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연말에 쓴 페이퍼를 읽으니 기분이 묘하다. 지금은 2015년이고 이제 곧 2016년이 온다. 조금만 더 시간을 늘여 창밖으로 지나가는 풍경도 보고 마음에 드는 곳이 나오면 잠시 내려도 보고 싶은데...시간의 속도는 그렇지 않다. 그래서 또 이렇게 읽었던 것들을 갈무리 해두려 한다.

 

 

 

 

<길 위에서>는 산문 형식인데 마치 아름다운 한 편의 대서사시를 읽는 느낌이다. 작가 잭 케루악의 경험이 태반이라 그 내밀한 청춘의 방랑의 고백은 그 누구의 그것과도 공명하는 아련한 순간이 될 것같다. 너무 가볍지만도 않고 그렇다고 지나치게 젠체하지도 않는 딱 그 지점의 젊은 우리들의 이야기.

 

돌아올 것을 알고 떠나는 길의 굽이마다 마주치는 사람들과 아름다운 풍경은 내가 놓쳐버린 것들을 톺아 보고 잃어버린 것들을 만나게 한다. 즐겁고 그리운 읽기였다.

 

 

 

 

 

 

 

 

 

 

 

카버의 단편들은 정말  별 것 아니지만 항상 뭔가가 있어 찡하게 한다. 그 '뭔가'가 결국 그의 힘겨웠던 삶 속에 있었다는 발견은 '어느 작가의 생'을 통해 온다. 성실하고 아름다운 평전이다. 함부로 개입하지 않고 판단하지 않지만 작가에게 애정을 가진 시선은 그를 한 작가로서 한 아버지로 청춘을 다 바쳤던 첫 결혼에 실패했지만 끝까지 전처에게 의리를 지키려 했던 우직한 사내로 살려 놓는다. 평범한 사람이라도 한 사람의 생애를 이렇게 촘촘하게 엮어 나가다 보면 누구나 뭉클한 이야기로 재평가 될 것같다.

 

 

 

 

 

 

 

 

 

 

 

 

필립 로스는 '쓰는 일'과 언어에 영원히 기대를 가져도 무방함을 보여주는 작가다. <에브리맨>에서의 그의 통찰력은 삶의 굽이마다 발휘된다. <네메시스>는  더 이상 나이 든 사람의 쇠락에 집중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누구나 한때 지나치는 그 찬란한 시간, 그 비상에 대한 찬탄과 그 뒤안길을 놀라울 정도의 대비감으로 형상화한 작품이다. 놀이터를 지키던 그 모두의 형이자 오빠였던 그의 몰락은 대미를 장식하지 않는다. 무너져도 우리에게 남아있는 여전히 빛나던 그 영웅의 어깨가 눈부시다.

 

 

 

 

 

 

 

 

 

 

 

 

 

 

 

 

 

 

 

 

 

 

꼭 대단히 진지하거나 분석적이지 않아도 충분히 철학적이고 깊이가 있는 책들이다. 각각 시간과 늙어감과 자기 성찰에 대한 이야기들이다. 무엇보다 잘 읽히고 일상에 몰아닥치는 그 수많은 고충과 고난들 사이에서 조금 더 삶을 길고 큰 차원에서 조망할 수 있게 해준다.

 

 

 

 

 

 

 제목이 평이하다고 내용까지 진부한 것은 아니었다. 저자 아툴 가완디가 실제 의료 현장에 있는 의사로서 병환에 있던 아버지의 죽음을 지키는 이야기는 누구나 피해갈 수 없는 '어떻게 죽을 것인가'에 대한 즉답은 될 수 없어도 적어도 상황에 휩쓸리지 않고 진지하게 최선을 찾아 나아갈 가능성과 길의 전범을 보여준다.

 

 

 

 

 

 

 

 

좋아하고 존경했던 작가 올리버 색스가 올해 타계했다. 죽음을 앞두고 그가 남긴 글의 약속을 그는 정말 지켰다. 태어나는 과정을 통제할 수 없듯이 삶 속으로 파고드는 죽음 앞에서도 한없이 작아지고 무력해지는 인간이지만 적어도 어떤 고귀함을 지키려는 노력은 허무한 것이 아니었다. 열정적이었던 그의 삶을 스스로가 정리한 자서전이 번역되어 나왔으면 좋겠다.

 

 

 

언제 읽어도 이 대목은 정말 사는 게 좋다는 느낌을 준다. 그래서 2015년 말미에 이렇게 갈무리해 둔다.

 

헨리 키터리지는 오랫동안 이웃 마을에서 약사로 일했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여름날 약국으로 이어지는 큰길로 들어서기전 마지막 구간의 가시덤불에서 야생 라즈베리가 송알송알 맺힐 때나, 매일 아침 하루도 빠짐없이 약국으로 차를 몰았다. 은퇴한 지금도 그는 여전히 일찍 일어나 예전에 그런 아침을 얼마나 좋아했던가 떠올렸다. 마치 세상이 혼자만의 비밀인 듯이. 발밑에서 타이어가 부드럽게 구르고 햇살이 이른 아침 안개를 가르고 모습을 드러내는 동안, 오른쪽으로 만이, 그다음엔 키 크고 늘씬한 소나무들이 잠시 보였다.

-엘리자베스 스트라우스 <올리브 키터리지> 중

 

 

그런 아침들로 이루어진 삶. 그게 사는 일의 전부는 아니지만 뼈대였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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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eka01 2015-12-16 08: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장 아메리인가요..늙어감에대하여..올해 저도 읽었던 책이 있어서 반갑네요..

blanca 2015-12-16 13:31   좋아요 1 | URL
맞습니다. ^^ <늙어감에 대하여>가 좀 지나치게 냉소적인 감도 있어서 읽고 나면 힘이 빠지기도 하지만 도저히 아니라고는 말하기 힘든 대목이 많더라고요.

파란놀 2015-12-16 1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지막에 갈무리하신 글월을 보니, 문득 <행운아>에 나오는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행운아>를 읽을 때 느낀 바람 한 줄기가 비슷하게 흐르는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행운아>는 존 버거와 장 모르 두 분이 엮은 `어느 시골 의사` 다큐멘터리입니다. 아름다운 십이월로 즐겁게 갈무리하셔요 ^^

blanca 2015-12-16 13:32   좋아요 0 | URL
아, <행운아>는 못 읽어 봤어요. 그런 분위기라면 읽고 나면 행복해지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드네요. 한번 찾아보겠습니다.

yureka01 2015-12-16 14: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에서 보니까 장아메리는 유태인으로 독일의 수용소에서 겨우 살아남은 사람이더군요.그런데 늙어서는 벨기에서인가 자살했다고 하더군요.아!~~~~

blanca 2015-12-17 13:36   좋아요 0 | URL
역시...그랬군요. 삶을 스스로 포기한 사람의 글을 읽을 때에는 저도 모르게 가라앉게 되는 것 같아요.

희선 2015-12-17 0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해 2015년도 얼마 남지 않았네요 새해를 맞은 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십이월이면 늘 이 생각을 하는군요 기억에 남는 책을 정리해두는 것도 좋겠네요 한해 동안 어떤 책을 만났는지 알 수도 있고... 이렇게 말하면서 저는 하지 않겠다 생각하는군요 날마다 같은 날일지라도 그것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지요


희선

blanca 2015-12-17 13:37   좋아요 0 | URL
시간이 정말 너무 빨리 가서 이제는 작년에 했던 일이 올해 했던 게 아닌가 여겨질 정도예요. 나이들수록 더 빠르게 느껴진다는데 기억만 자꾸 늘어 큰 일입니다.

테레사 2015-12-17 1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블랑카님...마지막 인용 문단은 참말 평이하면서도 특별한 무언가가 느껴져요...저도 그의 작품을 좋아해요^^; 전체적으로 이번 포스팅은, 좋네요..ㅎㅎ 대부분 그렇듯이

blanca 2015-12-17 13:38   좋아요 0 | URL
그렇죠. 제가 요새 든 생각이 그냥 별 것 아닌 아주 작은, 자잘한 것들이 어쩌면 사는 일의 본질일런지도 모른다는 거, 그래서 단순해지는 것도 때로 참 좋다,는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