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세술이나 어떤 방법론적인 얘기를 장황하게 늘어놓는 책과 석별한지 좀 됐다. 그러니까 그런 책들에 열광했던 시기도 있었다. 학창시절에는 공부 방법에 관련된 책들을(합격수기 참 많이도 읽었다), 아이를 낳고는 육아서를, 마음이 허할 때는 인간 관계나 삶의 의미를 찾아 헤매는 뜬구름을 잡으려다 엉뚱한 설교를 해대는 책들을 사 모았다. 그 책들이 다 무용지물이었다는 거짓말을 하고 싶지는 않다. 정말 힘들었을 때 그 엉뚱한 낙관론을 설파한 책은 나를 일으켜 세우기도 했다. 그러한 책들이 비교적 생명이 짧고 때로는 지극히 위선적이고 빈약하다고 해도, 이제는 더이상 나의 책꽂이에 꽂혀 있지 않다고 해도 그 시기에는 나름의 역할들을 했고 책에서 멀어지지 않게 하는 다리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그러한 책들에 눈길이 가지 않는다. 왜냐고 묻는다면 이제 절실하게 마음에 와닿지 않고 개개인의 상황을 도식화하고 정답을 눈앞에 들이미는 듯한 그 태도에 별로 솔깃하지 않게 된다는 게 답변이 될 것 같다. 살면 살수록 알 수 없는 것들 투성이고 그렇게 답을 내재하지 않은 질문들이 그득한 게 그 자체로 삶의 전부가 될 수도 있다는 어쭙잖은 생각도 해본다.

 

얼마 전 아는 동생이 혹시 정리법에 관련된 책이 있냐고 물어왔다. 작년에 유명 블로거가 쓴 책을 읽었던 게 기억이 나 그 책을 추천해줬지만 사실 실질적인 도움을 받았는 지에 대한 기억은 없었다. 여전히 청소는 스트레스고 서랍은 나를 시험에 들게 한다. 위안이라면 나보다 더한 옆지기가 모든 것을 관용으로 감싸준다는 사실 뿐. 대체적으로 정리정돈은 잘 된 상태에서 사람들을 맞게 되지만 그 과정이 더없이 피곤하고 체계도 없고 물건은 항상 없어지고 사야 할 것들은 끊임없이 튀어 나온다. 그러니까 정리, 수납에 관련된 노하우는 여전히 나를 매혹한다.

 

 

사실 정말 기대가 없었다. 뻔한 얘기겠거니 싶었고 손 안에 거의 일주일은 있었나 싶게 지지부진한 독서였다. 그럼에도 이 책을 강추한다. 수납에 관련된 책에 흔한 사진도 그림도 없이 그저 모든 것을 문자 텍스트로 설명하려니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수납 노하우를 기대했다면 좀 실망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책의 미덕은 '정리'와 그 정리의 대상이 되는 '물건'에 대한 감성적 접근이다. 이 책을 한 문장으로 축약한다면 "설레지 않는 물건은 버려라!"다. 물건을 하나 하나 만져보며 지금 당장 가슴이 뛰지 않는다면 그 물건과는 이별해야 하는 순간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적절한 처분은 그 물건에 대한 예우이기도 하다.

 

물건의 소유 방식이 삶의 가치관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무엇을 갖고 있느냐'는 '어떻게 사느냐'와 같다.
-p.227 

 

 물건을 통해 과거에 대한 집착이나 미래에 대한 불안과 마주하면 지금 자신에게 진짜 중요한 것이 보인다.

-p.229

아무리 정리에 대한 자잘한 노하우와 수납 도구들을 만드는 기막힌 방법을 제시한다고 해도 내가 막상 정리하고자 하는 욕구가 일지 않으면 그만이다. 그러한 면에서 이 책은 당장 옷장을 열고 서랍을 열고 버리기를 실행해 보고 싶게 하는 힘이 있는 것 같다. 가지고 있지 않으려 했던 이 책을 다시 가지고 싶게 만든 것도 이 책의 마력인 것 같다. 노하우를 설교하려는 듯한 외양 속에 의외의 보석을 숨겨둔 것 같아 다시금 가벼운 책에 대한 이유없는 거부감을 반성하게 되었다. 부작용이라면 끊임없이 '버려라'라는 환청 같은 강박이 생긴다는 것.

 

 

 

 

사실 이 책의 저자 노라 에프런이 누구인지도 몰랐다. 알고 보니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의 시나리오 작가이자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 <유브 갓 메일>, <줄리&줄리아>를 연출했단다. 게다가 두 번째 남편은(현재는 세 번째 남편과 살고 있다고) 워터 게이트 특종 기자 칼 번스타인이다.

 

 

나는 저널리즘의 가치를 믿었다. '진실'이라는 게 존재한다고 믿었다. <중략>

나는 기자와 결혼했는데, 그 결말이 좋지는 않았다. 나중에 또 기자랑 재혼했는데, 그 결말은 괜찮았다. 하지만 나는 지금 '진실'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사람들의 말은 늘 잘못 인용된다. 언론계는 음로론으로 가득 차 있다.

-p.48 

 

그녀는 당시 보기 드문 슈퍼우먼이었던 작가였던 어머니와 낭만주의자 아버지 밑에서 성장하여 대학 졸업 후 <뉴스위크>, <뉴욕 포스트>에서 일하게 된다. 헐리우드에서 로맨틴 코미디의 거장으로 거듭나기까지 그녀의 커리어와 삶은 더없이 역동적이고 유머러스하게 묘사된다. 이백 페이지도 안 되는 이 에세이집이 사랑스러운 이유다. 자신에게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늙었다"라는 냉소적인 고백 앞에서도 이 귀여운 할머니의 여담들은 빛을 잃지 않는다. 결코 무겁지도 아주 진지하지도 않은 책이지만 녹록지 않았던 자신의 직장 생활과 이혼, 속과 겉이 다른 유명인들에 대한 회고담, 언론에 대한 가감없는 비평, 죽은 친구의 추억에 대한 그리움들이 작고 가벼운 책에 중량감을 준다. 그녀 영화 속의 그 귀엽고 사랑스러운 캐릭터들이 결국 그녀의 성격, 인생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에서 나왔다는 게 참 다행스럽게 느껴진다. 철들면 버려야 할 환상 들에 대한 이야기라기보다는 철들며 버릴 수밖에 없었던 것들에 대한 애정어린 회고담이라고 보는 게 낫겠다. 여기에는 저널리즘의 진정성에 대한 신뢰도 포함된다. 서글픈 현실이다. 하지만 그녀가 버리지 않은 것은 삶에 대한 애착이다. 나는 궁금하다. 그녀가 죽음과는 어떻게 마주할지. 맛있는 것들을 참지 못하는 그녀가 마침내 그것들과 이별해야 하는 순간에 어떻게 근사한 작별을 고할지. 요새는 자꾸 삶의 교사를 만나고 싶어지는 게 또다시 약해지고 있나 보다. 이러한 책들과 재회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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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06-18 04: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야클님, 웬디님, 그리고 블랑카님의 의견들을 종합해 보면, 정리의 마법 저 책은, 내가 쳐박아 놓은 물건들이나 생활태도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하는 에세이 같은 분위기인듯 해요.

철들면 버려야 할 판타지에 대하여 (I remember nothing and other reflections), 저도 장바구니에 넣어두었는데... 땡스투 할 데가 생겼어요! ^^ 이 책 이전에 나온 노라 애프런 에세이 안보셨어요? 원제는 I feel bad about my neck 으로 책표지도 예쁜 에세이였는데 우리나라에 와서 표지도 제목도 진짜 엉망으로 나와버렸던... 내 인생은 로맨틱 코미디가 뭐냐구요...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2060181 (직접 확인하세요 흑흑)

다락방 2012-06-18 10:35   좋아요 0 | URL
저는 내 인생은 로맨틱 코메디 읽고 방출했었어요. 목주름 얘기말고는 딱히 재미있거나 기억에 남는 글이 없더라구요.

blanca 2012-06-18 22:08   좋아요 0 | URL
아, 읽어보지 못했어요! 목주름에 관련된 어떤 얘기를 했는지 궁금한데요? 이 책 읽으면 목주름 안 생기는 법이라도 알 수 있는건지요 ㅋㅋ 낮은 베개 베고 자는 습관 들였다 다 포기하고 푹신한 베개에 엎드려 자고 있거든요.^^

잘잘라 2012-06-26 10:16   좋아요 0 | URL
내 인생은 로맨틱 코미디, 표지! 우와우~~~~ 브론테님의 '흑흑'이 너무나 와닿습니다. 저도 흑흑ㅠㅠ

LAYLA 2012-06-17 2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책 호평이 많네요. 저 같은 애를 위한 책이에요. 사야겠어요.

blanca 2012-06-18 22:08   좋아요 0 | URL
정리, 수납에 관련된 책을 몇 번 읽었던 것 같은데 무언가 실행력을 불러 일으키는 데에는 이 책이 힘이 있는 것 같아요.

프레이야 2012-06-18 09: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리의마법, 호평이 많으네요.
저는 오래전 캐런 킹스턴의 '아무것도 못 버리는 사람'을 읽고 때로 들춰보고 잠시 실천도 하지만
금세 원점으로 돌아가 뒤엉키는, 뭐 그렇답니다.ㅎㅎ 버리고 버리고 또 버려도 자꾸 쌓이고 ㅎㅎ
블랑카님, 뭔가 제대로 못 버려서이겠지요, 제가요? ^^
감성적 접근, 공감되고 좋으네요. 또 한 주의 시작, 신명나게 보내자구요.^^

blanca 2012-06-18 22:09   좋아요 0 | URL
아무것도 못 버리는 사람 ㅋㅋ 저는 한번씩 버리기는 하는데 자꾸 서랍을 휘저어 놓게 돼요. 아우 요새 너무 너무 더워요, 프레이야님. 바다가 그리워집니다.

Jeanne_Hebuterne 2012-06-18 1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I feel bad about my neck에서 노라 애프런은 여자들의 가방, 주름, 옷 등에 대해 이야기해요. 흔한 모든 것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이렇게 주관적이어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아니 에르노와 아주 다르지요. 장르와 소재와 문체가 다르고 결정적으로 이 두 사람은 표정 주름이 다를 것이라는 생각을 했음에도, 이 두 여자들 처럼 나이드는 것은 부러웠습니다. 부럽다는 것은 아직 젊다는 것.

정리의 마법, 저도 얼마 전에 서점 구경을 하며 읽었어요. 그리고 50 리터짜리 쓰레기 봉투를 사와서 물건들을 버렸던 기억. 그 안에는 안입는 옷, 책, 장신구, 화장품, 가방 등이 들어갔어요. 구입할 때 미래의 어느 시점을 예약하는 일이라며 설레어 했던 순간들이 정리되었음으니 이제 다시 구입할 순간이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언젠가 친구가 그랬어요. 가짜를 버려야 진짜를 살 수 있다고. 가짜 명품 가방을 샀는데 가짜임에도 꽤 비쌌대요. 그걸 갖고 있는 내도록 진짜 명품 가방을 살 수가 없었다는 고백. 마침내 버리고서야 진짜 갖고 싶었던 가방을 살 수가 있었대요. 이런 일, 이런 생각들이 있어요.

blanca 2012-06-18 22:13   좋아요 0 | URL
아, 여자들의 가방, 주름, 옷에 관련된 책. 또다시 궁금해지는데요. 아니 에르노와는 정말 다르죠. 그런데도 무언가 독특한 시간의 매력을 선물받은 사람들이라는 공통점이 있는 것 같아요. 무겁지 않은 척 하지만 자못 진지한 사람 같기도 하고요. 가방에 관련된 얘기는 정말 와닿는 은유 같아요.

2012-06-18 16: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6-18 22: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카스피 2012-06-18 2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워낙 게을러서 이 책을 읽어도 아마 이 책 역시 박스안에 고이 간직해질것 같네요ㅜ.ㅜ

blanca 2012-06-19 21:58   좋아요 0 | URL
저도 천성이 나무늘보입니다.^^;; 그래서 되도록 정리해 놓은 그대로 흐트러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 저에게느 관건이랍니다.ㅋㅋ

잘잘라 2012-06-26 1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아직 실용서에 머물러 있지만, 그래도 노라 에프런 땡스투! 공감가는 글 잘 읽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blanca 2012-06-27 09:20   좋아요 0 | URL
저도 실용서 완전 좋아해요. 메리포핀스님. 메리포핀스님의 추천해 주신 요리책 도움 잘 받고 있답니다.^^

Jeanne_Hebuterne 2012-06-27 09: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

저의 핸드폰에 20초 전, 뉴욕 타임즈 알람으로 이런 메세지가 떴어요.

Nora Ephron, Filmmaker and Writer, Dies at 71.

블랑카 님이 떠올랐습니다.

blanca 2012-06-27 09:19   좋아요 0 | URL
아! 쥬드님................ 어떻게...눈물이 핑 돌아요. 알려 주셔서 고마워요....

2012-06-28 2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이 책을 노라 애프런이 썼다니 놀라워요. 근데 또 부고가 함께이니 더.. (사실 부고는 나비님 서재에서 먼저 접했지요.) 저는 노라 애프런을 <유브 갓 메일>로 기억하고 있어요. 아마 그녀는 그 영화의 여주인공처럼 사랑스럽고 즐겁게 살았을 것 같아요...

blanca 2012-06-29 10:36   좋아요 0 | URL
저도 놀랐어요. 지금도 이 책이 옆에 있는데 백혈병으로 갑자기. 슬프더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