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책의 작품성과 관계없이 책을 읽는 데에는 책을 읽는 사람의 취향이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것 같다. 아, 나는 마술적 리얼리즘과 안 맞는다.--;; 아니, 이해가 부족하다고 하는 게 더, 공감력이 떨어진다는 게 더 적절한 고백일까.
물론 인내심을 가지고 다 읽어내긴 했다.(다 읽어야 새 책을 주문할 수 있다) 그리고 다 읽고 나서 이 작품이 위대하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이 책을 읽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책을 칭찬했다. 칠레의 역사와 한 가문의 몇 세대에 걸친 내력과 여성들의 삶들이 마술적 리얼리즘과 맞물려 장대하고도 흥미롭게 그려진다. 하지만 등장인물들의 생몰이 신비롭게 그려지고 온갖 불가능한 일들이 너무 쉽게 가능하고 역사적 사건들에 개인의 삶의 반전과 맞물리고 캐릭터들의 개성이 단지 기질이 아니라 어떤 기행과 신비로운 능력으로 탈바꿈하는 데에 쉽게 적응이 안 되고 몰입도 안 되었다.
이사벨 아옌데는 <모든 삶이 기적이다>로 처음 만났다. 그녀의 자전적 기록인 이 책은 가벼운 에세이로 치부하기에는 너무나 진지하고 뭉클하고 아름다웠다. 작가의 삶을 채운 그 서사들의 다이나믹함도 놀라웠고 그렇게 자신의 삶을 형상화해낼 수 있는 재능도 놀라웠다. 소설가는 삶 자체도 소설적 진폭을 가지게 되나 보다. 사실 소설가의 소설을 읽어보지도 않고 덮어놓고 좋아하기로 마음먹을 정도였으니.
칭찬 일색인 가브리엘 마르케스의 <백년동안의 고독>도 나는 힘겹게 읽었다. 상상력이 빈곤해서 그런 것인지 감수성이 너무 무뎌져서 그런 것인지 그 공상과 현실의 경계를 마구 넘나드는 역동적인 흐름에 쉽게 빠져들 수가 없었다. 한번 그러기로 마음 먹으면 도저히 몰입도 안 되고 행간이 텅 비어 버리고 이야기의 연결은 툭툭 끊기기 시작한다. 말도 안 돼! 라고 생각하기 시작하면 이 남미의 마술적 리얼리즘은 끝이다. 세대의 경계를 허물고 꿈과 죽음, 영혼의 세계를 부유하는 등장인물들은 반드시 독자가 손을 내밀고 마음의 빗장을 열어야 자신들의 이야기들을 들려준다. 그런 면에서 나는 젬병이다. 어렸을 때에는 너무 공상에 빠져들어서 문제였는데 크고 나니 이제 그러한 공상에서 지나치게 발을 빼게 되어 재미가 없으니 아이러니하다.
뜬금없지만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를 두 번째로 보았다. 보려고 했던 게 아닌데 처음도 아닌데 메릴 스트립의 영화는 꼭 나를 붙든다. 그녀의 외모는 전형적이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 헐리우드에 넘치는 탱탱한 금발 미녀상은 아니다. 눈꺼풀이 처져도 배가 좀 나와도 그녀에게서는 그 흔적들이 억지로 위장되지 않는다. 과장된 제스처도 인위적인 어조도 아닌 자연스러움이 그녀의 연기를 하나의 재연으로 착각하게 만든다. 연기자들이 궁극적으로 도달하려는 곳에서 그녀는 처음부터 출발했고 그 고지를 자신의 앞에서 점점 더 밀어올리는 것 같다. 환갑이 훌쩍 넘어도 그녀는 계속 성장하고 성숙한다. 아, 나는 메릴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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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가 풍선처럼 부풀고 너그러운 알렉 볼드윈과 밀고 당기기를 하는, 수시로 돋보기를 껴야 하는 메릴 스트립을 만날 수 있는 영화다. 아주 진지한 영화는 아니지만 중년들의 로맨스가 이토록 달콤할 수 있다는 데에 나이 들어가는 게 좀 덜 서글퍼지는 영화이기도 하다. 스토리는 다소 비현실적이다. 성공한 이혼녀가 젊은 여자와 외도했던 전남편의 귀환을 결국 거부하고 새로운 사랑을 찾는 이야기. 집도 그녀가 운영하는 식당도 장성한 아이들 셋도 다 지나치게 고급이다. 그 속에서 벌어지는 에피소드들도 <섹스 앤 더 시티>의 중노년 버전 같기도 한 진부함들이 달달하다. 아, 이것은 취향의 문제다. 삶은,일상은 달달한 해피엔딩과는 먼 곳에 있는 것을 알아가는 게 나이들어 가는 것임을 배워가면서도 이런 퇴행이 가능하다는 환상 앞에서는 항상 무기력해진다. 메릴 스트립이어서가 아니라 단순하고 달콤한 것을 좋아하는 나의 취향 탓이다. 어쩌면 이사벨 아옌데의 허구보다 이러한 허구가 더 불가능한 곳에 있는 것인지도 모르는데 관객들은 속아 넘어간다. 저렇게 살 수도 있어, 삶은 아름다운 거야. 삶의 적나라한 잔인함과 비참함을 수긍하는 것보다 아름답게 살고 달달한 에피소드들을 만들어갈 수 있다는 착각에 우리는, 아니 나는 더 관대한 것 같다.
아무것도 알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들의 평온하고 정돈된 삶 한편으로 얼마나 끔찍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만방에 알여야 한다고 했다. 정상적인 삶을 꾸려 나가고 있다는 환상에 빠진 사람들과 자신들이 뗏목에 몸을 싣고 슬픔의 바다 위를 정처 없이 표류하고 있다는 것을 부인하는 사람들에게 그 참상을 알려야 한다고 했다. 행복에 겨운 그들의 세상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어두운 곳에는 방황하며 근근이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명백한 증거가 있는데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알려야 한다고 했다.
- 이사벨 아옌데 <영혼의 집2> 중
여전히 이사벨 아옌데도 좋고 메릴 스트립도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