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백산맥 1부 '한의 모닥불'을 다 읽었다. 전 3권, 1948년 10월 19일 여수.순천 사건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흡입력이 대단해서  일상 생활 지장을 받을 지경이다.  
현실과 맞물리는 지점이 많고 레드 콤플렉스에 대한 깊은 성찰을 보여준다.
등장인물들의  형상화가 눈부시다. 다 살아서 내 주변을 막 걸어다닌다.
조정래라는 작가는 정말 그 어떤 극찬을 붙여도 문자가 가진 저 바깥 경계의 한계 때문에 부족 또 부족하다. 

미군정 시대 일제의 지주 계층과 관,경찰 등 지배계층이 그 어떤 처벌이나 심판 없이 그대로 등용되어 초기 정부
요직을 차지하고 지금까지 이어져 왔다는 사실은 경악스럽다. 그러니 친일 논쟁만 나오면 발끈할 수밖에 없는 것일런지도.
역사의 청산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왜냐하면 어제의 축척이 오늘이니까. 그리고 내일의 예고이니까.
민중이 주체가 되는 역사를 깊은 염원으로 갖고 있는 작가의 고뇌가 살아 움직이는 등장인물들로 형상화되어 있다.

지주의 자식이면서 사회주의에 투신한 정하섭과 직책을 뛰어넘는 관용과 인간에 대한 애정을 보여주는
계엄사령관 심재모가 매력적이다. 심재모 같은 인간형은 지나치게 드라마틱하지만 작가의 소망을 보여주는
보여주는 부분이 아닐런지. 수많은 민중들의 전라도 사투리가 걸찍한 입담과 어우러져 정말 눈에 쫙쫙 들어붙는다.
외서댁의 봉숭아물 들이는 부분에 대한 회상은 투명하다.  

사회주의의 그 이상적 틀 속에 우리 민중의 처절한 배고픔과 생존의 의지가 반영되어 있다는 사실은 결국 그 틀이
왜곡 변형되어 이지러지는 데 필연적인 요인이 되었던 것 같다. 2부를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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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09-11-25 2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태백산맥은 처음 광주와서 살때 읽으려고 도전했다 전라도 말이 입에 안 붙어서 못읽고
두번째도 역시~ 2007년 세번째 도전에 3권까지 읽고 배경지를 샅샅이 훑고 왔지요.
하지만 아직도 그 이후는 못 읽었어요~ 한강, 아리랑은 두번씩 읽었는데 태백산맥은 내겐 너무 어려워요.ㅜㅜ

blanca 2009-11-26 13:32   좋아요 0 | URL
아.. 순오기님 그게 신기한게 저도 사투리 잘 모르는데 한 오권 넘어가니까 갑자기 휘리릭 붙기 시작하더라구요. 글구 갑자기 제 딸한데 전라도 사투리를 쓰기 시작했어요~ 그렇담 아리랑이 태백산맥보다 더 재미있다는 얘기인가요? 아...또 아리랑이 읽고 싶어지네요. 이제 그만 읽고 올해는 마감할라고 했는데-..-
 

  • '태백산맥'이 왔다. 드디어 시작했다. 오늘이 11월 18일이니 올해 가기 전까지 마무리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활자가 어찌나 빽빽한지 솔직히 부담 백배이지만. 시작이란 것은 언제나 약간의 두려움과 설렘이 함께 하는 것이니까.  
  • 입선이라도 했으면, 했던 기다리던 결과가 장장 2주나 지나 나왔다. 결과는 단추에 꿰어 맞추듯 입선이다. 솔직히 껄쩍지근하다. 안주기는 뭣해서 가여워서 챙겨준 것 같은 이 기분. 
  • 딸아이가 걷기는 무지하게 빨리 걸었는데 말이 또래에 비해 많이 늦어 걱정 아닌 걱정을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오늘 하루 문장이 아닌 단어가 폭발했다. 짜장,포크, 조끼,코끼리,사탕 등. 그래봤자 두 달 늦은 아는 동생은 유창한 문장을 구사하는 현황이라 조족지혈이지만 ㅋㅋㅋ 어어,버버 하던 아이가 갑자기 대부분의 단어가 터진다는 것은 고슴도치 엄마에게는 경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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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그들이 숨긴 진실 - 이덕일의 한국사 4대 왜곡 바로잡기
이덕일 지음 /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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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인명사전의 발간과 더불어 시의적절한 독서가 아니었다 싶다.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이들의 관련자들이 불만을 떠뜨리는 부분이 '친일'이라는 행위 자체의 판단 기준이 아니라,
친일 그 자체에 대한 용인(생존이라든지)이라는 것에는 정말 경악스럽다. 그러니 좀 봐주라, 이거 아닌가.
그 시대에서 어쩔 수  없이 주어진 체제에 순응해야 하는 부분이 있을 수 있음을 십분 인정하고 들어가도
저돌적으로 충성을 바친 부분까지 참아내 주어야 하는 것인가? 그런 기회주의를 용인하고 감싸안는 배포를 키워
대체 그 하해 같은 너그러움은 어디에 활용하려는 것인가? 이미 지나간 과거의 질곡에 얽매이지 말자는 그들의 논리는
결국, 오늘도 과거로 묻혀 간다는 물리적 한계 속에 지키기 힘든 도덕적 명분 내지 의리 대신 손쉽게 권력에 붙어 가는
자신의 처지들에 어설픈 변명을 갖다 붙이는 것과 크게 다를 게 없다는 생각이 든다. 

  • 한사군(중국고대 한나라가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세웠다는 식민통치기구)의 한반도내 설
  •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 
  • 노론사관에 의한 조선 후기사 서술 
  • 현대사 연구 금지론
      

위 네 가지에 대한 실증 문헌을 근거로 한 반박이 이 책의 요체이다. 이 네 가지 왜곡이 사실은 일본의 한반도 통치를 정당화하기 위한 식민사관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사실은 놀랍다. 오늘날의 역사의 대부분이 한국식민사학의 교주 쓰다 소우키치 및 그를 받든 이병도에 의한  것이고 그들에 의하여 고대 국가 설립 시기 및 문명도입시기를 최대한 늦추고 영토 확장 범위를 한반도로 국한해 고대판 조선총독부인 임나일본부를 존속키시고 더 나아가 일제의 식민통치를 정당화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식민사학의 잔재는 여전히 청산되지 못하고 국고로 운영되는 동북아역사재단에서조차 이러한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이덕일의 얘기다. 사실 다른 대목은 같은 얘기가 반복되어 조금 지루한 감도 있었고 워낙 배경지식이 전무하여 의견을 내놓을 깜냥은 못되는 것 같아 지나가고, 가장 관심있었던 정조독살설에 대한 학계의 반응 부분에 대한 얘기를 하고 싶다. 최근에 노론 벽파의 수장 심환지에게 보내는 정조의 어찰첩이 공개되었고 그 어찰을 통하여 드러난 친밀감과 자신의 건강의 악화에 대한 솔직한 토로를 근거로 독살설을 뒤집었다고 주장하는 언론의 반응은 역사의 문외한이 내가 봐도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터져나오는 정조와 노론 벽파계의 화해 무드(그것도 다 가고 난 마당에) 조성에는 무언가 역사를 그들이 그려가고 싶은 그림에 끼어 맞추려고 버둥거리는 옹색함이 드러났다고나 할까. 그 어찰첩이 공개되었으면 그것으로 그 내용과 문구에 천착하면 될 것인데 갑자기 비등하는 정조 독살설의 이슈화 자체가 무언가 찝집한 구석이 있음을 자인하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하다.  

민감하고 중요한 역사적 이슈들을 대중들에게 설득력 있게 설명하려 했던 그의 의도와 사학계의 강한 비난과 반발을 감수한 그의 용기에 박수를 보내지만 실증 근거들의 나열이 조금 산만하고 집중력이 떨어지는 부분이 있어 아쉬움이 든다. 또한 역사 속에서 대중들은 결국 주인공이 아닌 변방에서 주류들이 그려낸 현상에 대한 전달과 설명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터라 인기 작가인 그가 한 얘기가 진실 그 자체여야 한다고 그것을 근거로 목에 핏대를 세울 내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해 부탁 아닌 부탁을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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떡벌 2009-11-18 17: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이런 이덕일이 좃선일보에서 3년반동안 방상훈의 개가 되어 민주세력과 노무현대통령을 열심히 까댔지요.
좌파라고 씹으면서.....
오늘 박정희가 친일하지 않았다고 입에 개거품을 물더군요.....ㅎㅎ
이덕일의 실체를 알면 사람들이 달라질텐데.....
 

언제나 너는 나에게 많은 것들을 양보했었어.
단지 더 많이 가졌다는 이유로. 

이제 정말 우리 둘 같이 추리닝 바지 입고 쓰레바 끌면서
서문여고 앞에 인디언 떡볶이 먹으러 가는 일은 더이상 없겠지?
무언가를 같이 보고 항상 같이 듣고 같이 흥분하고 같이 미워하고
같이 울고 때로는 너무 미워 서로 악담을 퍼붓고 유치하게 욕하는 일기나 쓰고
그리고 또 그 일기를 서로 읽고 열받고. 

항상 나눠야 하는 게 싫어 외동딸을 꿈꾼 적도 있었지만
이제는 같이 항상 나눠야 했던 그 시절이 너무 그립구나.
이젠 각자의 공간에 각자의 가족을 만들고 각자의 꿈을 그리며 조금은 떨어져 걸어가겠구나.
이렇게 갑자기 다 늙어버린 기분. 
너와 만든 수많은 기억들이 갑자기 다 정지된 화면처럼 바스락거린다.
우리가 그래왔다는 것. 우리가 정말 그랬었다는 것. 다 꿈처럼 느껴져.
신랑보다 더 두꺼운 팔뚝을 요즘은 베일이 다 가려준다고 큰소리 쳐대던 너의 호기까지
말같잖은 논리를 그저 한살 많은 언니 얘기라고 호응해 주었던 너의 그 고개끄덕임도
오늘은 너무 그립구나. 

갱! 갱! 행복하자. 늙어 꼬부랑 할머니 되면 또 그렇게 손잡고 이쁜 츄리닝 입고
떡볶이 탐험을 떠나자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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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살까지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면 죽어 버릴꺼야!
작달만한, 한 때 정말 친했던 그 아이는 꼭 소설 속 명대사를 그럴 듯하게 읊듯 정확히 이렇게 말했다.
누군가의 자취방이었고 동아리 뒷풀이 후였던 것 같다. 여러 명이 술에 취해 있었고 각자 횡설수설 그닥
대단치도 아름답지도 않은 자신들의 사연을 풀어내고 있던 와중에(아무도 안 듣고) 그 아이는 절규하듯 그렇게 말했고,
아무도 그 아이의 그런 도발을 도발로 받아들이지 않고 심드렁하게 그러냐? 정도의 무덤덤함으로 정리하려 했다. 
사실 그 나이는 누구나 더 불행한 척했다. 더 많은 사연을 숨긴 척 하고 싶었다.

나는. 마음 속으로 동조했었다.
왜냐하면 그 때 스무 살에는 서른 살까지 살 거라고 그 끔찍한 나이 언저리에 도달할 거라고 상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나는 언제나 눈부신 처절한 스무 살 그 언저리에서 맴돌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스무 살이 싫었지만 서른 살은 생각도 하고 싶지 않은 나이였다.

내가 서른 살 너머까지 살아 있을 줄 알았더라면 스무 살 그 즈음에 삶을 대하는 태도는 뭔가 달랐을 것이다. 

                                                                                                                  -김연수 '청춘의 문장' 중 

김연수가 자신의 얘기를 풀어내는 것에 상당한 부담을 느낀다는 얘기를 들었다. 나 같은 독자는   그의 소설일지라도 그 속에는 그가, 혹은 그가 아는 많은 사람들이 엉켜 있다고 가정한다. 그도 주변에 그렇게 얘기하는 사람이 퍽 많다고 얘기한다. 이거 너얘기지? 이런 식으로.
글을 쓴다는 것은 솔직히 상당 부분 누군가의 관음증을 충족시켜야 하는 의무에 후달리게 된다. 작가는 더 많이 벗어 수치감을 달래면서 함께 독자를 더 충족시킬 수 있는 그 위태위태한 줄타기를 해야 한다. 물론 이런 한계에서 일찌감치 저멀리 날아가 버릴 수 있는 이도 있다. 아주 대단한 상상력을 지녔거나. 혹은 그런 사람을 주변에 두어서 더이상 자기 얘기를 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 소설가는 자신의 얘기를 하다가 어느 순간 그 고갈 지점에 맞닦뜨리게 된다고 한다. 그러면 그 다음에는 공부를 해야 한다. 그래도 어느 순간 또 자기 얘기를 풀어내고 있다. 인간이란 그런 존재다.  

'청춘의 문장들'은 김연수가 자기 얘기를 소설적 장치를 집어 던지고 솔직히 내 얘기야! 하고 고백하고 시작하는 얘기다. 그가 상당히 가난했고, 전도가 전혀 유망하지 않은 상태에서 시간마다 하꼬방 같은 곳에서 시를 써대는 얘기는 결국 작가는 결핍을 먹고 태어나는 존재인 것만 같은 결론에 도달하게 한다.  

그가 김천의 뉴욕제과 아들이었다는 얘기는 몇 번 접했지만, 원래 시인을 지망했고, 대학 졸업후 상당기간 백수였으며, 노숙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정처없이 떠돌다 숙박을 힘들게 해결하기도 했던 얘기는 지금 그가 쓰는 소설의 그 쿨한 분위기와는 상충하는 부분이 있다. 거칠고 단단하기보다는 말랑말랑하고 향기가 나는 조금 여성스러운 호흡을 내뱉는 그의 문장이 그 자체는 아니었던 것이다. 게다가 그는 한때 대중음악평론가였단다! 이 부분은 이제서야 왜 그렇게 그의 소설 속에 음악이 많이 등장하고 심지어 '세계의 끝 여자친구'라는 제목이 일본 밴드의 노래에서 왔는지 드디어 의문부호가 풀리는 지점이다. 그리고 그의 소설 속 인물들이 내뱉는 얘기들이 시구 같이 들리는 것 그것도. 솔직히 이 부분은 그다지 내 취향은 아니다. 저기 밀려오는 파도를 보세요, 저 파도는~ 이런 식의 대화는 현실에서 넘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그것보다는 차라리 김치 이쪽을 잡아라, 내가 찢을께 같은 김훈식의 대화가 더 살아 있는 것이 아닌가? 물론 나는 김연수를 좋아하기 때문에 그의 전체가 싫은게 아니라 이 부분이 조금 곤란하다는 정도이다.  

이 책을 읽다 보면 자꾸 애잔해진다. 자꾸 자꾸 김연수의 청춘이 아닌 나의 청춘이 나의 스무 살이, 나의 유년이 걸어들어 오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랬던듯. 많이 울었다는 리뷰들이 많았다. 다 자기가 처한 상황이나 기억들이 덧대어 지는 부분에서 감흥이 컸을 터인데 나는 그가 딸 열무(실명일까? 너무 이쁘다!)를 자전거에 태우고 달려가는 장면이 너무 예뻐서 주머니에 집어넣고 싶었다. 내 딸아이도 함께.  

정말 아름다운 여름이었다.(중략) 나무 그늘 아래를 달리면서 나는 "열무와 나의 두번째 여름이다"라고 혼자 말해봤다. 첫번째 여름은 열무는 누워서 보냈고 두번째 여름에는 아빠와 자전거를 타고 초록색 그늘 아래를 달린다. 세번째 여름을 또 어떨 것인가? 지금 내가 가진 기대 중 가장 큰 기대는 그런 모습이었다.(p.26)

 또 정릉의 달동네에서 자취하던 그가 비 오던 날 어느 시인의 방문을 회상하는 장면. 

아무도 뜯어주지 않는 선물 포장 속의 곰돌이가 된 심정으로 잇따라 붙은 도합 세개의 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니,(p.169)

곰돌이. 곰돌이. 그만 포복절도하고 말았다. 이런 앙콤하고 귀여운 표현은 권장되어야 한다. 암. 사실 생각해 보면 아주 슬픈 정경인데도 불구하고 김연수식의 위트가 그만 그런 풍경을 조금은 덜 초라한 것으로 업시킨다. 그건 그만의 장기일지도. 

아주 가볍지만 조금 슬프고 많이 웃긴 책이다. 나의 스무 살. 나의 청춘을 덜 아프게 회고할 수 있다면, 이제는 나의 스무 살을 누군가에게 주저리 주저리 거짓말 조금 보태고 과장 몽창 쒸워 할 수 있다면. 그 지점 이 책을 읽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그래도 시인 등단 소식이 오던 날 구내식당에서 큰 소리로 웃어대었다는 그의 목소리를 빌리면 그 희미하던 것들이, 흩어져 있던 것들이 조금 더 명료해지고 아픈 그 부위들이 조금씩 치유받을 수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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