똑같은 상황이 벌어져도 그것에 대한 묘사가 생생하고 더없이 재미있어 항상 이야기를 듣고자 주변에 사람이 들끓는 그런 사람이 있다. 과장하는 것도 아니고 거짓말을 덧붙이는 것도 아닌데 그런 사람은 사건이나 상황의 무미건조한 표면에 나름의 섬세한 끌질로 빛나게 한다. 타고난 이야기꾼이라는 진부한 표현은 사실 진부하게 활용되기 힘들 만큼 드문 캐릭터다. 어쩌면 이들은 사건의 이면, 사람들의 언어의 이면의 진짜 핵심, 차마 말하여지 못한 것들을 성실하게 소묘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녀는 자신이 묘사하는 특별한 작은 세계의 회전축이 고상한 사상, 강렬한 야망, 비극적 절망 등이 아니라 금전, 결혼, 사회적 계급의 유지 등이라는 것을 잘 알았다.
-클리프턴 패디먼, 존 S. 메이저 <평생독서계획> 중
<서재 결혼시키기>의 앤 패디먼의 아버지 클리프턴 패디먼의 <평생독서계획>에서 제인 오스틴을 '대가족의 동정을 잘 살펴보는 똑똑하고, 눈 밝고, 의견 표명 잘하는 나이든 고모'라고 표현한 대목에 줄을 그었다. '제한된 주제를 다루고 있음에도 고득점을 올리고 있다'고 제인 오스틴을 평가한 부분에도 절로 고개가 주억거려졌다. 사실 제인의 이야기들은 정말 별것들이 아니다. 여자가 남자를 좋아한다. 대부분 이 여자들은 가문은 괜찮지만 금전적으로 여유롭지 못해 미모와 덕성의 콜라보레이션이지만 실질적인 신붓감으로 각광받지 못하는 상태다. 그리고 돈도 많고 가문도 좋은 미남자가 나타난다. 숱한 난관과 우여곡절 끝에 결국 그들은 현실을 극복하고 결혼한다. 대체로 이러한 구도다. 단순한 플롯의 그녀의 작품들이 지루하고, 진부하냐고 묻는다면 전혀 아니라고 이야기하겠다. 사실 그게 미스테리였다. 그녀의 소설들은 정말 다 대체로 아주 재미있다. 진부한데 구태의연한데 손에서 놓을 수가 없다. 한번 보기 시작하면 도저히 그만둘 수 없는 연재 만화와 연속극 같다고나 할까. 자극적인 막장 요소가 없는데도 그녀의 작품은 일정 시청률을 담보한다.
시골 목사의 딸로 태어나 평생 혼자 여행을 다녀본 적이 없고 미혼으로 죽은 제인 오스틴의 처녀작. <센스앤 센스빌러티>로 영화화도 되었다. 엘리너와 메리엔 이 두 자매의 기질이 이성과 감성의 대표인 것은 당연하다. 동생 메리엔은 소위 나쁜 남자와 사랑에 빠졌다 쓰라린 배신을 당하고 결국 나이 지긋한(고작 서른여섯인데 완전 늙다리처럼 묘사된다--) 신사와 결합한다. 물론 언니 엘리너도 차분하게 사태를 관망하며 자신의 주위에서 가까워졌다 심지어 다른 여자와 약혼했다 헤어진 남자와 결혼하여 자매까리 지척에 살며 더없이 행복해졌다는 이야기. 줄거리의 비약은 후반부에 가서 갑자기 급조된 것처럼 다 행복해지고 동생 메리엔의 나쁜 남자마저 참회의 눈물을 흘리며 막을 내리는 데에서 절정을 맞는다. 그. 런. 데. 너무 재미있다. 아껴가며 읽게 된다. 그리고 클리프턴 패디먼이 강추하는 그녀의 <엠마>를 읽을 결심을 하게 된다.
왠지 깐깐하고 성마르게 보이는 버지니아 울프 앞에서 제인 오스틴은 어떻게 비춰졌을까. 제인은 1800년경 증오도 고통도 공포도 없이, 항의하거나 설교하는 일도 없이 글을 쓰는 여성으로 칭송된다. 독립된 서재도 없어 가족공동거실에서 다른 사람이 들어오면 원고를 숨겨 두거나 압지로 덮으며 글을 썼던 제인 오스틴의 작품에 시대적 격랑이나 역사적 외연은 발견되지 않는다. 대신 그녀의 펜끝에서 스며나오는 인간의 내면의 섬세한 결은 하나 하나 다 그대로 우리와 우리 주변의 사람들로 확장된다. 사람을 됨됨이가 아닌 가진 것이나 줄 수 있는 것으로 판단하는 풍조. 그리고 그 풍조에 저항하는 소수. 그럼에도 항상 그 모든 것을 차치하고서도 살아남는 낭만적인 사랑에 대한 꿈. 제인 오스틴의 소설은 지금으로부터 백 년이 지나도 아니 심지어 오백 년이 지나도 읽히고 또 살아남을 것이다. 사람들은 결국 거창한 주제나 심오한 고민보다 자기 내면의 끄달림, 주변 사람들에 대한 자잘한 감상, 아쉬움, 바람으로 언제나 돌아오는 존재이니 이 깐깐하고 명민한 고모의 이야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테니 말이다. 머리 아프고 '척'하는 이야기에 질릴 때쯤 그녀의 이야기를 권한다. 아름다운 여자와 멋있는 남자가 결국 이루어지는 이야기는 언제나 달콤하다. 참, 완성도 면에서 가장 높다는 그녀의 <설득>도 더불어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