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한 송이가 녹는 동안 - 2015 제15회 황순원문학상 수상작품집,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작품 수록
한강 외 지음 / 문예중앙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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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탠퍼드 감옥 실험으로 명성을 얻은 심리학자 필립 짐바도르는 "선량한 사람들을 망치는 것은 나쁜 사과가 아니라 나쁜 통이다."라고 이야기했다. 과거를 돌아보며 자신의 삶에 도덕적 준거를 들이대어도 비교적 떳떳한 대다수의 사람들에게는 운이 좋게도 바로 나쁜 사과 옆에서 그것의 부패를 목격하거나 나쁜 통에 함께 짓이겨 들어가 고통스러운 윤리적 결단의 순간을 경험하지 않아도 되었던 것이라는 이야기다. 이 이야기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인간의 고결함은 또한 그 순간부터 발휘되기를 기다린다는 가능성이기도 하다. 고통스럽고 어렵지만 숭고한 시간의 시험 앞에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한강의 <눈 한송이가녹는동안>의 마치 오류 같은 띄어쓰기에 멈추게 된다. 문법적 규칙을 넘어서는 붙여쓰기에 따라 읽다 보면 어떤 흐름과 시간성이 밀려온다. 이것은 비범한 시간이다. "그가 나에게 온 것은 자정 무렵이었다."로 그 시간성은 펼쳐진다. '그'는 '나'와 '경주'라는 여선배와 함께 했던 직장 동료다. 그리고 이미 그는 고인이다. 죽은 자와의 재회는 그 수많은 이해타산과 오해와 가식의 비늘을 벗겨내고 어떤 실재로 나아가는 데에 유리한 장치다. 그들이 근무했던 직장은 여성이 결혼과 동시에 퇴사해야 하는 불문율이 있었고 그 앞에서 이례적인 투쟁을 한 여직원이 밀려 나가고 빈 자리에 '나의 자리'가 있었던 것이다. '그'는 이러한 불평등 앞의 예외적인 남자였고 동기였던 여직원 경주는 그러한 그의 자리와 침묵을 상기시킨다. 셋은 함께 어울렸고 저마다의 그 불편한 윤리적 결단의 시점에서 '나'만을 남기고 그 결단에 몸을 던진다. 평범했던 그들이 해야 했던 그 처절한 선택은 공교롭게도 죽음과도 만난다. '나'는 그들의 고통의 바깥에서 '눈 한송이가 녹는동안'만이라도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것을 기록하고 이해하려 하고 그것을 애도한다.

 

김애란의 <애도>는 그것을 들어주는 사람들이 아니라 실제 가장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당사자들의 소외감을 구체화한다. 아득바득 모아 마련한 조그마한 아파트 안에서 해피엔딩은 없다. 대신 젊은 부부는 그들이 포기하고 감수했던 그 모든 것들의 무게를 감당했던  아이를 사고로 잃게 된다. 아이가 다니던 어린이집에서 잘못 보내온 복분자원액이 사정없이 튀어 버린 벽을 새로 도배하며 하필 아내가 그 도배지의 꽃을 머리에 이는 형상으로 자신들의 자식 잃은 슬픔에 대한 타인들의 그 조롱과 무관심이 극화되는 장면은 낯선 것이 아니다. "다른 사람들은 모른다"는 말은 상실이 내가 아닌 타인의 것이 될 때 그것이 결코 소통되거나 제대로 위무되지 못하고 썩고 이지러지는 것임을 자조한다.

 

손보미의 <임시교사>도 하나의 맥락이다. 그림 같은 중산층 집안의 베이비시터로 그 가족과 소통하고 그 가족의 상실과 불행까지 함께 공유한다고 착각하며 최선을 다해 자신의 마음을 내 주었던 중년의 '임시교사'의 결말은 결국 그 격의 없음의 거리에 아연해진 부부에 의하여 내쳐지는 것이었다. 위로와 소통의 통로는 때로 어떤 경계를 넘어서야 하는 것이고 그 경계는 자기 내면의 철책이 되어 방어선으로 구축되는 것이다. 그것이 양방향이 되지 못할 때 감수해야 하는  것들을 여자는 그러나 자기 나름의 치유법의 방편으로 외면하게 된다. 쌉싸래한 이야기였다. "사는 건 다 그런 거지"는 많은 것들을 싸안을 수도 있지만 너무나 많은 것들을 포기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기호의 <권순천과 착한 사람들>에서의 '나'와 황정은의 <웃는 남자>에서의 '나'는 묘하게 겹친다. 어떻든 여기에서 '나'는 작고 힘이 없는 사람들을 어쩌면 도와줄 수도 있었을 지점에 서 있게 된다. 같은 아파트의 사채업자의 집앞에서 힘들게 모아 어머니 대신 갚아준 돈을 돌려달라고 연일 시위를 벌이는 권순찬 앞의 소위 작가이자 교수인 '나'와 버스 정류장에서의 옆에 서 있다 기절하는 노인에게 어깨를 빌려줄 수도 있었던 '나'는 분명 어떤 도움을 줄 수도 있었지만 슬쩍 외면하고 자신의 길을 가고 남는 그 께름쩍한 기분을 어떻게 소화해야 할지 나름의 방법으로 찾기 시작한다. 아주 나쁜 통은 아니지만 이 통에는 소극적으로 도움을 요청하는 이가 하필 내 옆에 있고 '나'는 그러한 시선이 일견 불편한 것이다. 한강의 <눈 한송이가녹는동안> 이미 다 벌어져 버린 일들에서 잃어버린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일보다 잃어가는 중인 사람들의 옆에서 자신을 챙겨야 하는 '우리들'의 이야기는 더욱 현실적이지만 그것이 향하는 비겁한 결말과 나름의 합리화가 가지는 한계에 답답하다. 이야기는 이미 끝나고 난 지점에서 짚어가는 게 더욱 쉬운 일이고 듣기에도 더 낫고 그 간극은 결국 요즘 세상에서 사람들이 도리어 이야기를 피하게 되는 불편한 지점이 되기도 한다.

 

조해진의 <사물과의 작별>은 그 한계를 응시한다. "사라졌으므로 부재하지만 기억하기에 현전하는 그 투명한 테두리"에 서서 어슬렁거리며 그 안으로 들어갈 것인지 거기에 머물 것인지 아예 바깥으로 물러나버릴 것인지는 언제나 우리들의 몫이다. 하나의 목소리가 관통하는 것 같은 수상작들이 놓치지 않은 그 경계의 무게가 무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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