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아홉 살이 되는 딸아이가 가까스로 정리 습관 좀 잡아가려는 찰나, 태어난 동생의 집안 어지르기 신공은 나날이 일취월장이다. 어디에선가 숨겨 놓은 면봉 하나 하나 다 꺼내어 흩어놓기, 옷장에서 가방, 옷 다 끌어내려 내동댕이치기, 없어져서 찾아 보면 좌변기에 수건을 빠는 센스까지 보여주신다.
집안은 난장판, 정갈하게 정리된 집에서 읽고 쓸 날은 멀었다. 참 이상한 괴벽이 생긴 게 그럴수록 정리에 관련된 책과 정리용품을 사 모으게 되었다. 그러니까 지금 여기가 너무 어지러우니 내가 꿈꾸는 깔끔하고 정리된 공간에 대한 염원은 커져만 가고 '수납'의 노하우만 알면 만사형통일 듯한 환각에 빠지는 것이다.
높은 집값과 한정된 주거 면적 때문에 비교적 좁은 공간에서 지내는 데에 익숙한 일본인들의 수납 노하우에 관련된 책이 많다. 아이들을 키우면서도 그들의 집은 '나의 집'과 천양지차다. 어쩌면 물건들 사는 센스도 남다른지 흩어진 장난감도 색채와 모양이 조화를 이룬다. 이 책들을 읽으며 정리를 하기 위해 가장 먼저 착수하는 작업은 정리함 사재기다. 그런데 막상 정리함이 오면 그 정리함들이 공간을 차지하고 아이들은 정리함에 머리를 박고 끌고 다니며 더 가열차게 집을 어지른다.--;;
<깔끔 수납 인테리어>는 단순히 정리에 대한 노하우만 보여주는 책이 아니다. 그 공간에 사는 사람들의 물건과 공간에 대한 가치관도 은연중 읽을 수 있다. 정리와 공간에 대한 나름의 정비된 철학이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적어도 그들은 공간과 그 공간을 무단칩입하며 점거하는 물건들에 휘둘리지 않고 그것들을 통제하고 간수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인상적인 점은 '물건'에 있어 어떤 가격이나 상황과의 타협을 용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나처럼 싸니까, 그냥 지금 여기 파니까, 사들이는 일은 하지 않는다. 정말 마음에 꼭 맞는 물건이 나오기까지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불편을 감수한다. '소비'에 대한 마음가짐이 남다르다. 단순히 정말 소비적이고 소모적인 것이 아니라 삶을 살아가는 데 긴요한 동반자적 지위가 '사물'에 부여되니 그 사물의 자리는 정갈하다. 고개가 끄덕여진다. 아이들 물건도 그러하다. 좋은 물건을 써봐야 물건을 선택하고 소유하는 데에 대한 눈이 생긴다는 것이다. 그러니 육아용품도 일시적으로 자리를 차지하는 보기에 유치찬란한 것들이 아니라 아이들이 두고두고 간직하고 물려줄 수도 있는 '진짜'를 산다.
'버리기'라면 솔직히 좀 하는 편이다. 둘째부터는 동생, 이웃네에서 옷을 물려 입히고 그마저도 치수가 작아지면 아름다운 가게에 보내기로 하고 있다. 첫째 공주님은 지금 당장 너무 예뻐서 그 옷이 어른과 달리 한두 해 용이라는 것도 미처 알아차리지 못하고 인형 옷 같은 것들을 여러차례 사곤 했다. 아이는 너무나 금방 크고 너무나 많은 것들을 샬랄라한 옷들에 흘렸고, 세탁에도 지워지지 않는 것들이 많아 그 첫눈에 반했던 옷들은 차마 남들에게도 주지 못할 정도로 추접스럽게 변하곤 했다. 이후로 이런 시행착오 덕에 아이 옷에 대한 소비욕은 거의 아예 없어졌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집안은 내가 몇 달에 한번 눈길도 주지 않는 많은 것들이 무단 점령하고 있다. 나의 소비 패턴은 '가격과의 타협'이 빈번한지라 후회로 점철된 사물들이 위무도 당당하게 버티고 있는 경우가 많다. 곤도 마리에도 도미니크 로로도 그렇게나 '버리라'고 하건만 그것은 쉽지 않다. 특히 책장의 책은 정말 몇 번을 훑어도 내 손을 떠나보낼 것이 없다는 결론이다.
아, 이 책은 정말이지 너무 사랑스럽다. 저자는 만화가 이우일의 아내이자 그 자신 그림책 작가 선현경이다. 사십대 중반이고 이제 몸에 살이 조금 올랐고 엄마와 취향이 비슷한 십대의 딸과 고양이들, 마당이 있는 집에 산다. 그녀가 '버리기'를 시작하며 하루에 하나씩을 버리는 프로젝트와 더불어 그 사물과의 이별을 자신의 일러스트로 장식한다. 덧붙여 그 사물과의 추억, 그 날의 일상이 있다. 친정 엄마가 준 아기자기한 소품들, 그릇들, 친구들이 손수 만들어 주거나 선물로 준 것들, 한때 자신의 취향이라고 믿었던 그러나 지금 나이에는 도저히 소화할 수 없을 것 같은 옷들이 필요한 사람에게 가거나 버려지는 과정이 아기자기하게 그려져 있다. 그녀는 자신의 삶이나 자신의 일상만으로 스스로를 그려낼 수도 있었겠지만, 이렇게 자신이 포기하고 버리는 것들로 그 어떤 것보다 자신에 대해 가장 잘 이야기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이 책을 다 읽고나면 그래서 저자와 정이 푹 들어버린다. 탭댄스와 요가를 배우고 남편,딸과 함께 예전의 신혼지로 다시 리마인드 허니문을 가고 마당에 꽃모종을 심고 고양이를 돌보며 책을 쓰는 사십 대 중반의 그녀의 삶이 참 잔잔하고 행복하고 따사로워 보인다. 원래는 따라 버리려고 동행했는데 이쯤 되면 나도 빨리 아이들이 커서 내가 하고 싶은 일도 하고 조그만 강아지도 키우고 여행도 좀 가고 하는 꿈을 꾸며 행복해져 버린다.
물론 돌아오면 다시 아들은 화장실 변기를 휘젓고 있지만...그게 마침표는 아니라는 것을 명심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