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한 시기, 일탈에 관대해지고 욕망에 솔직해지는 시간이 있다. 그 시간은 돌아올 수도 돌아와서도 안 되지만 나이들수록 더 생생해지는 그리움을 휘감고 뒤돌아보는 정경이 된다. 소설가 김연수는 서른 이후에도, 마흔 이후에도 이렇게 살 줄 알았다면 얼마나 여유로운 20대를 보낼 수 있었을까, 라고 <청춘의 문장들+>에서 이야기했지만 뒤늦게 찾아올 깨달음과 신중함을 장착한 청춘은 진정한 의미에서 청춘이 될 수 없다. 내가 서른이 되고 마흔이 되고 새털 같은 나날들이 결국 늙음과 죽음으로 귀결될 것임을 절절하게 인식하고서야 어찌 마음껏 욕망하고 마음껏 사랑하고 뒤도 안 돌아다 볼 것처럼 이별할 수 있겠는가. 청춘은 무지하고 무모해야 제맛이다.

 

 

 

 

 

 

 

 

 

 

 

 

 

 

 

 

 

 

 

그리하여 나는 해가 져 버린 미국의 어느 밤 낡고 망가진 강둑에 앉아 뉴저지 위로 펼쳐진 넓디넓은 하늘을 보고 있자면, 육지가 갑자기 믿기지 않을 만큼 크게 부풀어 태평양 연안까지 이어지고, 모든 길이 펼쳐지고, 모든 사람들이 꿈을 꾸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중략>

누구도, 누구도, 앞으로 어떻게 될지 알지 못한다. 버려진 누더기처럼 늙어가는 것밖에 알지 못한다. 그럴 때 나는 딘 모리아티를 생각한다. 끝내 찾아내지 못했던 아버지, 늙은 딘 모리아티도 생각하면서, 딘 모리아티를 생각한다.

-p.197

 

 

<길 위에서>는 작가 잭 캐루악이 길 위에서 보낸 자신의 청춘을 다시 살아내는 과정이다. 여기에는 어떤 관습, 어떤 금기, 어떤 경계 들은 가뭇 없고 찰나 안에 가두어진 존재의 불꽃만이 휘황하다. 언제든 어디에서든 신비로운 바보, 잃어버린 형제 같은 딘 모리아티가 나타나면 작가의 분신인 샘 파라다이스는 다시 떠나고 또 떠난다. 미대륙을 횡단하며 뚫고 지나가는 강렬한 흔적들 갈피마다 이미 나이들어 버린 샘 파라다이스는 역설적으로 죽음과 늙음과 헐벗음을 이야기한다. 그러니 그 젊음은 사실 온전한 것이 이미 아니다. 이미 나이든 시선이 관조하는 청춘의 덧없는 아름다움은 눈물겹다. 그것은 이미 죽어버린 샘 파라다이스의 아버지와 이미 몰락해 버린 딘 모리아티의 아버지를 또 다른 내일의 '나'로 애도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삶의 여정과 길이 오버랩 된 자리에 남은 것은 역설적이게도 청춘이 이야기하는 나이듦, 몰락, 작별, 죽음이다. 가벼움으로 위장한 깊이가 가닿은 곳이 바로 이 이야기.

 

스무 살, 친한 친구에게 나는 내가 경험한 모든 것, 내가 느낀 모든 것, 내가 생각했던, 생각하는, 생각할 모든 것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러니 이야기는 해도 해도 줄지 않고 아무리 많이 말하여져도 들어져도 갈급했다. 다음 날이면 나는 그 아이를 또 만나 우리가 헤어져 있었던 그 시간 만큼 더 늘어난 이야기의 간극을 줄이고자 또 이야기를 시작하고 듣고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샘 파라다이스와 딘 모리아티의 이야기도 그러했다. 그 아이들은 모든 것을 소통하고 나누고 싶어했다. 그 불가능한 별을 향해 쏘아 올려진 그 무모한 시도들과 노력들은 청춘과 함께 스러졌다. 이미 그럴 것을 알고 하는 이야기는 그래서 언제나 아프다. < 길 위에서>를 아쉬움 없이 편안하게 읽지 못하는 이유는 이미 우리가 그것이 끝나버릴 것을 알고 듣는 이야기이기에 그렇다. 청춘은 그런 것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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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놀 2015-06-28 19: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이 마흔을 넘어도
쉰 줄이나 예순 줄을 지나도
우리 마음에 푸른 바람이 분다면
우리는 늘 청춘이지 싶어요.
언제나 새로운 길로 씩씩하게 나설 수 있는~

blanca 2015-06-29 08:49   좋아요 0 | URL
육체의 노화도 그렇지만 새로운 일에 대한 두려움, 현재에 안주하려는 안일한 마음이 노화의 징후인 것 같아요. 댓글 감사합니다. ^^

Nussbaum 2015-06-28 2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병상에서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나의 20대 초반은 나름 기억할 것이 많구나.. 하는 안도의 한숨. 주사바늘을 꽂으며 열심히 책장을 넘기던 그 기억이 무릇 파랗게 다가오네요 !

blanca 2015-06-29 08:50   좋아요 0 | URL
아, 그러셨군요!! 안 그래도 저 이 책 너무 늦게 읽은 것 같아요. 이십 대 초반에 읽었더라면 더 흠뻑 빠져들 수 있었을 텐데 아쉬워요.

moonnight 2015-06-28 2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게 매우 충격으로 느껴졌던 책이었어요@_@; <길 위에서> 라고 하면 우선 두근두근하는 이 마음.;; blanca님의 글로 다시 만나니 참 좋습니다.^^

blanca 2015-06-29 08:52   좋아요 0 | URL
저도요, 달밤님. 지금까지 접해 오던 소설들과는 정말 다른 느낌이었어요. 논픽션의 느낌을 강하게 받았고 어떤 틀이나 형식이 해체되는 느낌이 신선했어요.

에이바 2015-06-29 09: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청춘은 무지하고 무모해야 제맛이다, 옳은 말씀입니다.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면서 가장 아쉬운 점이 그거예요. 조금 더 무모했더라면, 도전했더라면 어땠을까.. 비트 제너레이션의 글을 두고 중2병이라고들 하던데 저는 그렇게 보지 않아요. 비트닉에게는 매력, 날 것의 무언가가 있어요. 저도 이 책을 너무 늦게 알았다는 아쉬움이 큽니다..

blanca 2015-06-29 14:01   좋아요 0 | URL
중2병 ㅋㅋ 재미있는 조합이네요. 그러기엔 좀 많이 늙은 나이가 아닐런지. 언제 한번 이렇게 살아 보겠어요. 어른들 말씀 잘 안 들어도 좀 넘어가 주는 시기, 어느 정도 누려야지요. 하지만 참 모순적인 게 제 딸이 저처럼 열심히 논다면 머리 좀 아플 것 같아요--;

희선 2015-06-30 2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람은 나이 들수록 여러가지를 알기도 하지만, 겁이 많아지는 것 같아요 잘 안 되면 어쩌나, 잘 못하면 어쩌나... 나이는 청춘이 아니라 해도 마음은 청춘이면 좋을 텐데, 그렇게 살기도 어려울 듯하네요 하지만 철은 잘 안 들 것 같습니다 이런 말도 있군요 철들면 죽는다는... 어느 때는 지금 아는 걸 더 일찍 알았으면 좋았을 텐데 하기도 하잖아요 지나간 시간 그리워하는 것이 나쁘지 않지만, 지금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게 좀 낫겠죠


희선

blanca 2015-07-01 12:40   좋아요 0 | URL
네, 나이들수록 겁쟁이가 되는 면이 많아요. 저는 이제 수영도 자전거 타기,도 배울 수 없게 되어버린 건가, 가끔 좌절합니다. 때로는 무모하기도 한 면이 있어야 좀 삶이 다이내믹해질 텐데 아쉬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