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chinko (National Book Award Finalist) (Paperback) - 애플TV '파친코' 원작/2017 전미도서상 최종 후보작
이민진 / Grand Central Pub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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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으로 다른 나라에서 산다는 건 잘 견디다가도 한번씩 무릎이 꺾이는 경험을 견뎌야 하는 것과 같다. 역사적으로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 속에 아직 제대로 청산되지 않은 숙제들을 안고 있는 일본에서 한국인으로 산다는  건 더 복합적이고 다층적인 문제들로 더 한층 그럴 것이다. 식민지 시대부터 생계나 강제징용 같은 상황으로 한국을 떠나 일본에 거주하다 해방 후에도 그대로 남아 있게 된 '자이니치'들의 이야기는 차별과 소외의 역사다. 일단 그들의 이주는 여타 다른 나라로의 이민과는 달리 자유 의지에 의한 것이 아니라 상황이나 강제적이었던 경우가 많고 분단된 국가로 인한 국적 선택 문제로 인해 색깔론으로 변질되거나 이용된 경우도 빈번하다. 한 마디로 제대로 재일 일본인의 이야기가 공론화되거나 이야기된 경우는 최근까지도 극히 드물었다. 한국이나 일본에 거주하는 한국인이 아닌,  재미교포 작가가 <파친코>라는 소설로 4대에 걸친 자이니치의 파란만장한 가족의 서사를 다룬 것은 이례적이라 할 만하다. 


이야기는 1910년 한일합병기 부산 옆 작은 섬 영도에서  장애를 가진 청년 훈이 영진과 만나 딸 선자를 낳는 얘기로부터 선자가 유부남이었던 한수를 만나 사랑에 빠져 아들 노아를 갖게 되고 어머니 영진이 운영하던 하숙집에서 만난 이삭과 결혼해 일본으로 건너가 가정을 꾸리는 것으로 전개된다. 엄혹한 일제 식민지 시대에 일본에 피지배 민족으로 거주한다는 건 빈곤과 멸시, 차별의 일상화와 다름없었다. 이러한 한계 속에서 많은 한국인들이 그나마 가질 수 있었던 일자리는 사행산업인 파친코에서 파생된 것이 많았다. 소설의 제목 '파친코'는 이러한 재일 한국인들의 차별적 입지와 고난의 은유다. 이야기의 속도는 가파르고 인물들의 묘사는 생생하다. 개인적 삶이 원하든 원치 않았든 역사적 격랑 속에서 좌지우지되는 모습은 우리의 역사가 수많은 갑남을녀의 생존과 어떻게 어우러져 흘러와 오늘날까지 왔는지에 대한 가족적 서사시다. 


작가가 이미 그 자신이 국외자라는 점은 이야기 속 인물들의 정서를 이해하는 데에 양날의 검이다. 일단 인물들에 대한 묘사와 공감력이 설득력과 핍진성을 띠지만 한국적 정서를 백프로 이해하고 역사적 입지의 취약한 부분을 냉철하게 관조하기란 쉽지 않아 보인다. 예를 들면 재일 한국인들을 지나치게 수동적이고 소극적으로 전형화 하는 대목은 아쉬움이 느껴진다.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 힘이 끝부분에 이를수록 약해지는 감도 아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구한 역사를 끌고 가는 힘이 소수의 엘리트가 아닌 그 파고를 온몸으로 감당하며 저다마의 삶을 최선을 다해 지탱해 나가야 하는 다수의 익명의 평범한 이들의 잊허진 이야기와 만난다는 각성은 이야기의 전면에 유유히 흐르고 있고, 이것은 <파친코>의 큰 미덕이다. 더불어 많은 사람들이 자주 이야기하지 않는 불편한 진실에 대한 접근도 그렇다. 


시간의 흐름을 따라 태어나 꿈꾸고 사랑하고 헤어지고 때로 절망하고 또 다시 일어나 묵묵히 걸어나가다 마침내 죽음 속으로 잊혀져 가는 수많은 그들이 비록 국경을 벗어나 있지만 내 안의 뿌리와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은 값지고 뭉클한 것이었다. 영웅이 되거나 이름을 드날리지 않아도 저마다의 운명과 그 안에 주어진 과업을 묵묵히 수행해 나가는 그들의 삶이 그 어떤 것보다 감동을 주는 것도 그런 연유에서일 것이다. 마지막 선자가 돌아온 곳에서 선자가 소녀 시절 만나 사랑을 나누었던 한수와의 추억을 회상하는 장면은 애잔하다. 결국 위험한 사랑에 빠졌던 소녀가 일본으로 건너와 그 사랑의 결실을 낳고 키우고 살아나가는 인생의 여정은 피할래야 도저히 피할 수 없었던 자신을 배반했던 사랑과 닮은 역사의 흐름 안에서 흘러간 것이다. 다시 첫문장으로 돌아오는 이야기다. "History has failed us, but no mat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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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18-08-20 08: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 blanca님 서재에서 처음 듣는 책이고 처음 듣는 작가인데요. 책소개에서 작가소개 읽어보니까 이력 자체가 무척 특이하네요.
이 책도 참 관심이 가기는 하지만, 저는 blanca님 리뷰가 더 좋네요.
이 책을 읽게되더라도 그 생각은 변함 없을 것 같아요.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blanca 2018-08-21 02:13   좋아요 0 | URL
저도 처음 접한 작가예요. 완성도면에 있어 아쉬운 부분도 있지만 이야기를 끌어나가는 힘이 있는 작가라 일단 책장이 잘 넘어가더라고요. 이 책을 읽으며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에 대해서도 생각할 기회를 가질 수 있었어요. 댓글 감사합니다. ^^**

감은빛 2018-08-22 00: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에 대해선 얼핏 듣고 번역본을 보관함에도 넣어두긴 했는데,
왠지 구매가 망설여지는 느낌이 있었어요.
어쩌면 한국계 작가가 영어로 쓴 텍스트를 다시 번역한 책을 읽는다는 건,
왠지 뭔가 빠진 것 같고, 어딘가 어색할 것 같은 느낌.
근데 또 원서로는 읽을 실력과 여유가 없어서 시도하기가 어려울 것 같아요.

블랑카님의 감상과 평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blanca 2018-08-22 04:28   좋아요 0 | URL
리뷰 읽어주셔서 감사한 걸요. 아, 보관함에 넣어두셨었군요. 책장이 굉장히 잘 넘어가는 책이에요. 재미있어요. 저도 분량 때문에 부담스러웠는데 금세 다 읽게 될 정도로 이야기의 힘이 있더라고요. 이 책 그 자체도 그렇지만 무언가 어떤 계기가 없으면 놓치기 쉬운 것들을 다시 돌아볼 수 있게 되어 좋았어요.

hnine 2018-09-12 07: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영어로 표기되긴 했지만 이 책 제목을 보고 일본의 그 도박게임 빠찡꼬인가보다 담박에 알아차렸답니다 ^^
이 작가의 이전 소설 <백만장자를 위한 음식>을 읽었던 기억이 있어요.

blanca 2018-09-13 03:11   좋아요 0 | URL
(백만장자를 위한 음식)은 어떻게 읽으셨는지 궁금하네요. 안 그래도 읽어볼까 하던 참이었거든요.
 
수리부엉이는 황혼에 날아오른다
무라카미 하루키.가와카미 미에코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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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도스토옙스키보다 오래 살면서 소설을 쓸 줄은 생각도 못 했죠. 그 사람, 사진 보면 완전히 할아버지잖아요. 그보다 더 나이를 먹어버렸다니 놀랍습니다.

-도스토옙스키보다 나이가 많다니 충격이긴 하네요.


<수리부엉이는 황혼에 날아오른다 p.245>


인터뷰는 자신을 규정하거나 포장하거나 단순화하거나 이상화하기 쉽다. 언어로 설명하기 모호한 부분에 욕심을 내기 시작하면 때로 과장이나 거짓이나 속단이 되어 버린다. 인터뷰로 한 사람을 설명하기란 그래서 어렵다. 애초부터 작은 기대와 많은 한계를 감안하며 시작하는 게 좋다.


하지만 이런 대화라면 그냥 무장해제되어 버린다. 인터뷰의 대상은 하루키. 인터뷰를 하는 작가는 가와카미 미에코. 아버지와 딸의 나이차다. 가와카미 미에코는 가수로 데뷔했다 소설가가 된 특이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그녀는 하루키의 팬이다. 하루키의 작품들을 공들여 제대로 읽은 느낌이다. 그럼에도 하루키를 지나치게 이상화하거나 어려워하지 않는 그 느낌이 좋다. 하루키의 우물에 가닿는 그녀의 신공이 놀랍다. 여기에서 하루키는 진지하고 머뭇거리고 솔직하다. 이제 곧 일흔이 될 그는 자주 불러오는 삽십대 중반의 주인공의 감성과 직관과 개방성을 아직도 지니고 있어 놀라웠다. 흔히 말하는 꼰대 마인드가 없다. 


글을 쓰는 일의 그 성실함에 대한 언급은 하루키 작품 속 남자들과 언뜻 어울리지 않는 듯 어우러진다. 꾸준히 성실히 쓴다. 술을 진탕 마시고 영감에 의존하여 일필휘지로 완성해 내는 작품과 하루키는 멀다. 언제나 성실히 열 장 가량 매일 쓴다. 열 번 이상 고친다. 고치고 또 고치며 문장을, 문체의 정밀도를 높여 나간다. 결국 궁극의 문장을 향한 그의 거리는 죽는 그 순간까지 좁혀질 것이다. 


시스템이 양산해 내는 악에 대한 일침이 와닿는다. 악을 전면적으로 부정하지도 악을 근원적으로 완벽하게 몰아내기도 힘들다,는 인식은 인간의 내면에 꿈틀대고 있는 악을 탐사하고 그 악을 형상화하는 그의 글쓰기의 우물이다. 그 이후에 대하여 할 수 있는 얘기의 자리가 아쉽다. 그는 이야기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고 세상을 향해 발언한다. 그 이상에 대한 요구는 단호하게 거절한다. 그의 이름을 딴 문학상에 극도의 거부감을 나타내는 모습도 일맥상통하는 얘기다.


하루키 이야기 속의 남자 인물들이 여성들을 대하는 태도나 구도에 대한 설명하기 힘든 불편함에 대한 언급은 사실 항상 느꼈던 바라 궁금했다. 하루키의 대답은 싱겁고 사과는 빠르다. 자기는 모르겠는데 그랬다면 미안하다,고. 의식하거나 의도한 바는 아니라는 변명이다. 그의 해명에 전적으로 동의하기는 어렵지만 여하튼 이런 질문을 피하지 않고 해 준 가와카미 미에코와 그런 질문을 피하지 않고 받아 준 자유로운 분위기가 이 인터뷰 내내 흐른다. 인터뷰의 내용은 그래서 쉽게 우회하거나 얄팍해지지 않는다. 


전반적으로 쓰는 일에 대한 작업 비밀을 어떻게든 솔직히 알기쉽게 설명하려는 그의 의도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지점에서 가 서 멈추지만 결국 어떤 일이든 최선을 다하며 사는 것에 대한 이야기로 수렴하는 것 같다. 사는 법을 가르칠 수 없는 것처럼 글 쓰는 법도 가르칠 수 없다는 이야기가가 요체가 될 것 같다. 가르칠 수 없지만 겸손하게 최선을 다해 후배 작가에게 그것을 이야기해 주려는 그의 사려깊음이 과정이 아니라 어쩌면 결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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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꺼운 책을 별로 안 좋아하는 편이라 처음 이 책은 사실 분량만 보고 지레 피했다. 우연히 학교에서 만난 대만인 엄마가 나보고 한국인이냐며 이 책을 읽어보았냐고 하며 다가워서 제목만 안다고 하니 갑자기 일본과 우리나라의 역사적 상황에 대하여 진지하게 질문을 시작해서 당황스러웠다. 근현대사에 대하여 좀더 찬찬히 공부를 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평소에 생각을 정리해 둬야 제대로 적절하게 의견을 얘기할 수 있을 텐데 그러지 못해 아쉬웠다. 대만은 중국과 얽힌 민감한 지정학적 사안이 있으니 어쩌면 더 우리나라의 상황에 관심을 가지고 공감할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결국 그 일로 <파친코>를 드디어 읽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이야기의 흐름상 집중해서 한번에 쭈욱 읽어내려가면 좋으련만 그러지는 못하고 매일 조금씩 가슴 아파하며 읽고 있다. 일제 시대의 격랑에 휩쓸리는 개인의 삶. 자신의 신념과 이상을 던적스러운 현실과 전적으로 타협하지 않으면서 그럼에도 현실적으로 삶을 이어나가는 게 얼마나 어렵고 괴로운 것인지가 잘 형상화되어 있다. 별 것 아닌 일로 일본에서 감옥에 끌려가 고초를 겪다 결국 온 몸이 상처로 뒤덮여 죽기 직전에야 집으로 기다시피 돌아와 가슴으로 품은 어린 아들을 만나는 이삭의 모습에 가슴이 너무 아프고 힘들어 잠시 책을 덮었다. 나는 지금 여기 있지만 저기 거기에 있었을 수 있다. 어떤 상황이 윤리적 가치와 내 생을 교환가치로 저울질하며 고통스러운 선택을 강요한다면 나는 어떻게 그 상황을 이겨나갈 수 있을까? 두렵고 아득하다. 한편 그럼에도 결코 타협하지 않은 가치로 지켜낸 나라에서 나는 오늘 밥을 먹고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것이라 생각하니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수많은 그 분들의 용기와 희생에  숙연한 마음이 들었다. 엄혹한 시대를 통과해서 만든 역사의 그 엄중한 무게는 상기하지 않으면 자꾸만 잊혀지고 가벼워져 버린다.



 
















그런데 또 하필 하루키의 책을 동시에 읽고 있다. 그가 어떤 정치적 노선 표방이나 언사에 신중한 모습이 의미심장하다. 자기 자신을 지나치게 과대평가하는 것에 염증 반응을 보이는 것도. 특히 소설을 쓰는 과정에서의 성실함과 조언은 별 것 아닌 것처럼 던지는 그의 무심하고 간결한 문장과는 다르게 심오하고 여운이 길다. 더 천천히 곱씹으며 읽어야 겠다. 기본적으로 너무 많은 의미나 과도한 그럴듯함에서 멀어지려는 그의 태도가 오히려 더 신뢰가 간다고나 할까. 그는 과거에 일본의 주변국가에 대한 가해에 관련한 역사 청산에 대한 무책임함을 비판하고 성토한 적이 있다. 일본의 베스트셀러 작가로는 용기 있는 발언이라고 한다. 안 그래도 자기를 많은 사람이 싫어한다고 생각한다,는 발언이 초지일관이라 살짝 귀엽기까지... 소설적 자아와 사적 자아의 낙차가 큰 사람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일인칭은 점점 안 쓰게 된다는 이야기도 인상적이다. 소설 속 삼십 대의 '나'와 육십 대의 그의 괴리를 담백하게 인정해 버린다.















뜨겁다. 그런데 이 뜨거움이 가는 것도 애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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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18-08-06 13:4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하루키의 인터뷰집은 앞부분을 조금 읽었어요. 제가 읽었던 부분까지는 내용이 좀 두루뭉슬했는데, 그래도 끝까지 읽고 싶다,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하루키의 책이 나오면 무조건 읽고 싶기는 한데, 최신 유행으로서 하루키를 좋아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도,
궁금하고 읽고 싶은 마음을 참을 수가 없어 또 찾아 읽게 됩니다. 그게 하루키의 힘일까요?

덥네요, blanca님~~ ㅠㅠ

blanca 2018-08-07 03:52   좋아요 1 | URL
단발머리님, 저는 하루키 픽션보다 <언더그라운드> 같은 논픽션이 더 와닿아요. 세상과 사람을 보는 시선, 그리고 그것에 대한 반응, 신중한 판단의 유보 같은 게 저는 좋더라고요. 나이들면 뭐랄까 좀 단정짓고 자기만 맞다,고 하고 싶어지는 경향성이 있잖아요. 제가 하루키 작품을 다 읽은 게 아니라 종합적인 판단은 못 내리겠고 소설은 아직 뭐랄까 조금 저랑 안 맞는 불편한 부분이 있어요. 그럼에도 저는 하루키를 좋아합니다. 하루키 나이가 저희 친정 아버지랑 같은데 병원에 한번도 입원한 적도 없고 감기도 4~5년에 한번 걸릴까 말까 한다,는 대목에서 깜짝 놀랐어요. 더우니 지치고 오후만 되면 체력이 완전히 떨어지는데 글 쓰는 능력보다 그 체력이 더 부러울 지경입니다.

레삭매냐 2018-08-06 16: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파친코>는 무어라고 정의할 수 없는
이물감 때문에 읽으면서 불편했던 것
같습니다.

이방인의 눈으로 본 우리 역사에 대한
시선 때문이라고나 할까요.

blanca 2018-08-07 03:55   좋아요 0 | URL
아, 레삭매냐님, 저는 지금 한 반 정도 읽은 상태이고 아무래도 작가가 한국에서 쭉 자란 사람이 아니니 한국적 정서에 대한 어떤 이해나 시야의 한계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이 지점은 제가 아무래도 다 읽어봐야 할 수 있는 이야기가 될 것 같아요.
 

대학교 1학년 때 <데미안>을 읽고 독후감을 써야 했다. 교양국어 시간이었나? 같은 학번 친구가 자신이 먼저 읽고 나에게 <데미안>을 빌려주었다. 세상에, 무려 수십년 전에 나온 세로쓰기 책이었다.  갈색의 등은 갈라지고 있었고 활자는 때로 겹치거나 흐릿해서 가독성만 놓고 보자면 참으로 곤란한 책이었다. 나는 그때 활자로 된 건 뭐든지 다 거부하던 시기였고 그래서 이 <데미안>을 읽는 것이 몹시도 고통스러워 집워치워 버리고 싶어졌다. 특히 세로쓰기는 끊임없이 길을 잃게 했다. 한 손으로는 자를 잡고 줄을 안 놓치려 분투하다 나는 <데미안>을 던져버렸다. 간 크게 아마 과제조차 내지 않았던 것 같다. 


그때 제대로 정말 진심을 다해 <데미안>을 읽었다면 내 인생은 사뭇 달라져 있었을 것이다. 나는 거의 일 년 내내 책이라곤 단 한 권도 제대로 읽지 않으며 방황했고 그 여파를 수습하는 데 꽤 많은 시간과 공력을 후에 들여야 했다. 지금도 나는 이따금씩 그 때를 생각한다. 내가 고작 읽은 건 머리말인지 혹은 해설이었는지 모르지만 어떤 소녀가 죽어가며 자신의 관에 <데미안>을 넣어달라 했던 일화였다. 


모든 인간의 삶은 저마다 자기 자신에게로 이르는 길이고, 그 길을 가려는 시도이며, 하나의 좁은 길에 대한 암시이다. 일찍이 그 누구도 완벽하게 자기 자신이 되지 못했다. 

-데미안, 헤르만 헤세, 김인순 옮김, 열린책들,2014; 정여울의 <대면: 내 안의 '내면아이'와 만나는 시간, Axt 재인용>


Axt에서 다시 만난 정여울의 글에서 <데미안>을 다시 만났다. "일찍이 그 누구도 완벽하게 자기 자신이 되지 못했다."는 이 문장을 과연 스무 살이 이해할 수 있었을까? 이제서야 나는 이 문장을 믿을 수 있다. 결국 제대로 정말 자기 자신이 되어 가는 과정이 나이듦의 과정이라는 걸 이제서야 배운다. 저만치 별처럼 떠 있는 선구자들, 위인들, 유명 인사들이 지향점이 아니라 결국 내가 가장 나다워지는 과정을 사회의 용인되는 틀 안에서 전개해 나가는 게 사는 과정인 것 같다. 















그러고 보면 책도 인연이 닿아야 한다. 그 친구와 소원해지며 <데미안>도 돌려주지 못했다. 그 친구는 또 다른 누군가에게서 그 책을 빌렸다는 것도 같았는데 그렇게 몇 순배를 돌던 데미안은 이제 찾을 길이 없다. 


나는 아직도 내 자신을 제대로 찾지 못했지만 찾아가는 과정이라 믿고 싶다. 어쩌면 끝나지 않을지도 미완으로 끝날지 모르는 이 지난한 과정에서 이제 제대로 가로쓰기가 된 잘 읽히는 잘 읽을 수 있는 <데미안>을 다시 시작해야 할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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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re is no reason for life  and life has no meaning. We are here, inhabitants for a little while of a small planet, revolving round a minor star which in its turn is a member of one of unnumbered galaxies.

-The Summing Up by W. Somerset Maughm


인생에는 어떤 이유도 의미도 없다. 우리는 여기 셀 수 없이 많은 은하계 중 작디작은 별 주위를 도는 자그만 행성의 단기 거주자로 여기에 있다.- 서머싯 몸의 <서밍업> 중



















요며칠 그 분의 죽음을 생각한다. 어쩌면 가장 기득권 층이 될 수 있었던 위치에서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와 이상을 향해 많은 것들을 포기하고 양보했던 그 분의 선의와 노력이 비로소 죽음 후에야 각광을 받는 아이러니 속에서 그 분의 "나는 여기서 멈추지만" 남는 자들에게 계속 전진하기를 당부하는 마지막 이야기의 무게를 떠올린다. 여기에서 서머싯 몸이 이야기했던 우리의 삶의 무의미함을 그 가벼움을 또 가져온다. 인생무상은 그 죽음의 순간에도 자신이 추구했던 세계와 이상을 떠올렸던 당신의 결곡한 의지 앞에서 날아간다.  말과 글은 남는다. 생과 삶은 끝나지만 그것의 궤적이 품고 있었던 것들은 그럼에도 쟁쟁거린다. 서머싯 몸도 자신의 생과 자신의 글이 후세에 남아 이렇게 읽힐 것이라 예감하지 못했다.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에서 칠십 대 노건축가의 국립도서관 계획은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실현되지 못한다. 그 한 여름, 건축 사무소 직원 전체가 꿈꾸었던 미래는 정교한 모형 하나로 축소되어 남는다. 이십구 년이 흐른 뒤, 그 '여름 별장'에 장년이 되어 다시 돌아 온 '그 청년'은 좌절된 꿈을 조용히 응시한다. 당시는 한없이 안타깝게 애석하게 흩어졌던 구상이 하나 하나 돌아오는 환상 속에서 그는 가만히 수긍하게 된다. 현실화되지 못한 것들이 가지는 그 무언의 가치에 대하여. 무수히 상상하고 계획하고 추구하고 꿈꾸었던 그것들 자체의 질긴 생명력에 대해서. 온갖 무형의 것들을 제대로 애도하는 이야기가 오늘은 위로가 된다고 믿고 싶다. 당신의 죽음이 당신이 추구했던 가치와 이상의 끝이 아니라고... 당신의 삶 전체를 어떻게 이 하나의 비극적 마침표에 압축하여 넣어버릴 수 있을까. 노. 회. 찬. 의원님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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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실 2018-08-04 04: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분의 가치가 죽음 후에야 비로소 세상에 드러나는 느낌에 동강감합니다.
노대통령의 죽음이 연결되는 안타까움.
내가 의도하지 않은 내 삶은 참 견디기 힘들겠지요....


blanca 2018-08-04 07:27   좋아요 0 | URL
제가 좋아했던 분이라 더 그래요. 그 분이 그런 선택을 한 마음을 상상하고 이해해 보려 하지만 역시나 이제는 다시 볼 수 없다는 생각에 마지막 선택이 원망스러워집니다. 산 자의 책무도 돌아보게 되고요. 산다는 건 때로 참 너무 어려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