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 년 전이었나 보다. 집 근처에서 버스로 몇 정거장을 가면 있는 도서관은 좀 외진 주택가를 걸어들어가야 하는 곳이었는데 공원에 폭 안긴 폼이라 사방의 유리창으로 키 큰 나무들과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는 근사한 곳이었다. 게다가 부지런한 사서는 한국 문학 신간을 부지런히 넉넉하게 채워넣어 그 서가에서 그 책들을 한 아름 안고 나오는 길은 세상 부자가 된 느낌이었다. 그때 백수린, 김금희, 최은영을 만났다. 비슷한 또래에 비슷한 정서들을 공유하는 짧은 이야기들이 당시에 참 신선하고 좋았다. 여러 가지 일신상의 변화로 그 도서관을 떠나게 된 것이 참 아쉽다. 요 근래에 다시 그 작가들과 재회했다. 특히 정세랑의 발견. 대학병원이라는 장소를 둘러싼 <피프티 피플>의 이야기를 모처럼 즐겁게 읽었다. 장편소설이지만 오십 명 남짓의 등장인물들은 각자의 이름 아래 개별적인 서사를 가지고 있어 차례대로 이야기의 흐름을 잡으며 읽을 필요는 없다. 환자, 의사, 방사선사, 안전요원, 홍보부 직원들은 우리 주변에서도 흔히 만나볼 수 있는 유형들이다. 서로는 알게 모르게 얽혀 있어 뜻하지 않은 대단원의 마지막 장면에서 재회하게 된다. 지나치게 촘촘하거나 치밀한 구성은 아니지만 그러한 느슨한 연결이 더 현실과 닮아 있어 몰입이 됐다. 특히 세대 간의 만남과 소통의 장면을 자연스럽게 묘사한 대목이 좋았다. 섣불리 젊은이들에게 훈계하려 들지 않는 잘 늙은 이들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분주하고 다사다난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결국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되며 기분이 데워지는 이야기들이다. 또 다른 장소에서 그 장소를 중심으로 인간 군상의 모습을 그린 이야기를 만들어도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매력적인 작품이다. 누구에게나 추천하고 싶은 이야기.
사회생활을 오래 하다보면 사람에 대한 기준을 각자 세우게 되잖아요? 제 기준은 단순해요. 좋은 사람이냐 나쁜 사람이냐, 정신줄을 잘 붙잡느냐 확 놓아버리느냐, 상대방을 고려 않고 감정을 폭주시키는 걸 너무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이 의외로 많아요. 선하면서 스스로를 다잡는 사람, 드물고 귀해요.
-정세랑 <피프티 피플>
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는 이야기였다. "선하면서 스스로를 다잡는 사람"이 되는 길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너무나 많은 상황과 너무나 많은 감정의 진폭들은 때로 모두를 덜 예의바르게 만든다. 노력할 일이다.
백수린의 문장와 이야기는 결이 곱고 섬세하다. 예민한 현을 건드리는 재능이 뛰어난 작가이다. 한 마디로 아름다운 이야기를 쓰는 작가라는 생각이 든다. <여름의 빌라>도 예전의 인상을 그대로 떠올리게 한다. 특히 손녀가 추적하는 할머니의 이국에서의 로맨스를 그린 <흑설탕 캔디>와 선량한 인간의 내밀한 이중적인 마음에 대한 핍진한 묘사가 인상적이었던 <아주 잠깐 동안에>가 좋았다. 모든 걸 다 가질 수 없는 상황과 그것에 대한 복합적인 마음에 대한 포착에 대한 여운이 긴 이야기들. 제목처럼 참 싱그러웠다.
그럼에도 이런 겨울 오후에, 각설탕을 사탕처럼 입안에서 굴리면서 아무짝에 쓸모없는 각설탕 탑을 쌓는 일에 아이처럼 열중하는 늙은 남자의 정수리 위로 부드러운 햇살이 어른거리는 걸 보고 있노라면 할머니는 삶에 대한 갈망과 미래에 대한 기대가 또다시 차오르는 것을 막을 도리가 없었다.
-백수린 <흑설탕 캔디>
"아무짝에 쓸모없는..."이라는 말이 언제나 가슴을 파고든다. '쓸모'로 평가되는 사회에서 '쓸모없음'의 가치에 주목하는 일이 결국 읽고 쓰는 일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