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2월, 나는 대전으로 가는 KTX를 탔다. KTX는 처음이다. 대구에 할머니집이 있어 수시로 기차를 탔고 객실에서 연년생 여동생과 투닥거리곤 하다 경유지의 그 십분 동안 아이들에게 가락국수를 먹이고자 뛰어 내려가 줄을 서서 좁은 객실 복도에 우동 두 그릇을 들고 웃으며 나타났던 아버지가 떠올라 혼자 우동을 사 먹었다. 하지만 그때의 맛도 그때의 느낌도 물론 아니었다. 홀가분하기도 하고 좀 쓸쓸하기도 했다. 이렇게 마흔을 보냈다.

 

기대했던 차창의 풍경은 황량한 논,밭, 공장지대로 채워져 있었고 그마저도 너무 빠르게 휙휙 지나가 감상에 잠길 틈이 없었다. 기차가 아니라도 예전의 대전은 지방으로 내려가려면 통과해야 하는 중요한 기착지였다. 아무리 밀려도 연착되어도 대전을 찍으면 얼마간 부모님은 안심을 하셨다. 그런 대전이 이제 한 시간도 채 안 되어 서울에서 갈 수 있는 거리가 되어 버렸다. 내 안의 아이는 아직 생생한데 나는 어느덧 중년이 되어 버린 것처럼. 인생의 시간도 그렇게 점점 빨라져 가는 것 같다.

 

"나는 끝내 그 사람에게 죽음을 권할 수 없었다."

                             -나쓰메 소세키 <긴 봄날의 소품> 중

 

 

 

어떻게 이렇게 이런 말을 할 수 있을까? "죽지 말라고 했다."도 아니고, "사는 게 낫다."도 아니고 "끝내 죽음을 권할 수 없었다."는 이 말이 울린다. 나쓰메 소세키니까 할 수 있는 그다운 이야기인 것 같다. 소세키에는 많은 사람들이 찾아온다. 문학, 삶을 둘러싼 고민들, 죽음 등에 대한 이야기가 이 작가 앞에서는 자유롭게 나왔던 듯하다. 슬픈 여자의 고백 뒤에 소세키가 한 이야기다. 그 어떤 구체적인 사연은 나오지 않지만 여인은 몹시 슬프고 힘든 와중에 소세키에게 조언을 구했던 듯하다. 여자의 고백 앞에서 소세키는 죽음을 의식하지만 이 불행한 삶을 끝내 긍정하지 않고는 삶 안에서는 그 어떤 이야기도 진행시킬 수 없음을 간파한다.

 

죽음을 의식하는 것이 삶에 대한 부정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죽어간다"는 의식은 삶을 더 명징하게 의식하게 만든다. 여기, 지금을 비판하지만 결국 그 안에서 우리는 걸어간다.

 

 

"그럭저럭 살아 있다."

 

와병 중에 나쓰메 소세키는 스스로의 상태를 이렇게 표현한다. 병이 결국 진행형으로 자신을 죽음으로 데려갈 것임을 의식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인의 아내의 요절 앞에서는 "세상의 모든 국화를 던져 넣으리, 그대 관 속에"라는 작별의 하이쿠를 바친다. 신비롭고 아름다운 추모사다. 모든 사라지는 아름다운 것들에 대한 광범위한 연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열심히 살았다. 잘 살았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렇게 계속 이렇게 걸어가게 되는 것 같다. <열흘 밤의 꿈>에는 놀랍도록 아름다운 이야기 한 편이 나온다. 사랑하는 여자가 죽기 전에 남긴 말은 "백 년만 기다려주세요"였다. 떨어진 별 파편을 주워 여자의 무덤 위에 놓으며 남자는 붉은 해를 헤아리며 백 년을 고대했다. 남자는 결국 '벌써 백 년이 지났구나.'하고 깨닫는다. 소세키가 이 이야기를 1908년에 소개했으니 벌써 훌쩍 백 년이 지나 내가 읽게 된 것이다.

 

벌써 백 년이 지났구나. 그렇다면 또 앞으로의 백 년은 얼마나 훌쩍 지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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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6-12-31 00:4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어머낫~ 전 긴 봄날의 소풍 ㅡ으로 제목을 봤어요 . 그렇게 보고싶었나봐요 . 봄하면 소풍이 자연스레 떠오르니까...소풍이 길다는건지 ..봄날이 길다는 건지 ..하면서 궁금해 했는데 ㅡ 소품이었네요!
시적인 표현이네요. 찬란한 봄엔 모든 것이 소품같이 있을 자리에 있는 느낌 일까 ㅡ호기심 도 들고요!^^

blanca 2016-12-30 17:11   좋아요 1 | URL
정말 그렇네요. 저도 그렇게 읽었어요. ^^ 소세키의 소설, 에세이 등이 모두 참 좋았어요. 마지막 글도 묘하게 봄에 끝나네요. 이 추위가 물러가고 빨리 봄이 오기를 고대합니다. <그장소>님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기를...

cyrus 2016-12-30 16: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따뜻한 봄이 얼른 왔으면 좋겠습니다. 3개월만 지나면 되는데 살다 보면 이 시간도 금방 지나갈 것 같습니다. 서재의 달인 축하드리고요, 올해 마지막 주말 잘 보내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blanca 2016-12-30 17:12   좋아요 2 | URL
아, 나이 들수록 겨울이 힘들어요. 아이들도 계속 감기에 걸리고요. 푸념하네요^^;; cyrus님, 새해 복 많이 받고 2017년에는 좋은 일들이 더욱 많이 생기기를 기원합니다.

나와같다면 2016-12-30 16: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뭐죠..? 이 서늘함.. 어디서 오는거죠?

blanca 2016-12-30 17:13   좋아요 1 | URL
이 하이쿠 같은 댓글은 어떤 뜻이 있는 걸까요? ^^;; 궁금합니다.

낭만인생 2016-12-30 21: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벌써 백 년이 지났구나. .... 누구나 다 가는 군요.. 기분이 묘합니다.

blanca 2017-01-01 09:07   좋아요 0 | URL
어렸을 때는 일 년도 까마득했는데 이제는 오 년, 심지어 십 년도 훌쩍 지나가리라 생각되니, 상대적으로 인간의 삶이 참 짧게 느껴져요.

jeje 2016-12-31 2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모르겠습니다. 점점..빠르게 흐르는것은 분명히 느끼는데.휴.
차가 지나가고, 불빛이 반짝거리고, 커피가 식고 있습니다. 저의 현재는 그렇게 지나고 있습니다.
blanca님 연말 알차게 보내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blanca 2017-01-01 09:07   좋아요 0 | URL
아, jeje님이 묘사해 주신 풍경이 눈 앞에 떠오르네요. 감사합니다. jeje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기를 바라요.

2017-01-06 22: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1-07 09:54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