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부학자 -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해부학 책 《그레이 아나토미》의 비밀
빌 헤이스 지음, 양병찬 옮김 / 알마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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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 아나토미> 하면 사람들은 반사적으로 인기를 끌었던 메디컬 드라마를 떠올리게 되지 사실 동명의 위대한 해부학의 고전을 쓰고 요절한 저자 헨리 그레이와 삽화를 그린 같은 이름의 헨리 카터를 생각하지는 않는다. 신경학자 작가인 올리버 색스의 만년을 함께 한 빌 헤이스 또한 자기만의 전문적인 관심사 분야를 파고들어 꾸준히 글쓰기를 한 작가로 이 <해부학자>를 통하여 그는 이 '그레이 아나토미'의 저자 두 명의 발굴되지 않은 삶의 궤적을 자신이 직접 참가한 해부학 수업의 과정과 함께 엮어 그려 나간다. 


'그레이 아나토미'의 저자인 헨리 그레이는 문자로 된 사적 기록을 많이 남기지 않아 그의 삶을 직접 추적하는 데에는 적잖은 한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이 천재 해부학자 외과의사는 삼십 대에 천연두로 요절하여 자신의 책이 중쇄를 거듭하며 의대생들의 필독서로 자리매김하게 될 것임을 예감하지 못한다. 그레이를 묵묵히 보좌하며 막대한 양의 정밀한 삽화를 그리며 책의 완성에 기여한 헨리 반 다이크 카터는 상대적으로 나름대로 성실하게 그날의 일상들을 기록한 일기를 남김으로써 간접적으로 그레이의 드러나지 않았던 그간의 행적을 드러내는 역할을 하게 된다. 카터는 그레이에게 어떤 경외감을 느꼈던 것 같다. '그레이 아나토미'는 그레이의 추진력과 카터의 무식할 만큼 집요한 성실성으로 세상의 빛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반짝 천재성을 드러내었던 그레이의 삶이 전염병으로 일순간 너무가 허무하게 중단된 반면 카터는 비교적 노년까지 남아 자신들의 역작이 세상에서 영광을 얻는 모습과 또 그것에 따른 열매를 맛보게 된다. 


저자 빌 헤이스는 원래는 헨리 그레이의 전기를 쓰려 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자신이 젊은 학생들과 캘리포니아 대학교에서 "해부학 개론" 수업을 듣고 해부 과정에 직접 참여하며 두 헨리가 탐구하고 천착하며 써 낸 해부학 교과서 뿐만 아니라 그 둘의 삶 그 자체에 대한 이해도와 공감도 점점 더욱 깊어짐을 느끼며 이야기는 좀 더 복합적인 양상을 띠게 되며 더욱 다채로워진다.  많지 않은 자료를 재구성하여 세간에 알려지지 않은 두 젊은 해부학자의 삶을 생생하게 재현해 내며 그 자신의 삶 속에서 일어난 사랑과 작별, 상실의 이야기를 슬며시 끼워넣는 손길이 놀랍도록 섬세하다. 그들의 삶에서 채워지지 않은 공백은 그래서 저자 빌 헤이스 자신의 삶으로 채워진다. 



그러나 그 많은 시신들 사이에서, 정작 죽음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인체와 죽음은 각기 배우는 곳이 다르다. 인체는 해부학 시간에 시신을 해부하며 배우는 거지만, 죽음이란 사망-사랑하는 누군가와의 이별-을 경험하면서 배우는 것이다.

-p.359



해부학자의 삶의 동행자였던 빌 헤이스의 연인은 책의 완성을 보지 못하고  급작스러운 죽음을 맞는다. 그리고 이 책은 그에게 헌정되고 이 책을 통하여 그는 다음의 동반자를 만나게 된다. 그러고 보면 헨리 그레이와 헨리 카터는 나란히 저자의 삶에 나름의 힘을 행사한 셈이다. 사람의 몸을 해부하여 신체를 알고 거기에 생기는 질병을 치료하고자 하는 열정, 그리고 그것의 올바른 가이드 라인을 위하여 자신의 삶을 바치다시피 하여 만들어 낸 길이 남을 명저, 그것들이 어찌하지 못하는 결국 맞이하고야 마는 상실과 죽음이 아름답게 교차하는 책이다.  학생들에게 적절한 해부학 교과서를 남겨주고자 했던 어쩌면 그 평범했던 의도가 두 젊은이의 열정과 성실성과 만나 맺어낸 우연한 눈부신 성취의 현장을 조금이라도 더 생생하고 진실성 있게 복원하고자 했던 저자의 지난한 노력의 과정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빛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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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겨찾는 유튜버 중 '편집자K'가 있다. 자신이 정말 좋아하는 일을 생업으로 삼은 이의 충만한 느낌이 좋다. 특히나 그녀가 직접 출간에 참여한 책을 소개할 때는 여지없이 영업당한다. 이 책이 그러했다.















시인 박연준(남자인줄)의 산문집. 향긋한 티백과 함께 받아 그 티와 함께 읽었다. 시인이니 만큼 단정하고 정제된 문장들이 촘촘하다. 어떤 문장은 너무 좋아 다시 돌아가 읽었다. 


생애의 모든 날을 그러모아 '평생'이라 부른다면 빛나는 날은 기껏해야 며칠, 길어야 몇 주밖에 안 될지도 모른다. 이전에 나는 가능한 한 찬란한 날만 골라 서 있고 싶었다. 특별한 날은 특별해서 , 평범한 날은 평범해서 구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바보 같은 생각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날은 작고 가볍고 공평하다. 해와 달이 하나씩 있고, 내가 나로 오롯이 서 있는 하루. 

-박연준 <모월모일>


이런 생각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그것을 이러한 문장에 담아 표현하는 건 시인이라 가능한 얘기일 것 같다. 막연하고 모호한 감정, 느낌이 시인의 문장으로 드디어 세상 밖으로 나온 듯한 그 경쾌하고 시원한 느낌이 좋다. <조그맣고 딱딱한, 붉은 간처럼 생긴 슬픔>은 시인의 일곱 살의 슬픔을 애도한 글이지만 동시에 내가 잊어버렸던 그 유년의 상처를 떠올리게 했던 지점이기도 해서 먹먹했다. 같은 시인이기도 한 남편과의 소소한 일상, 서로에 대한 애정, 자잘한 다툼 등에 대한 이야기도 잔잔하게 공명한다. 공통의 관심사와 같은 곳을 바라보는 반려자와 함께 하는 생활에 대한 문장들이 사계를 통과하며 절로 저자와 그들의 삶을 그려보게 한다. 그래서 이 책은 누구나가 읽어도 공명하고 공감할 수 있는 나날들에 대한 사려깊은 이야기다. 표지의 핑크빛 투명한 비누의 사진이 너무나 마음에 들어 슬며시 핸드폰 배경화면을 비슷한 것으로 바꿨다. 


잔잔해도 생에 대한 에너지와 여전한 열정, 애정의 흔적이 분분하는 이 책과 달리 노년에 대한 이야기는 좀 쓸쓸하다. 이질적이기도 하고 중년이 공감가는 대목도 있지만 그래도 내가 그러한 날들을 예비해야 한다는 자각은 스산하다. 
















역시 시인의 에세이다. 도널드 홀이라는는 미국의 계관시인 칭호를 받은 팔십 대의 시인이 이야기하는 노년에 대한 삽화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떠났고 기동력을 줬던 운전대는 잦은 사고로 인해 놓은 상태이다. 한 마디로 원하는 곳에 가려면 반드시 동행해서 도와줄 타인을 필요로 하는 상태에 있게 된 상황이다. 


나는 내 몫의 원이 점점 작아지는 것을 느낀다. 사실 노년이란 연속적인 상실의 통과의례다. 마흔일곱 살이나 쉰두 살에 죽는 것보다 전체적으로 그게 더 바람직하다. 탄식하고 우울해해 봤자 좋아지는 건 없다. 종일 창가에 앉아 새와 헛간과 꽃들을 바라보며 즐거워하는 편이 더 낫다. 나의 일상에 대해 글을 쓰는 것은 기쁨이다.

-도널드 홀 <죽는 것보다 늙는 게 걱정인>


내 몫의 원이 점점 작아지는 것은 아마 중년 이후부터 이미 시작되는 흐름일 것이다. 청춘이 확장의 절정이라면 중년은 이미 그곳에서 서서히 하강 곡선을 타기 시작했음을 짐작할 수 있는 연령대다. 잘 늙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다. 자기가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할 때 너그럽기는 쉽지만 이제 가진 것조차 서서히 놓아버려야 한다는 것을 수시로 느껴야 하는 시점에서 온화하고 따뜻한 사람이 되려면 인위적인 노력과 자기 성찰이 필요하다. 자기 뒤에 오는 사람이 살 곳이 자기가 떠난 뒤에도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을 수긍하고 배려한다는 행위도 그러하다. 환경을 생각하고 지구 생태계를 고려하는 판단을 하기 시작하는 것도 사실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은 이 지구를 결국 떠날 것임을 머리로라도 받아들여야 가능한 얘기다. 노시인은 심지어 시를 쓰는 동력과 활력도 하강하고 있음을 인정한다. 시는 그를 떠나버렸다. "시가 나를 버렸다"는 겸허한 고백이 저릿하다. 이제 그는 서서히 소멸을 향해 망각을 향해 저항하지 않고 걸어간다. 그 도정에 관한 이야기가 쓸쓸하다.


두 시인의 에세이가 채운 이틀, 약국 앞에 선 긴 줄에서 이름 모를 아저씨가 마스크를 가득 담은 상자를 실어오는 소리에 반가운 손님 맞듯 다 같이 웅성거렸던 날들과도 겹친다. 여전히 모르고 알아야 할 것 투성이인 '모월모일'들이 봄과 함께 떠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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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0-03-18 15: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도널드 홀의 책 나온 거 보고 브랑카님 생각했는데. 딱 맞혔네요! ㅋㅋ
박연준 시인 장석주 작가의 아내인 줄 알고 있습니다.
무가지 <예스채널>에 글 연재하던데 잘 쓰더군요.
아직 책은 못 읽어 봤습니다.^^

blanca 2020-03-18 20:44   좋아요 0 | URL
오, 스텔라님 예리하셔라. ^^ 아, 저는 시쪽으로는 문외한이라 잘 몰랐어요. 시인들이 대체로 산문도 참 잘 쓰더라고요.

다락방 2020-03-18 16: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72391039

위에 스텔라님이 적어주셨는데, 박연준 시인의 남편이 장석주 시인이고요. 둘은 결혼하면서 결혼식대신 같이 책을 냈어요. ‘우리가 결혼한다‘는 걸 책으로 알린 셈이죠. 그 책이 제가 링크 드린 [우리는 서로 조심하라고 말하며 걸었다] 입니다. 두 시인의 글이 같이 실려있어요. 저는 어쩌다보니 박연준 시인의 책 대부분을 읽었는데, [우리는 서로 조심하라고 말하며 걸었다]는 제 경우엔 딱히 좋진 않았어요.

blanca 2020-03-18 20:45   좋아요 0 | URL
아, 그렇군요. 다락방님은 시에도 전문가이니 딱 아시는군요. 저는 이름만 듣고는 남자 시인이라 생각했어요. ^^;; 아, 링크 따라가 보겠습니다. 감사해요.

moonnight 2020-03-19 00:0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어떤 책을 읽고 장석주 작가에게 정이 좀 떨어져서=_= 그와 결혼한 박연준 시인에겐 뭐랄까 안쓰러움이 들어요. 주제넘게도 말이죠. 쿨럭.
이 책은 출간소식 듣고 관심 갔는데 아직 사진 않았네요. 블랑카님 좋다 하시니 구매해야겠어요. 도널드 홀 책이랑 함께용^^

blanca 2020-03-19 08:44   좋아요 0 | URL
아, 그런 일이 있었군요... 그럴 수 있죠, 저도 좋아하는 책의 저자가 여자 아나운서랑 갑론을박 벌이는 쇼 보고 어제 정나미가 뚝 떨어졌어요. 아, 요새는 또 다들 왜 이렇게 책을 예쁘게 만들죠? 완전 소장각이랍니다.

유부만두 2020-03-20 08:17   좋아요 0 | URL
저도 그 비슷한 이유로 박연준 시인의 글을 찾아 읽진 않았네요. 쿨럭.

표지에 혹한 사람에 저도 있습니다. 향기를 상상하게 만드는 표지에요.


단발머리 2020-03-19 14: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도널드 홀의 인용해주신 문장 너무 좋네요. 늙어버린 사람의 이야기는 받아들여지는데 전 아직도 늙어가는 나에 대한 이야기에 대해 거부감이 들어요. 블랑카님의 차분한 글을 읽을 때 그래도 그 일이 그렇게 나쁜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요.
잘 읽고 좋은 책 소개받고 갑니다, 블랑카님^^

blanca 2020-03-20 07:44   좋아요 0 | URL
어제 문득 거울을 보고 또 놀랐답니다. 정말 나이들어가는 자신의 외형에 특히 익숙해지지 않는 것 같아요. 그냥 어떤 거부할 수 없는 순리와 타협해가는 것이겠지요. 커가는 아이들 모습도 너무 아쉬워요. 다섯 살 적 아이를 생각하면 눈물이 흐른다는 얘기를 이해 못했는데 꼭 한번만 다섯 살적 아이들을 불러와 꼭 안아주고 싶어요. 흑, 눈물나요.
 
우아한 연인
에이모 토울스 지음, 김승욱 옮김 / 현대문학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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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품절


시대적 분위기와 개인의 삶은 불가분의 관계다. 암울한 시대에 홀로 빛나는 삶은 없다. 겉으로는 그렇게 보일지라도 그것은 어느 정도의 기만을 품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IMF가 오기 전 청춘을 경험한 90년대 학번이 90년새들보다 더 진보적이라는 얘기에는 설득력이 있다. 경제적 부흥과 청춘이 만나 만들어지는 서사는 빛난다. 


미국의 대공황기가 끝난 1930년대 후반의 부유한 청춘들에 대한 얘기는 그래서 유독 눈길을 끈다. 이미 피츠제럴드가 기민하고 화려하게 여러번 이야기했지만 그 시대를 직접 경험하지 않은 전직 투자전문가인 에이모 토울스가 데뷔작으로 비슷한 주인공들을 불어내어 그럼에도 전혀 식상하지 않은 <우아한 연인>을 썼다는 사실이 경이롭다. 시대의 흥청대는 분위기와 통통 튀는 젊고 아름다운 인물들의 욕망,좌절, 사랑, 배신에 대한 묘사가 놀랍도록 섬세하고 생생해서 마치 그 시대 안으로 저도 모르게 초대된 듯한 느낌이다. 


주인공이자 화자인 케이티 콘텐트는 그 자신이 물론 서사의 한가운데에 있긴 하지만 <위대한 개츠비>의 닉 캐러웨이 같은 명민한 시대의 관찰자이자 증언자의 역할을 기꺼이 맡는다. 그녀의 시선을 통과한 그 시대는 처절할 정도로 아름답기도 하고 그 자본주의와 온갖 겉치레의 사다리에 기어올라가려는 적나라한 욕망의 오점들로 오염되어 있기도 하다. 특히나 이런 이율배반적인 모습은 마치 개츠비의 형제처럼 보이는 팅커 그레이라는 인물을 통해 극적으로 형상화된다. 케이티와 룸메이트 이브는 팅커 그레이와 우연히 만나 친구이자 묘한 삼각 관계에 얽혀들며 이 수수께끼 같은 청년이 속한 맨하튼 상류 사회의 화려한 사교계와 그 안의 내밀한 모습을 경험하게 된다. 작가는 시종일관 결국 이 팅커 그레이라는 인물이 구현해 낸 그 복합적인 삶의 기만을 통해 우리가 진실로 원하는 것과 필요한 것을 종종 혼동하는 과정에서 놓치는 본질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어했던 느낌이다.  계층의 사다리의 상부에 비교적 쉽게 올라가고자 하는 마음이 타인의 필요와 맞아 떨어질 때 어떤 비극을 연출하게 되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사실 낯선 것이 아니다. 에이모 토울스의 미덕은 그 골조를 통해 완성해 낸 건물 자체의 수려한 경관일 것이다. 진부할 수 있는 테마가 전혀 식상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 또한 그의 이러한 능력에서 나왔을 것이다. 


놀라운 점은 사십 대 후반의 남성 작가가 20대 중반의 여성의 마음을 완벽하게 대변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노동자 집안에서 태어나 우연히 부잣집 친구들과 어울리며 그들의 파티에 참가했을 때의 케이티의 그 시린 마음을 여러 다양한 경로로 경험한 기억이 있다. 그랬기 때문에 그들의 어리석은 치기에 완벽하게 몰입할 수도 없었다는 사실은 남은 중년의 삶에 유일한 위로가 될까? 에이모 토울스는 그 어리석지만 찬란한 아둔함의 정서가 반드시 청춘과 만나야 함을 정확하게 알아차린다. 실수하고 넘어지고 남용했던 시간들은 반드시 그때였기에 가능한 지점이 있다. 망각했던 시간은 진저리나는 그리움으로 돌아온다. 그래서 '중년의 끝자락'에 무사히 안착한 케이티가 회고하는 이십 대의 느낌은 공감을 얻을 수밖에 없다. 이십 대에서 사십 대로 선형적으로 진행하는 이야기가 가지지 못하는 어떤 회고적 시선은 작가가 가질 수 있는 최선의 것이었을 것이다.


눈물겹도록 무의미하지만 아름다운 장면이 많다. 특히 케이티의 남자친구가 이웃이 치는 피아노 소리에 이끌려 신청곡을 적어 끊임없이 종이 비행기를 그쪽으로 날려 보내려는 무용한 시도에 대한 장면, 셋이 본격적인 삼각 관계에 돌입하기 전 연말을 마무리하고 나란히 새해를 맞이하며 함께 노래 부르고 눈싸움을 하는 정경이 참 예뻐서 기억해 두고 싶다. <위대한 개츠비>처럼 읽고 나면 왠지 마음이 저릿해지는 청춘의 이야기다. 뒤돌아보고나서야 깨달을 수 있는 것들에 대한 찰나의 이야기는 언제나 이처럼 공명한다.  


금박의 제목이 빛나는 우아한 분홍색의 표지와 핑크빛 가름끈은 책의 형식이 아니라 이야기의 본질인 것처럼 보일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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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0-03-16 11: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크- 블랑카님, 이 좋은 소설을 이제야! 드디어! 읽으셨군요.
저는 케이티를 우연히 만난 팅커가 케이티에게 ‘그래, 여기에요?‘ 라고 묻는 장면을 너무 좋아해요. 케이티가 찾아가는 비밀 장소가 있다는 말을 일전에 했던 걸 기억하고 말이지요.

에이모 토울스는 이 작품 후의 작품 [모스크바의 신사]도 매우 좋아요, 블랑카님. 이 책을 이렇게나 좋게 읽으셨다면, 모스크바의 신사도 매우 좋아하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blanca 2020-03-16 17:02   좋아요 0 | URL
아, 안 그래도 냉큼 샀어요. 이 작가 대체 뭐죠? 사십 대 후반에 이런 작품을 데뷔작으로 쓸 수 있다니... 안 그래도 <모스크바의 신사>도 냉큼 샀어요. 이 작가 대체 뭐죠? 사십 대 후반에 이런 작품을 데뷔작으로 쓸 수 있다니... 그리고 왜 이렇게 전형적으로 멋있는 남자들이 많이 나오고 또 다 여주인공 좋아하고. 이렇게 쓰면 되게 유치한 것 같은데 전혀 그런 분위기도 안 풍기고. 좋은 작가는 정말 차고 넘치는군요.

비연 2020-03-16 12: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모스크바의 신사>를 읽고.. 이 책을 냉큼 주문했었는데 아직 못 읽고 있네요. 다들 호평이신데.. 얼른 읽어야겠다는.
에이모 토울스의 글은, 우아하면서도 두리뭉실하지 않아 좋은 것 같아요. 아름답지만 슬픔이 담겨 있는 장면들을 우아하게 묘사한다는 느낌이랄까. 아 읽을 책이 너무 많습니다.. 흐미.

blanca 2020-03-16 17:03   좋아요 0 | URL
아. 비연님은 <모스크바의 신사>를 먼저 읽으셨군요! 저는 지금 받아서 며칠 후에 시작하려 해요. 이 책과 어떻게 다를지, 기대됩니다. 진짜 정확한 표현입니다. 우아하면서도 섬세하죠. 이 작가의 팬이 될 것 같은 느낌입니다.
 

트루먼 커포티는 대단히 복합적인 인물이다. 유명인들과 밤새 파티를 즐겼던 사생활면뿐 아니라 작품측면에서도 그렇다. 이를테면 자신의 유년이 강력하게 투영된 <풀잎하프> 같은 작품은 동화적이고 아름다운 반면 일가족 살인마를 직접 밀접한 거리에서 취재하고 쓴 <인 콜드 블러드> 같은 르포르타쥬 성격의 작품은 사실적인 문장들이 섬뜩할 정도이다. 인간은 누구나 쉽게 드러내기 힘든 욕망과 타인에 대한 적의, 대의와 이상에 헌신하고자 하는 선의가 뒤섞여 있다는 것을 감안하면 이 작가에게서는 그러한 측면이 유달리 더 대조적으로 드러난 것 같다. 그는 친구들과 이웃의 호의를 기꺼이 받아들이고 감동했던 순수한 소년의 마음과 사회의 통념, 경직된 판단의 도덕률에 대한 적대와 증오를 자신의 작품 안에서 그만의 탁월한 기교로 화해시켰다. 


















트루먼 커포티가 마릴린 먼로와 친했었다는 사실은 의외로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불우한 어린 시절을 공유한 둘은 유년기의 단짝 친구들처럼 교감했다. 실제 그는 한 노배우의 장례식장에 마릴린 먼로와 함께 참석하고 보낸 시간을 <Beautiful Child>에 생생하게 그려냈다. 선글라스와 스카프로 무장한 마릴린 먼로가 립스틱을 바르며 거울 속의 자신의 모습을 넔을 잃고 바라보는 모습에 대한 재미있는 묘사와 마릴린 먼로가 독설가인 트루먼 커포티가 마릴린이 어떤 사람이냐고 묻는다면 뭐라고 대답할지를 포기하지 않고 집요하게 묻는 모습은 대중에게 비춰진 그녀의 모습과는 또 다른 사랑스러움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트루먼 커포티는 이 이야기의 말미에서 아름다운 해변의 일몰과 먼로가 그 풍경 속에서 사라져가는 모습을 마치 그녀의 슬픈 최후를 암시하듯  처연하게 그려낸다. 끝까지 먼로는 커포티의 언어로 자신을 표현해 볼 것을 요구한다. 그는 사람들이 "마릴린 먼로 어때? 걔 어떤 애야?"라고 묻는다면


"정말 아름다운 아이야. "라고 대답할 것이라고 맺는다. 이미 다 커버린 그녀를 아이라고 호칭한 커포티의 마음이 제대로 된 집이란 것을 가져본 적이 없다고 고백한 그녀의 모습과 겹치며 아릿하다. 둘은 많은 상처를 품은 유년을 공유한 채 대중과 세상의 주목과 가차없는 비판의 목소리에 노출되는 고통의 지점에서 만났다. 상처를 보듬어 줄 부모가 부재했던 유년을 커포티는 자신만의 방식인 글쓰기로 마릴린에게도 자신에게도 치유해주는 체험을 보여준다. 너는 어떤 상황에서도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라고 얘기하고 싶었던 또한 그러한 얘기를 듣고 싶었던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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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0-03-11 16: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 아이란 게 다 커도 쓰이긴 하더군요.
같은 동년배나 후배를 3인칭으로 지칭할 때도 쓰게 되더라구요.ㅎㅎ
커포티와 먼로가 가까운 사이였군요.
이 사람의 책도 읽어주긴 해야할 텐데 손때나 묻혀 볼지 모르겠습니다.ㅠ

blanca 2020-03-12 08:58   좋아요 0 | URL
아, 스텔라님 얘기 들으니 우리말도 그런 표현을 종종 쓰네요. 맞아요. ^^ 언젠가 인연이 있겠죠. 책도 작가도 인연과 때가 있어야 만나게 되더라고요.

유부만두 2020-03-20 08: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트루먼 카포티는 여기 저기에서 일화로 자주 접했는데요, 아직 읽진 못했어요.

blanca 2020-03-23 12:18   좋아요 1 | URL
언제 기회 되면 <풀잎 하프>부터 시작해 보시기를 추천합니다.
 

유전자에게 인간이란 그저 탈것, 통로에 불과할 뿐이에요. 말이 지쳐 쓰러지면 바꿔 타듯이, 세대에서 세대로 우리를 타고 계속 가지요. 그리고 유전자는 무엇이 선이고 악인지 생각하지 않아요. 우리가 행복하든 불행하든 관심 없어요. 우리는 그저 수단에 불과하니까요. 유전자는 그저 무엇이 자기에게 효율적이냐만 생각할 뿐이에요.

-무라카미 하루키, <1Q84>


의사이자 퓰리처상을 수상한 <암:만병의 황제의 역사>의 저자인 싯다르타 무케르지의 <유전자의 내밀한 역사>의 도입부에 인용된 하루키는 그가 인간의 운명과 선택의 문제를 유전자와 유전체의 관점에서 연대기적으로 기술한 이 경이로운 책의 서막을 울린다. 인간의 역사를 인간의 언어로 이야기하는 것에 익숙했던 우리에게 우리의 몸을 이루고 있는, 우리의 몸을 가로질러 세대로 전해지는 유전자의 관점에서 그것의 언어로 서술하는 것을 듣는 일은 얼음을 가르는 충격을 주는 경험이다. 무케르지는 후기에서 <암:만병의 황제의 역사>가 자신의 작가로서의 삶의 미래에 유치권을 행사했다고 고백한다. 그래서 다시는 책을 쓰겠다는 결심을 하지 못했다고 얘기한다. 하지만 그의 모든 에너지를 쥐어짜다시피 했던 '우리의 일그러진 자화상'의 방대한 역사는 다시 그것의 제대로 된 모습을 고찰하기를 요구했다. 그 결실이 이 책이다. 그가 얘기했듯이 이 책은 오히려 암 이야기의 전편에 놓였어야 마땅하다. 


















방대한 생물학, 유전학의 역사는 1865년 브르노의 온화하고 성실했던 수도사 멘델로부터 출발한다. 그가 생전에 거의 생애를 바치다시피 한 어마어마한 규모의 완두 잡종 실험을 기반으로 한 논문은 오늘날 우리가 서 있는 유전체 계획까지의 여정 자체를 가능케 한 업적이다. 그가 사랑한 완두 교배 실험은 원래 독립적인 유전 단위를 발견하려는 의도된 것은 아니었을지라도 지독한 성실성이 빚어낸 우연이 장대한 유전학의 역사의 견인 역할을 한 것이다. 무케르지는 다윈과 멘델에게서 "자연은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을까"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이 서로 다른 관점에서 구현되었다고 봤다. 둘다 성직자이자 정원사였다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각각 거시적이자 미시적인 관점에서 그 질문을 탐구했다. 멘델의 논문은 사후에도 한참 지나고 나서야 다시 유전학의 역사의 토대로 깨어나게 되고 다윈의 진화론은 그의 명성을 은근히 질시했던 사촌 골턴에 의해 비틀어진 형태의 우생학으로 스며든다. 


무케르지는 시종일관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관찰자이자 서술자로서의 입장을 견지하지만 힘의 헤게모니에서 물러난 유전학의 역사의 기여자들을 사려깊게 불러와 그들의 잊혀진 이름을 명명한다. 왓슨과 크릭의 DNA의 이중나선 발견으로 인한 노벨상 수상의 뒤안길에는 그들에게 영감과 발견의 도화선을 제공한 여성 과학자 프랭클린이 있었다. 그녀는 생전에 그녀의 성과에 맞는 적절한 대우도 기여도에 맞는 인정도 받지 못했다. 남성들이 쓰는 유전자의 역사에 프랭클린의 자리는 없었다. 이것은 왓슨과 크릭이 후에 보여준 행보와도 겹치는 부분이 있다. 유머가 넘쳤던 천재 과학자 둘은 신우생학을 지지하고 심지어 노년에는 인종편견적인 발언을 서슴지 않아 인생의 전반기에 달성한 업적과 명성을 무색하게 했다. 


유전자에서 유전체 계획으로까지의 발견의 연대기를 따라가다 보면 결국 우리는 선택의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진화의 방편이자 결과인 돌연변이에 대한 시선과 유전자를 복제하고 변형하는 그 가능의 영역에서의 '자기강화'의 허약하고 위험한 지점의 개입의 문제다.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에서 결국 우리는 자의적인 판단을 내리고 나치가 행사했던 그 끔찍한 인간을 대상으로 한 실험과 폭력의 역사와 오버랩되는 기시감에서 헤어날 길이 없다. 더 우수하고 더 건강하고 완벽한 세대를 꿈꾸며 그렇지 않거나 부족한 유전체의 가능성을 사전에 처단하는 기로에 유전학의 역사는 당도하고 말았다. 여기에서 저자는 과감하게 등판한다. 그 자신의 내밀한 역사의 솔직한 고백을 덧붙이며 무케르지는 경고한다. 그것은 그의 가계를 가로지르는 정신질환의 역사다. 삼촌들과 사촌은 조현병을 비롯한 각종의 심각한 정신질환에 시달렸다. 유전자의 힘을 감안한다면 그 자신도 그러한 유전의 힘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 딜레마가 어쩌면 이 장대한 유전자의 서사시를 추동한 힘일지도 모른다. 우리 모두는 이러한 돌연변이의 가운데에 자아를 놓는다. 모든 것을 매끈하게 획일화하려는 욕망은 우리 자신을 죽인다. 


역사를 추진하는 충동, 야심, 환상, 욕망은 적어도 어느 정도는 인간 유전체에 새겨져 있다. 그리고 인류 역사는 그런 충동, 야심, 환상, 욕망을 지닌 유전체를 선택해왔다. 이 자족적인 논리 회로는 우리 종의 가장 장엄하고 상징적인 자질 중의 일부일 뿐만 아니라, 가장 괘씸한 특징 중의 일부도 빚어낸다. 이 논리의 궤도를 탈출하라는 것은 너무 심한 요구이다. 그러나 그것이 본질적으로 순환적임을 인식하고, 지나칠 때 회의적인 태도를 가진다면, 우리는 강자의 의지로부터 약자를, "정상인"의 박멸 행위로부터 "돌연변이"를 보호할 수 있을 것이다. 

-<유전자의 내밀한 역사, 싯다르타 무케르지>


우리 자신을 더 잘 알고 싶다면, 내가 사는 이 세계에서 내가 행사할 수 있는 힘의 한계와 나와 나의 삶을 흔들어 대는 외부의 힘에 지쳤다면 유전자의 세계로 들어오기를 권한다. 그 불가사의하고 여전히 미지의 영역을 완고하게 감추고 있는 왕국에서 여전히 숨쉬고 있는 우리와 우리가 죽고도 이어질 그 유전자들의 역사는 인간이 그럼에도 살아나가는 그 근원적인 힘에 대한 경탄을 금할 수 없게 한다. 태어나 살고 죽는 과정이 무에서 무로 돌아가는 무의미함이 아니라 어떤 아름답고 복합적인 메시지의 일환으로서 자리매김한다는 앎은 함부로 폄하될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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