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노빠다. 내가 그를 좋아하는 데에는 그 어떤 논리적인 근거도 없다. 그의 하회탈 같은 미소, 드라마틱한 인생 역정, 금방이라도 손을 내밀 것 같은 수더분한 느낌. 그것 때문에 그를 대통령으로 뽑았었다. 그의 가치관, 정치행보에 대하여 솔직히 제대로 알지 못했다. 

언론이 그를 쥐고 흔들기 시작했다. 심지어 진보진영에서도 그를 변호해 주지 않았다. 퇴임즈음, 퇴임 이후, 그는 형편없는 실패한 대통령으로 낙인 찍혔다.  

그의 죽음까지. 그에 대한 사랑 그 자체는 흔들리지 않았지만 그를 존경하고 신뢰하는 마음이 좀먹었다. 이유는 내가 무식했기 때문이다. 토요일. 그의 죽음은 꿈결처럼 들려왔다. 울면서 그를 다시 알아갔다. 그가 추구했던 가치들, 그 가치를 실현하기 위하여 내어 놓았던 각종 정책들, 마지막까지 꿈꾸었던 비전들.  

그는 우리를 꿈꾸게 했지만 그의 죽음과 이후 벌어진 상황들은 희망을 앗아갔다. 과연 정치라는 것이 세상을 바꿀 수 있나? 그 시도 자체가 무익하고 무용한 것이고 순진한 발상이 아닐까. 결국 인간은 자기 앞의 밥그릇 앞에서 대의를 걷어차도록 내몰리지 않는가?  

선택하지 않는 것도 선택이라고 자위하며 어제는 투표를 하지 않기로 마음 먹었었다. 기대가 유린당하는 과정은 학습된 무력감을 불러왔다. 그래, 안 할래.  

그 순간 문자가 왔다. 한창 아프고 힘들었을 때 그 아이는 나에게 밥을 먹게 해 주었던 아이다.
언니, 나도 세상을 바꾸는 일에 동참하고 싶어.  

그 문자는 졸던 나를 내리치는 죽비 같았다. 일부러 아이를 데리고 투표장에 갔다. 정치에 한 표를 행사하는 것이 대단하고 거룩하다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칸막이가 된 내밀한 공간에서 내가 오해로든, 이해로든 지지하는 사람에게 꾸욱 도장을 내리누를 수 있는 1분도 안 되는 시간을 위해 얼마나 많은 이들이 피를 흘렸던가,를 잊었었다. 기권은 선택이 아니다.  

투표장은 근처 중학교였다. 운동장에서 사내애들은 새된 소리를 지르며 몰려 다니고 있고 하늘은 더없이 새파랗게 몸을 떨고 있었다. 작은 도서실은 주민에게 개방되어 있었다. 큰 기대 없이 그 도서관에 들어갔다.  

아, 그 도서관은 숲 속에 숨어있다 느닷없이 튀어 나온 작은 과자집 같았다. 중년의 명랑한 사서는 아이 손을 잡고 이리저리 자신이 만든 지도를 따라 그 집을 안내했다. 아담하고 정겨운 분위기. 왜 진작 몰랐을까 안타까웠다. 아이 책을 대출하려 서니 사서는 아이를 곁으로 부른다. 몸소 책의 바코드를 스캔하는 영광을 아이에게 하사한다. 핑크빛 회원증을 목에 걸 수 있게 만들어 준다. 당신이 너무 부러워요. 라고 외치고 싶었다.  

어렸을 때 나는 책이 너무 고팠다. 읽고 싶은 책을 다 읽을 수 있는 날이 과연 올 것인가, 항상 의심했다. 돈을 의식했던 것도 아마 책과 관련된 결핍 때문이었던 것같다. 복지란 이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기본적인 욕구들에 바로 결핍과 돈이 떠오르지 않게 하는 것. 그 여백에는 꿈을 꿀 수 있게 하는 것. 그렇다면 정치는 유효하다. 무력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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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잘라 2011-10-27 1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권은 선택이 아니다. 기권은 선택이 아니다. 기권은 선택이 아니다..
메아리 칩니다. 너무 자주 기권,했던 접니다. 후회합니다.
이번엔 서울 시민 아니어서 기권,할 기회조차 없었지만요.^^;;

'중년의 명랑한 사서'를 만날 수 있어서 저도 싱긋- 웃어봅니다.
오늘 날씨 정말 화창합니다.^___^

blanca 2011-10-27 23:04   좋아요 0 | URL
메리포핀스님, 그 사서분이 눈에 밟혀요. 날잡아 또 가보려 합니다. 아이 책도 읽어 주셨는데 정말 저와 다른 시각에서 질문들을 던지면서 읽어 주시더라고요. 공부를 정말 많이 하시는 것 같더라고요. 오늘 날씨 너무 아까워서 밖에 계속 있고 싶었어요...가는 가을의 날들이 아쉽기만 합니다.

saint236 2011-10-27 1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기권도 선택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가장 비겁하고 가장 대가가 비싼 선택이지요.

blanca 2011-10-27 23:05   좋아요 0 | URL
그런 선택을 하려고 하던 찰나에 문자 하나가 저를 투표장으로 향하게 했습니다. 다행이지요.

마녀고양이 2011-10-27 1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서 투표하셨어요,
어제 하루 흥미진진했죠... 머, 나름 기쁘기도 하고 걱정스럽기도 하고.

아우, 책과 관련된 결핍, 어제 주문한 어마어마한 양의 책이 갑자기 떠오릅니다, 언제 다 읽을까요? 미쳐.

blanca 2011-10-27 23:06   좋아요 0 | URL
마녀고양이님, 저도 지금 책이 잔뜩 밀려 있어요. 보기만 해도 한숨이. 일단 앤을 다 읽어야 하는데 스티브 잡스 전기도 넘 보고 싶은데 천 페이지라면서요? 임꺽정도 보고 싶고. 무슨 숙제처럼 일단 있는 것 다 떨고 욕심 내보려고 합니다.

비로그인 2011-10-27 2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년에도 소중한 선택을 할 수 있기를, 저 자신에게 바라야겠어요.
내리치는 죽비에 번쩍 정신이 든 블랑카님, 책에 대한 허기는 늘 채워지지가 않죠? ^^;;

오늘은 신간 평가단에서 두 권의 책이 날아왔는데 아주 만족스럽고 충만한 느낌이 드네요.
이것도 금세 허기로 변하겠지만요 ㅎㅎ

blanca 2011-10-29 22:31   좋아요 0 | URL
그럼요. 아마 죽을 때까정 '나는 아직 배고프다' 이러고 있을 것 같아요. 그런데 또 이상한 것이 읽을 책이 주르륵 놓여 있으면 행복한 게 아니고 스트레스를 받아요. 참, 알 수 없는 애증의 관계입니다.

노이에자이트 2011-10-30 17: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노무현 님이 퇴임하고 나서 현 정부 집권 초기엔 인기가 많았죠.그때 방송에서 김해 고향에 관광객들이 몰려들고 즉석연설하는 노무현 님을 방영해주고...대단한 인기였죠.그러다 1년이 안 되어 저세상으로 가버릴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특히 2009년 3월부터 박연차 사건으로 모든 언론에서 물어뜯을 때 그 마을 사람들이 그 어떤 언론사도 다 싫다고 격앙된 반응을 보였던 것이 기억납니다.

blanca 2011-10-30 22:23   좋아요 0 | URL
언론이 양날의 칼인 것 같아요.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떤 경우에도 진실을 외면하면 안 되는 것인데 이제는 언론에서 얘기하는 반대로 자꾸 받아들이면 되겠구나, 하는 체념이 생겨 서글픕니다.

sjoome 2011-11-29 2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나 언니 일기의 조연된거야?
우하하~~ 기뻐기뻐~~ 정말 기뻐!~
자꾸 언니랑 얘기하면 언니 일기의 주연도 시켜줄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