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작가 프리모 레비는 제2차 세계대전 말 파시즘에 저항하다 아우슈비츠로 끌려가게 되고 차마 언어로 다 담아내기 힘든 참혹한 인간성의 추락을 목도하게 된다. 그러나 그를 살게 한 것도 결국 인간이었다. 이탈리아인 민간 노동자 중 한 명인 로렌초가 대가 없이 나누어 준 빵, 배려들.
하지만 로렌초는 인간이었다. 그의 인간성은 순수하고 오염되지 않았다. 그는 이 무화의 세상 밖에 있었다. 로렌초 덕에 나는 내가 인간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을 수 있었다.
-<이것이 인간인가> 중
토니 모리슨의 <빌러비드>는 참으로 읽기 힘겨운 소설이었다. 이 이야기 전에는 영문도 모르는 체 자신의 땅에서 끌려나와 인간의 존엄과 자유를 박탈 당하고 동물처럼 부림을 당했던 흑인 노예의 역사적 사실들은 사실 개별성이나 구체성을 가지고 나에게 다가오지 않았었다. 토니 모리슨의 소설의 말미에 덧붙인 이야기처럼 “그것은 전할 만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이것은 이해나 공감의 차원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형제보다 더 사랑했던 동료가 자신의 눈 앞에서 불타 죽고, 입에 재갈을 물고 있는 광경을 어떻게 생생하게 절절하게 떠올리고 이해하고 아파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작가의 말처럼 너무 광활하고 길조차 없어 차마 독자라는 권리를 가지고 발을 들여놓기도 힘든 것이었다. 모성마저 노예 제도 안에서는 사치였던 한 여인이 “너무 짙게” 사랑해서 겪을 수밖에 없었던 수많은 고통의 편린들이 칼날처럼 날카롭게 아팠다. 흑인 여성 작가로서의 정체성을 포기하지 않은 작가의 이야기가 가지는 가치는 그 아픈 역사 속에 사라져 간 숱한 익명의 삶들에 이름을 붙이고 감히 무화되지 않게 붙잡으려는 그 처절한 노력 속에 있었을 것이다. 자식이 다시 백인 주인에게 붙잡혀 동물처럼 특징을 관찰당하고 관리되는 그 대장 안에서 익명화되고 계량화되느니 부모의 권력 남용이자 도저히 용서 받을 수 없는 죄악이라 해도 생명을 끊으려 했던 어미의 애닳는 심정만이 이 이야기의 전부는 아니었다. 수용소 안에서 짐승 같이 짓밟혔던 프리모 레비가 인간 로렌초에게서 받은 관심과 배려로 삶을 포기하지 않았듯 여기에서도 만삭의 몸으로 주인에게서 도망나온 흑인 노예 세서를 도와 준 백인 소녀 에이미가 구원이다. 토니 모리슨의 언어들은 마치 아름다운 선율처럼, 다채로운 빛깔처럼 그 어색한 조합이 이루어 낸 아름다운 성과를 담아낸다. 푸른 고사리의 포자들에 둘러싸여 백인 소녀는 온몸이 퉁퉁 부은 흑인 여인의 넷째 아이를 받아내며 당돌하게 묻는다. 이 아이한테 나를 이야기해 줄 거냐고. 그리고 마침내 자신의 이름을 이야기한다. 다시는 만나지 못할 그 인연은 아이의 이름으로 남는다. 덴버. 에이미 덴버. 프리모 레비가 인간 로렌초를 절규했듯 세서는 딸의 이름에 그 대가를 바라지 않았던 인간의 몸짓을 각인한다.
불타 죽은 남자 노예가 떠나 보낸 여인은 사랑의 결실을 품고 있었다. 모든 가없는 절망을 성토하고 남은 것은 토니 모리슨의 애가였다.
"그 여자는 내 마음의 친구야. 그 여자는 나를 하나로 모아줘.
조각난 나를 모아서 제대로 맞춘 다음 돌려주지. 얼마나 좋은지 몰라. 마음의 친구인 여자가 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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