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에 다시 시작한 피아노를 둘째 아이를 가지면서 그만두게 되어 버렸다. 그러다 혼자 또 다시 시작했다. 나날이 조금씩 나아지는 모습을 혼자 즐기게 된다. 어제 안 되던 마디가 오늘은 되는 경우, 시간만 잡아 먹는 게 나이 드는 게 아닌 것 같아 기분이 한결 낫다. 시험 공부는 괴로웠지만 시험이 끝난 뒤를 상상하는 시간이 행복했고 시험이 끝난 당일 그 말로 다 옮길 수 없는 시원한 기분이 좋아서 시험 끝나는 날을 기다리다 보니 대학생이 되어 버렸다. 하고 싶은 많은 것들을 시험이 끝난 뒤로 미뤄야 하는 인내의 시간의 무게가 시험이 끝난 뒤의 홀가분함을 이기지는 못했다. 그래서 이제 끝내야 할 시험이 없는 시간이 막막하다. 더 이상 다음 주, 내년, 십년 뒤를 설레어 하며 기다릴 나이는 아닌 것이다. 이제 무언가를 스스로 배우지 않는 한, 노력하지 않는 한, 등을 떠밀어 주고 격려해 주며 도착지를 안내해 줄 어른의 굳건한 지지는 없다. 잠들기 전, 잠과 잠 사이, 잠이 깰 때, 나이듦을 느끼는 것도 이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소풍도 시험도 소개팅도 데이트도 알아가야 할 미지의 것들도 이제 다 어딘가 시간들이 쌓여 풍화하는 그곳에서 삭고 있거나 할 것이다.

 

 

 

 

 

 

 

 

 

 

 

 

 

 

 

 

 

제목이 참 쓸쓸하다. 중년을 훌쩍 넘겨 버린 프랑스의 철학 교사는 니체를 페소아를 쇼펜하우어를, 몽테뉴와 프로이트를 인용하지만 결국은 자신이 생에 느낀 배신감, 그 황량함, 부조리함을 고백한다.

 

독일인들은 우울을 '세월병'이라 부른다. 마치 우리가 호흡하는 공기 속에 섞여 있지만 보이지는 않는 부식성 물질처럼, 초,분, 시, 일, 주, 월, 년의 흐름이 우리를 갉아먹는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 프레데리크 시프테 <우리는 매일 슬픔 한 조각을 삼킨다> 중.

 

 

그렇구나, 세월병. 요가를 하면서 때로 '몸'이라는 이 세월이 흔적을 매일 부지런히 쉬지 않고 아로새기는 바탕을 강렬하게 실감할 때가 있다. 내가 마음대로 구부리고 펼 수 있는 이 느낌도 결국은 영원하지 않을 거라 생각하면 묘한 기분이 든다. 그냥 그 찰나에 모든 것을 구겨넣고 싶은 심정이다. 철학 교사의 글은 철학자의 글 같은 깨달음으로 가득하다. 막간의 자신의 이야기는 살짝 귀엽다. 영원하지 않을 것을 알면서 결국 마지막에는 여자를 향한 사랑에 대한 모순적인 소회에서 사람 냄새가 난다. 그렇지, 내일 죽을 것을 알아도 아름다움의 빛에는 반응하고 하나의 환상이 매개한다 해도 거기에 더한층 진실한 것이 있을 거라는 기대를 가지고 나아가는 것, 뼛속까지 물든 염세주의자는 도저히 삶을 이길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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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16-06-20 14: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계속 안 되던 마디는 연습하면 나아지기도 하겠지만 ... 이젠 끝내야 할 시험이 없다는 블랑카님 문장이 마음에 콕 박히네요...

blanca 2016-06-21 10:17   좋아요 0 | URL
줄줄이 시험이 있을 때에는 그리도 괴롭더만 이제 무언가를 준비하고 기대할 시험이 없는 나이가 되어 버리니 이것 또한 허무하네요. 자기가 스스로 뭔가에 도전하지 않는 한 주어지는 시험은 없으니까요. 만들어서 시험이나 도전 과제라도 저 자신에게 주어야 할 까봐요.

2016-06-20 16: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6-21 10: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6-06-20 17: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피아노를 다시 쳐보고 싶은데, 기회를 자꾸만 미루고 있습니다. 이제 저의 두 손은 책을 받쳐주는 노예가 되어버렸습니다. ^^

blanca 2016-06-21 10:18   좋아요 0 | URL
아직 늦지 않았어요. 꼭 다시 시작해 보세요. 책을 받쳐주는 노예도 좋긴 하네요.^^;;

마녀고양이 2016-06-21 15: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번에 새로 나온 악보집을 보면서, 정말 다시 피아노를 배우고 싶어졌어요.
수 년 전에 디지털 피아노도 다시 사놨는데... ㅠㅠ.

블랑카님, 몸이 구부러지지 않는 것이 제 현실입니다. 틀림없이 십 년 전에는, 아니 오륙 년 전에는 허리를 비틀어서 왼쪽 무릎이 오른쪽 바닥에 닿았던 것 같은데.......... 잃어버린 것들을 많이 생각하는 날들입니다, 물론 하고 싶은 것들과 하고 있는 것들, 해내야 할 것들로 머리가 분주하기도 한 날이기도 합니다. 머, 이래 저래 초조감이 생애를 지배하네요. ㅋ

blanca 2016-06-21 17:10   좋아요 0 | URL
마녀고양이님, 빨리 시작하세요. 이게 또 다른 말도 못하는 재미가 있어요. 저는 레슨은 아직 아이 때문에 못 받아서 그 점이 어찌나 아쉬운지... 그래도 참 신기한 게 오늘보다 내일이 낫고 어제보다 오늘이 분명 더 좋아요. 살면서 사실 그런 건 별로 없잖아요.


희선 2016-06-22 02: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답이 정해져 있는 시험은 없다 해도 아주 없는 건 아닌 것도 같아요 정해지지 않은 답을 찾아야 하는 건 시험이 아닐지도 모르겠네요 누가 하라고 해서 하는 것보다 자신이 하고 싶은 걸 천천히 하는 것도 괜찮죠 그런 게 있는 것도 아니군요 그걸 생각하고 하시는 분을 알뿐이네요 끝은 알 수 없고 끝이 없을지 몰라도 날마다 뭔가 하면 조금씩 쌓이겠죠 그날그날 할 것을 정해두어도 괜찮겠네요 피아노도 그래야 할 듯합니다 오늘 잘 안 되면 내일은 좀 나을 거야 하고... 피아노 즐겁게 하세요


희선

blanca 2016-06-22 11:42   좋아요 0 | URL
고마워요. 희선님, 더 열심히 즐겁게 피아노를 쳐야 할 것 같아요. 사는 일 자체가 어쩌면 하나 하나 시험을 치루어 내는 과정일 지도 모르겠어요. 예전처럼 그 결과에 너무 일희일비하지 않아도 되겠지만... 그건 또 나이듦의 장점이 될 수도 있겠어요.

테레사 2016-07-05 1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홋..피아노가 집에 있다니..정말 부럽습니다. 저는 직장다니면서 유일한 꿈이라면, 베토벤 피아노소나타 한곡이라도 칠 수 있을 정도의 피아노실력을 갖추는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바이엘40번인가에서 멈췄습니다...손은 이미...지멋대로 ..빳빳합니다.

blanca 2016-07-05 16:30   좋아요 0 | URL
언제 다시 시작하셔도 삼개월 안에 손이 다시 풀릴 거예요. 손은 다 기억하고 있더라고요. 테레사님의 꿈도 조만간 이루어지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