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1. 언제, 어디서 책 읽는 걸 좋아하십니까?

 

언제나 어디서나 좋아합니다. 예전엔 주로 화장실에서, 베란다에서. 요즘에는 솔직히 그런 공간들에서 스마트폰을 자꾸 만지작거리게 되어서 좀 줄긴 했지만 그래도 책은 언제나 어디에서나 옆에 있어야 안심이 됩니다.


Q2. 독서 습관이 궁금합니다. 종이책을 읽으시나요? 전자책을 읽으시나요? 읽으면서 메모를 하거나 책을 접거나 하시나요?

 

당연히 종이책이지요. 잠깐 이북을 다운 받아 보기도 했는데 저는 영 적응이 안 되더라고요. 눈도 좀 피로하고. 손으로 만지지 않는 이야기에는 무언가가 결여된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음, 예전에는 책에 볼펜으로 밑줄을 긋기도 하고 접기도 하고 했는데 나중에 그렇게 이미 되어 버린 내 책을 보는 게 낯설고 별로 좋지 않더라고요. 심지어 왜 여기에 줄을 그었나, 싶은 대목들. 되도록 새 책 그 상태로 보고 간지를 붙이고 나중에는 따로 노트에 그 부분을 옮겨 적어 둡니다. 그렇다고 그 노트를 다시 보지도 않으면서도 되새김질하듯 그런 필사의 과정을 하게 됩니다.

Q3. 지금 침대 머리 맡에는 어떤 책이 놓여 있나요?

 

솔직히 자기 전에는 책을 잘 읽지 않아요. 일단 아이들을 재워야 하기 때문에 불을 꺼버리기 때문이고 이상하게 자기 직전에는 읽는 것보다 사람 목소리를 듣는 게 좋아서 라디오를 듣거나 팟캐스트를 들어요. 책 낭독 팟캐스트를 들으며 잠들기도 했는데 그런 습관이 또 어느 새 없어졌네요. 너무 재미있어서 잠이 확 깬 경험이 있어서요. 김영하가 덤덤한 목소리로 읽은 체홉의 단편이 그랬어요. 좀 으스스해지기도 하고.

Q4. 개인 서재의 책들은 어떤 방식으로 배열해두시나요? 모든 책을 다 갖고 계시는 편인가요, 간소하게 줄이려고 애쓰는 편인가요?

 

솔직히 나의 개인 서재가 아니기 때문에 되도록 간소하게 줄이려고 합니다. 두 번 읽지 않을 책은 끊임없이 처분하려 합니다. 그럼에도 언젠가는 작가별로 책을 눕히지 않고도 잘 정리한 볕이 잘 드는 나만의 서재를 가지고 한 권, 한 권 다시 읽어가며 늙고 싶은 꿈이 있습니다.

Q5. 어렸을 때 가장 좋아했던 책은 무엇입니까?

 

<소공자>, <소공녀>, <쿠오레> 속의 사랑스러운 소년, 소녀들을 닮고 싶어서 몇 번이고 읽고 말투(번역체)를 따라해 보기도 했고 뭐 그런 기억이.. 그렇다고 해서 어른들이 나를 더 예뻐해 준 것도 아닌데...아무도 나를 주목해 주지 않아서 그런 예쁘고 사랑스러운 무언가 관심의 중심에 있는 아이들이 나오는 이야기를 반복해서 읽었던 것도 같아요.

 



 

 

 

 

 

 

 

 

 

 

 

 

Q6. 당신 책장에 있는 책들 가운데 우리가 보면 놀랄 만한 책은 무엇일까요?

 

좀 뜬금없는 책들도 ㅋㅋ <금융법률실무> 같은 거, 지난 주에도 버릴까 하다 한때의 경험을 기억해 두어야 한다는 생각에 남기기로...

Q7. 고인이 되거나 살아 있는 작가들 중 누구라도 만날 수 있다면 누구를 만나고 싶습니까? 만나면 무엇을 알고 싶습니까?

 

정말 진심으로  이제는 고인이 된 올리버 색스를 만나고 싶어요. 그가 죽기 전에 어떻게든 먼 발치에서라도 만나고 싶었는데... 자신의 일과 글쓰기를 충실히 양립시키면서 사려 깊고 섬세하게 삶을 살고 또 그렇게 죽어간 그의 모습이 부럽기도 하고 존경스러워요. 다양한 관심사가 예술과 사람에 닿아 있어 그런 부분이 참 경이롭기도 하고. 제대로 성실하게 잘 살다 간 부분을 닮고 싶어요.

 



 

 

 

 

 

 

 

 

 

 

 

 

 

Q8. 늘 읽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아직 읽지 못한 책이 있습니까?

 

대체로 읽은 편입니다.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민음사 판으로 나오는 순서대로 읽어가고 있는데 다 읽을 수 읽을지는 잘 모르겠어요.

 



 

 

 

 

 

 

 

 

 

Q9. 최근에 끝내지 못하고 내려놓은 책이 있다면요?

 

지금 토마스 만의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을 읽고 있는데 다 읽을 수 있을지 확신이 안 서네요. 아주 잘 넘어가는 책은 아니라서요.

 



 

 

 

 

 

 

 

 

 

 

 

 

 

 

Q10. 무인도에 세 권의 책만 가져갈 수 있다면 무엇을 가져가시겠습니까? 

 

서머싯 몸의 <면도날>. 이 책은 정말이지 읽고 또 읽어도 읽을 때마다 매번 놀라요. 소설 이상의 이상. 잘 읽히기도 하지만 소설에 나오는 인간 모두가 그 상황에서 정확한 설득력을 얻는 것 같아요. 어느 누구 하나 이해하지 못할 캐릭터가 없어요. 마치 인생 자체인 소설 같은 느낌이 들어요. 그리고 박완서 작가의 그 어떤 책이라도 좋아요. 한국어의 찰진 맛이 그리울 때 박완서의 글은 그런 허기를 채워 줍니다. 마지막 한 권은 아직 내가 읽지 않은 만나지 못한 그 어떤 책이 될 듯합니다. 가장 좋은 책은 항상 또 생겨나곤 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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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조기후 2016-04-23 0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체로 읽은 편입니다... 존경합니다 블랑카님 ㅜㅜ

blanca 2016-04-23 19:30   좋아요 0 | URL
에이, 그건 제가 읽고 싶은 책에 한에서잖아요^^;;

단발머리 2016-04-23 09: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제일 중요한 질문이 10번 같아요.
10번에서 제일 확실히 알 수 있죠. 진짜 좋아하는 책이 무엇이냐...
서머싯 몸의 <면도날>이 다시 보이네요. 블랑카님의 추천에^^

blanca 2016-04-23 19:31   좋아요 1 | URL
아, 정말 정말 너무 좋아요, 면도날!! 영화로 만들어도 좋을 것 같은데 좀 내면적인 묘사가 힘들까요?

페크pek0501 2016-04-24 00: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님도 서머싯 몸을 좋아하시는군요. 같은 팬으로서 반갑습니다.

이 페이퍼, 비교해 읽는 재미가 있어요. 잘 읽고 갑니다.

blanca 2016-04-24 10:23   좋아요 0 | URL
페크님 서머싯 몸 페이퍼 열심히 읽었었던 기억이 납니다. <과자와 맥주> 참 읽고 싶은데 이게 번역본은 너무 오래 된 거더라고요. 차근 차근 전부를 찾아 읽어 보고 싶어요.

다락방 2016-04-29 08: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면도날은 사두기만 하고 아직도 읽지 않은 수많은 책들중 하나인데 블랑카님은 무인도에 가져갈 책이란 말입니까! 어서 읽어봐야겠어요. 서머싯 몸이 남성우월주의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다고 저는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는데, 면도날을 읽어보면 제 기억이 맞는지 알 수 있겠지요.
그나저나 책에 대한 질문에 답을 한 이 페이퍼들을 읽으면 자꾸 새로운 책이 사고 싶어져서 큰일이에요 ㅠㅠ 물론 면도날은 가지고 있지만 말입니다.

blanca 2016-04-29 14:42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 <면도날>을 제가 좋아하는 건, 그 작가들이 어떤 인물을 창조할 때 한 명 정도는 굉장히 멋지게 형상화할 수 있지만 나머지는 소설적이기가 쉽잖아요, 그런데 이 책에 나오는 모든 인물이 우리 주변에 살아 있는 사람들을 닮은 면이 다 제각각 있어요. 보고 또 봐도 그 소설 속의 인물은 살아 있어요. 이게 굉장히 신기한 경험이더라고요. 아, 책 욕심은 정말이지 아, 저도 미치겠습니다. ㅋㅋ
 
멀고도 가까운 - 읽기, 쓰기, 고독, 연대에 관하여
리베카 솔닛 지음, 김현우 옮김 / 반비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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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이야기는 무엇인가?"

 

첫 문장이다. 한때는 내 삶에 굴곡이 많다,고 생각했지만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내 삶이 그다지 유별나게 굴곡진 것이 아니라는 느낌을 받았다. 누구나 다 그렇더라. 크고 작은 파문 가운데에 놓여 있다. 많은 서사를 품고 있는 삶은 이제 읽고 듣는 것으로 족하다는 조금은 안일한 생각도 가지고 있다. 변화가 삶의 본질인데 나는 그 변화에 적응이 느리고 겁이 많다.

 

유한함, 덧없음, 불확실성, 고통, 변화의 가능성 같은 것이 찾아와 삶을 그 전과 후로 나누어 버리는 떄가 있다.

-p.223

 

저자 리베카 솔닛은 알츠하이머에 걸려 딸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어머니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모녀 관계는 어머니가 딸에 가지는 묘한 경쟁심으로 인해 따뜻하거나 교감을 나눈 기억이 없다. 그녀는 어머니를 이해하려고 이야기를 시작한 것일까? 그러나 이 이야기는 그러한 범위로 한정되지 않는다. 생로병사, 사회적 가치, 연대, 공감, 사랑으로 확장해 나간다. 겁이 많은 나에게 '정말 좋은 이유가 없다면 절대로 모험을 거절하지 말자.'는 그녀의 결심과 가족과 지인들의 투병, 죽음 앞에서 자꾸만 닥치지도 않은 온갖 상황들에 매몰되는 나에게 삶에 닥치는 그러한 고통들이 가지는 의미에 대한 그녀의 통찰은 너무 시의적절했다. 마치 리베카 솔닛은 나를 지금의 나의 상황을 알고 있는 것처럼 자신의 이야기를 통해 격려하고 세심하게 조언한다.

 

에세이의 한계는 자기 경험의 범위다. 그것을 넘어서기가 어려워지면 신변잡기로 오그라든다. 리베카 솔닛의 이야기에는 분명 이 경계를 지워버리고 확장하기 위한 지난한 노력이 돋보인다.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 체 게바라의 혁명 전후의 삶, 프시케의 신화, 안데르센의 <눈의 여왕> 등의 이야기와 그녀의 목소리는 한데 어우러져 우리 모두가 삶에서 만나는 암초와 그 암초를 넘어서 꿈꾸는 것들과 시간 앞에서 소멸로 가는 길들에 대해 섬세하고 예리한 시선을 벼린다. 강요도 단정도 과장도 미화도 생략도 없다. 어머니와의 관계, 수술, 친구의 죽음 같은 그녀 삶의 이야기는 도드라지지 않으며 묘하게 어우러져 그녀를 설명한다. 그리고 읽는 이들도 그 이야기로 연결되는 패턴을 따라 함께 섞이고 확장되고 성장하기를 바란다.

 

이야기를 읽고 뛰던 가슴이 좀 가라앉았다. 다들 그렇듯이 삶의 풍경은 다르지만 생로병사와 시간의 경과에 따른 변화, 소멸의 노정에서 만날 수밖에 없다. 그 사실이 위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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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16-04-12 14: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제나 그렇지만 오늘 글도 참 좋네요...
저는 레베카를 저만의 `올해의 작가`로 선정했어요. 다시 한 번 읽고 싶어 원서도 구입했구요.
그녀의 이야기는 동화 속 이야기처럼 아름다우면서도 슬픔을 담고 있죠. 그래서 위로가 되요^^

blanca 2016-04-13 13:38   좋아요 0 | URL
제가 지금까지 읽은 여느 에세이와 참 다르더라고요. 그 깊이와 넓이가 참 경이롭기도 하고...원서는 어떤 다른 감상이 느껴질 지 기대가 되네요.

짜라투스트라 2016-04-12 14: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진 책이죠. 그리고 이 글도 너무 좋네요. ^^

blanca 2016-04-13 13:38   좋아요 0 | URL
아, 벌써 다들 읽으셨군요!

무해한모리군 2016-04-12 14: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고싶어지는 리뷰네요.

blanca 2016-04-13 13:39   좋아요 0 | URL
그저좋은모리군님도 좋아하실 거예요. 가볍지 않은데 지나치게 무겁지도 않고, 한 편의 긴 서사시처럼 아름답기도 하고요.

안한샘 2016-04-12 16: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일리지 어떻게 받나요
 

한때 취미 발레를 잠깐 배운 적이 있다. 거의 나와 비슷한 또래의 발레를 전공한 사람들이 가지는 그 특유의 우아한 아름다운 모습으로 취미 발레 교습임에도 열정을 가지고 가르쳤던 그녀들이 기억에 남는다. 목이 길고 선이 가녀리고 움직임 하나 하나에서 특별한 매력이 뿜어져 나왔다. 지친 나는 어울리지 않게 발레를 배우는 여자가 되어 피로와 스트레스로 뭉친 근육은 덤으로 풀고 전혀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들의 세계의 그 매혹적인 경계에 잠깐이나마 발을 딛게 되었었다. 석달 천하로 끝나버린 그 기억이 떠올랐다.

 

 

 

 

 

 

 

 

 

 

 

 

 

 

 

이동진의 <빨간책방>을 통해 이 책을 읽게 되었다. 주인공이 발레리나는 아니고 학창 시절 발레를 배운 경험으로 무용원에서 성인과 유치원생을 대상으로 하는 발레 교습을 잠깐 맡게 되면서 떠오른 유년과 청소년기 시절의 고통스러웠던 기억을 이야기하는 내용이다. 특히나 주인공 예정이 무용원에 단체로 온 유치원생들이 발레복을 갈아입고 용변을 보는 일 등을 도와주며 그 아이들과 비슷했던 나이에 낯선 남자로부터 당했던 성추행의 아픈 기억을 이야기하는 장면은 읽기가 힘겨웠다. 아이들은 지극히 무력하다. 쉽게 자기보다 힘도 세고 상황을 악용하기 쉬운 성인들로부터 학대나 성추행을 당할 상황에 놓인다. 문제는 그러한 비극적 상황이 발생했을 때조차도 주변의 어른들의 조력은 지극히 한정적인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특히나 그것이 가족이나 지인들로부터 일어난 경우의 일일 때 그것을 은폐하고 축소하고 부정하려는 움직임에 아이들은 재차 지울 수 없는 트라우마를 남기는 상처를 받게 된다. 많은 평범한 겉으로는 지극히 상식적인 어른들이 정작 그러한 사건이 일어나면 그것을 외면하고 싶어했다. 비겁해진다. 그러면 아이는 그러한 기억을 가진 자기 자신조차 부정하고 믿지 못하게 된다.

 

진실은 대부분 편하지도 편리하지도 조용하지도 않다. 뼈아프고 시끄럽고 불편한 경우가 많다. 어떤 관성으로 밀고 나가고 싶어질 때 마치 과속방지턱처럼 '타닥' 걸리는 소리에 주춤하게 되기도 한다. 그냥 전속력으로 달리고 싶어지기도 한다. 그런 사람들 속에서 자란 예정은 치유받는 감동적인 대목을 보여주지 않는다. 발레 교습을 받았지만 연결된 발레 동작을 구사하지 못하는 예정이 그랑주떼를 하는 것으로 마무리가 되는 이야기는 해피엔딩이 아니다. 여전히 많은 것들이 그녀 안에는 부정되고 억압되고 은폐된 채로 있다.

 

미완인 것처럼 느껴지는 결말이지만 진지한 질문을 어렵지 않게 하는 이야기가 혹시 나도 그러한 방관자적 어른이 되어 가고 있지 않은지 되돌아 보게 했다. 상처 받은 아이는 상처 주는 어른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한 아이를 구해 주는 지켜 주는 어른이 되는 것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성장일 것이다. 그 성장의 길목에서 방황하는 예정의 이야기의 여운이 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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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인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박완서의 자전 소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를 읽고 그 후속편이라 할 수 있는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는 읽다 말다 결국 못 읽고 말았다. 우연히 다시 그 책을 읽게 되었다. 어릴 때는 지루하게만 느껴졌던 전쟁의 참상 아래 가족들의 생존기가 이제 한 문장, 한 문장 다 절절하게 와닿았다. 차마 읽는 즐거움을 논하기도 미안할 만한 그 버석거리는 이념 밑에 놓인 사는 문제들의 묘사가 형형하다. 우리 말을 어루만지는 작가의 노련한 손맛이 한 문장, 한 문장 읽어버리기가 아까울 정도였다. 그러고 보면 어떤 이야기를 듣고 그것을 이해하는 데에도 맞춤한 시간의 골이 있는 듯하다. 너무 이르면 안 만나느니 못하다.

 

 

 

 

 

 

 

 

 

 

 

 

 

 

 

 

거꾸로 다시 작가의 유년 시절을 그린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를 읽는 중이다. 나는 죽었다가 깨어나도 다시는 경험할 수 없을 자연과 어우러진 찬란한 작가의 유년시절이 샘이 날 정도로 부럽다. 이게 과연 어떤 느낌인지 나는 영 알 길이 없다.

 

 

어른들은 한창 바쁠 때였다. 그래서 더욱 아이들의 천국이었다. 윗도리를 안 입거나 아예 고추까지 내놓고 사는 아이들의 맹꽁이처럼 부른 배 위로 참외 국물이 줄줄 흘러 그 위로 파리가 성가시게 엉겨 붙으면, 개울로 풍덩 뛰어들면 그만이었다. 우리집 뒷간 가는 길에 건너야 하는 실개천은 뛰어들 만큼 깊지는 않았지만 개울가에 당개나리가 한창이었다. 뒤란 안팎의 살구나무, 앵두나무, 돌배나무가 다 꽃이 진 뒤여서 주황색 꽃잎에 자주색 점이 박힌 당개나리의 만개 상태가 유난히 화려해 보였다.- 박완서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중

 

뒷 이야기를 미리 알고 읽는 과거의 아름다운 찰나들이 곧 사라질 것임을 알기에 더욱 아련하다. 엄마의 자랑이었던 우등생에 의젓한 박완서의 오빠는 후에 전쟁 중 부상을 겪고 힘겹게 투병하다 아내와 아이들을 남겨 놓은 채 무력하게 죽음을 맞게 될 것이다. 늦게서야 태어난 첫 사촌 여동생 명서의 구슬 같은 모습에 어른들이 흥겨워하는 모습도 후에 명서의 죽음으로 갑절은 눈물을 흘리게 될 것이었다. 그리고 작가가 그 당시로서도 남다른 학구열로 자식 교육에 열성을 다했던 엄마를 따라 서울로 왔다 방학 때면 안식처로 자리했던 그 따뜻하고 아름다운 고향 박적골은 분단으로 인해 다시는 돌아가지 못할 곳이 될 것이다.

 

가끔 예전의 사진들 속 모습을 보면 미래를 알지 못하고 그 시간의 구획에 갖혀 지냈던 모습들에 아연해지기도 하고 안타까워지기도 한다. 생로병사를 떠안고 흐르는 시간의 무게 아래 묻히지 않을 것이 없다. 이별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살아서 자신의 유년과 청년기를 회고했던 작가 또한 이미 고인이 된 터이다. 화자는 떠났다.

 

너무 예쁜 벚꽃이 이제는 자주 슬프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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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한 송이가 녹는 동안 - 2015 제15회 황순원문학상 수상작품집,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작품 수록
한강 외 지음 / 문예중앙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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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탠퍼드 감옥 실험으로 명성을 얻은 심리학자 필립 짐바도르는 "선량한 사람들을 망치는 것은 나쁜 사과가 아니라 나쁜 통이다."라고 이야기했다. 과거를 돌아보며 자신의 삶에 도덕적 준거를 들이대어도 비교적 떳떳한 대다수의 사람들에게는 운이 좋게도 바로 나쁜 사과 옆에서 그것의 부패를 목격하거나 나쁜 통에 함께 짓이겨 들어가 고통스러운 윤리적 결단의 순간을 경험하지 않아도 되었던 것이라는 이야기다. 이 이야기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인간의 고결함은 또한 그 순간부터 발휘되기를 기다린다는 가능성이기도 하다. 고통스럽고 어렵지만 숭고한 시간의 시험 앞에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한강의 <눈 한송이가녹는동안>의 마치 오류 같은 띄어쓰기에 멈추게 된다. 문법적 규칙을 넘어서는 붙여쓰기에 따라 읽다 보면 어떤 흐름과 시간성이 밀려온다. 이것은 비범한 시간이다. "그가 나에게 온 것은 자정 무렵이었다."로 그 시간성은 펼쳐진다. '그'는 '나'와 '경주'라는 여선배와 함께 했던 직장 동료다. 그리고 이미 그는 고인이다. 죽은 자와의 재회는 그 수많은 이해타산과 오해와 가식의 비늘을 벗겨내고 어떤 실재로 나아가는 데에 유리한 장치다. 그들이 근무했던 직장은 여성이 결혼과 동시에 퇴사해야 하는 불문율이 있었고 그 앞에서 이례적인 투쟁을 한 여직원이 밀려 나가고 빈 자리에 '나의 자리'가 있었던 것이다. '그'는 이러한 불평등 앞의 예외적인 남자였고 동기였던 여직원 경주는 그러한 그의 자리와 침묵을 상기시킨다. 셋은 함께 어울렸고 저마다의 그 불편한 윤리적 결단의 시점에서 '나'만을 남기고 그 결단에 몸을 던진다. 평범했던 그들이 해야 했던 그 처절한 선택은 공교롭게도 죽음과도 만난다. '나'는 그들의 고통의 바깥에서 '눈 한송이가 녹는동안'만이라도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것을 기록하고 이해하려 하고 그것을 애도한다.

 

김애란의 <애도>는 그것을 들어주는 사람들이 아니라 실제 가장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당사자들의 소외감을 구체화한다. 아득바득 모아 마련한 조그마한 아파트 안에서 해피엔딩은 없다. 대신 젊은 부부는 그들이 포기하고 감수했던 그 모든 것들의 무게를 감당했던  아이를 사고로 잃게 된다. 아이가 다니던 어린이집에서 잘못 보내온 복분자원액이 사정없이 튀어 버린 벽을 새로 도배하며 하필 아내가 그 도배지의 꽃을 머리에 이는 형상으로 자신들의 자식 잃은 슬픔에 대한 타인들의 그 조롱과 무관심이 극화되는 장면은 낯선 것이 아니다. "다른 사람들은 모른다"는 말은 상실이 내가 아닌 타인의 것이 될 때 그것이 결코 소통되거나 제대로 위무되지 못하고 썩고 이지러지는 것임을 자조한다.

 

손보미의 <임시교사>도 하나의 맥락이다. 그림 같은 중산층 집안의 베이비시터로 그 가족과 소통하고 그 가족의 상실과 불행까지 함께 공유한다고 착각하며 최선을 다해 자신의 마음을 내 주었던 중년의 '임시교사'의 결말은 결국 그 격의 없음의 거리에 아연해진 부부에 의하여 내쳐지는 것이었다. 위로와 소통의 통로는 때로 어떤 경계를 넘어서야 하는 것이고 그 경계는 자기 내면의 철책이 되어 방어선으로 구축되는 것이다. 그것이 양방향이 되지 못할 때 감수해야 하는  것들을 여자는 그러나 자기 나름의 치유법의 방편으로 외면하게 된다. 쌉싸래한 이야기였다. "사는 건 다 그런 거지"는 많은 것들을 싸안을 수도 있지만 너무나 많은 것들을 포기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기호의 <권순천과 착한 사람들>에서의 '나'와 황정은의 <웃는 남자>에서의 '나'는 묘하게 겹친다. 어떻든 여기에서 '나'는 작고 힘이 없는 사람들을 어쩌면 도와줄 수도 있었을 지점에 서 있게 된다. 같은 아파트의 사채업자의 집앞에서 힘들게 모아 어머니 대신 갚아준 돈을 돌려달라고 연일 시위를 벌이는 권순찬 앞의 소위 작가이자 교수인 '나'와 버스 정류장에서의 옆에 서 있다 기절하는 노인에게 어깨를 빌려줄 수도 있었던 '나'는 분명 어떤 도움을 줄 수도 있었지만 슬쩍 외면하고 자신의 길을 가고 남는 그 께름쩍한 기분을 어떻게 소화해야 할지 나름의 방법으로 찾기 시작한다. 아주 나쁜 통은 아니지만 이 통에는 소극적으로 도움을 요청하는 이가 하필 내 옆에 있고 '나'는 그러한 시선이 일견 불편한 것이다. 한강의 <눈 한송이가녹는동안> 이미 다 벌어져 버린 일들에서 잃어버린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일보다 잃어가는 중인 사람들의 옆에서 자신을 챙겨야 하는 '우리들'의 이야기는 더욱 현실적이지만 그것이 향하는 비겁한 결말과 나름의 합리화가 가지는 한계에 답답하다. 이야기는 이미 끝나고 난 지점에서 짚어가는 게 더욱 쉬운 일이고 듣기에도 더 낫고 그 간극은 결국 요즘 세상에서 사람들이 도리어 이야기를 피하게 되는 불편한 지점이 되기도 한다.

 

조해진의 <사물과의 작별>은 그 한계를 응시한다. "사라졌으므로 부재하지만 기억하기에 현전하는 그 투명한 테두리"에 서서 어슬렁거리며 그 안으로 들어갈 것인지 거기에 머물 것인지 아예 바깥으로 물러나버릴 것인지는 언제나 우리들의 몫이다. 하나의 목소리가 관통하는 것 같은 수상작들이 놓치지 않은 그 경계의 무게가 무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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