중 

 

박완서 작가와 정이현 작가의 거리가 그 다른 어떤 설명도 필요 없는 관계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문장. 지켜진 약속과 그렇지 못한 것들이 지나가도 변함없는 관계의 친밀감은 많은 설명이 필요치 않을 것이다.

 

<그 남자네 집>에 대한 이야기가 계속 거론된다. 내가 읽은 것은 단편인데 그것이 후에 장편이 된 모양이다. 갑자기 그 이야기가 다시 읽고 싶어져 찾아보니 세상에, 2007년 박완서 작가의 친필 서명이 있는 <친절한 복희씨>에 몇 번이나 줄을 그으며 읽은 흔적이 있는 그 이야기가 여전히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또 돌아가고 또 가고. 문장들이 낯설지 않다.

 

 

 

 

 

 

 

 

 

 

 

 

 

 

이미 노년에 접어든 화자가 후배의 집들이에 간 김에 그 근처에 살았던 자신의 청년기와 첫사랑을 회상하는 이야기다. 6.25라는 시대사를 관통하는 이야기는 지극히 역사적이고 지극히 사적이다. 시대의 격동은 '나의 첫사랑'을 두고 흘러가지 않는다. 그녀의 선택은 안일했지만 당연했다. 아름답지만 미숙했던 첫사랑을 저버린 것은 아이를 낳고 그 아이를 흔들림 없이 양육할 굳건한 우산 같은 남자를 택해야만 한다고 믿었을 화자에게 당연한 귀결이었다. 그것이 비단 그 때만의 시대상이었을까. 모든 허룩하고 순전한 첫사랑의 귀결 앞에는 그 동화의 마지막을 싹둑 잘라 낼 엄혹한 현실이 다양한 형태로 다가온다. 이 가식 없는 이야기를 이루는 문장들은 하나 하나가 다 필사하고 싶을 만큼 인간에 삶에 밀착해 있어 뚫고 들어온다. 이야기란 모름지기 이래야만 영원히 살아 꿈틀댈 것이다. 절망하기엔 이르다.

 

졸업식 날 아무리 서럽게 우는 아이도 학교에 그냥 남아 있고 싶어 우는 건 아니다.

<중략>

 

나에게 그가 영원히 아름다운 청년인 것처럼 그에게 나도 영원히 구슬 같은 처녀일 것이다.

-<그 남자네 집> 중

 

첫사랑은 이런 것이다. 결국은 이렇게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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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01-28 12: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박완서님이 쓴 소설 중에 슬프면서도 쓸쓸한 여운을 주는 첫사랑을 소재로 한 작품이 있습니다. 제목이 `그 여자네 집`입니다. 고등학교 문학 교과서에도 나왔던 소설이에요. ^^

blanca 2016-01-28 15:55   좋아요 0 | URL
<우리가 참 아끼던 사람>에도 그 이야기가 나오더라고요. 작가가 난감해 하는 반응이어서 김영하 작가도 그렇고 교과서에 작가들 작품이 실리는 게 한편 작품을 규격화하거나 인위적인 해석에 대한 부담감으로 작용하기도 하는가 봅니다.

2016-02-05 23: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2-07 17:55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