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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셀 베이커 자서전 : 성장
러셀 베이커 지음, 송제훈 옮김 / 연암서가 / 2010년 10월
평점 :
처음에 읽으려 했던 책은 버트란드 러셀의 자서전이었다. 나이 아흔에도 핵 반대 시위를 하다 투옥되는 모습은 그가 삶으로 치열하게 자신의 철학들을 형상화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의 훌륭함과 저서의 가독성은 적어도 나에게는 정비례관계가 아니었다. 어쩌면 나는 아직도 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나 보다.
그가 고백하는 방대한 자신의 삶에는 분명 호기심과 경외의 감정이 일겠지만 어마어마하다면 어마어마한 분량과 지루할지도 모를 지엽적인 사실들에 미리 겁먹어 망설이다 엉뚱하게도 러셀 베이커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리고 이 러셀 역시 자신의 삶을 서사화했고 그 결과로 퓰리처상을 수상했다는 흥미로운 사실도 함께. 오십 대 중반에 뒤돌아 본 자신의 삶의 축약본에 <성장>이라는 미묘하고 뭉클한 표제를 붙인 것에도 이끌렸다. 자, 나는 원래 버트란드 러셀의 자서전을 읽으려다 삼천포로 빠져 러셀 베이커라는 미국의 저명한 언론인의 또다른 삶의 복기에 슬며시 발을 들여놓게 된 것이다. 그리고 처음에는 한 발만 걸쳐 놓았다가 온 몸을 다 풍덩 빠트리고 말게 되었다. 그건 하나의 고백이 아니라 나의 할아버지, 나의 아버지, 나의 어머니, 나를 다시 기억해 내는 일과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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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든의 연세로 어머니의 적적함은 끝이 났다. 그해 가을 이후로 어머니의 정신은 시간을 자유로이 넘나드는 여행을 시작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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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러셀은 입을 뗀다. '나'의 태어남에서 나의 삶은 이야기가 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세상에 던져 놓은 어미의 노쇠와 망각의 늪으로부터 나의 삶은 거슬러 올라간다. '삶'은 언제나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거슬러 올라가 기억으로 중량감을 부여받는다. 어쩌면 러셀은 우리보다 더 일찍 삶을 깨달았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나'의 죽음 앞에서 '나'의 '삶'을 드디어 이야기하고 싶어질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우리 모두는 과거에서 왔다는 얘기, 인생이란 결코 기저귀에서 수의를 입기까지의 한 뼘의 여정으로 한정될 수 없다,는 러셀의 얘기는 이야기 전체를 뒤덮고 있는 기본 논조다. 과거의 얘기. 그리고 그 거슬러 올라가는 물길에서 떠내려간 소중한 것들에 대한 눈물겨운 애도. 이 자서전은 한 편의 성장소설과도 같다.
러셀의 삶은 어머니의 부름에 대한 응답과도 같았다. 대학을 중퇴한 전직교사인 어머니는 일찍 남편과 사별하고 아이들을 부양해야 하는 고단한 삶 속에서 역시나 장남에게 엄청난 기대와 열정을 쏟아 붓게 된다. 그 열정은 러셀에게 고문과도 같았다. 그의 삶은 프랑스의 국민작가 로맹가리처럼 어머니의 미래와도 같았다. 고작 여덟 살에 <새터데이 이브닝 포스트>를 팔러 길거리를 헤매며 다니는 모습은 꼭 물질적 결핍을 보여준다기 보다는 아들을 단련시키고 싶어했던 어머니의 과도한 욕심의 한 사례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유년이 비참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구석도 많았다. 양가 삼촌들의 따뜻한 사랑들과 아름다운 전원 풍경 속에서 가스도, 수도관도 , 냉장고도, 라디오도 없었던 시대만의 행복감을 충만하게 누리는 나날들이었다. 심지어 대공황기에도 개개인의 삶은 불행하다기보다는 나름대로의 소소한 즐거움과 내일에 대한 희망으로 생동했음을 증언하고 있다. 러셀 베이커의 과거는 시대적, 역사적 비극의 테두리 안에서도 개인의 삶이 어떻게 끈질긴 생명력을 가지고 꽃으로 피어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러나 이것은 반면교사의 예로 자신의 삶을 내어주는 희생으로도 활용된다. 히로시마에 원폭이 투여되었던 나날들. 러셀은 종전이 자신의 참전을 방해한 것에 실망한다. 그는 충분히 젊었고 젊음은 무모한 혈기의 과시와 멀어질 수 없었다. 당시 러셀과 어머니가 주고받은 편지들은 참회의 대상이 되고 만다. 짓이겨지는 무고한 생명들 앞에서 그들은 소소한 자신들의 일상사들만을 얘기한다. 대대장의 사열을 땡땡이치고 있다, 공원에서 소프트볼 경기가 있었다, 같은 그의 편지들은 당시 그 자신을 포함한 모두가 무의식적으로 원폭 투하를 공모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고 뼈아프게 고백한다. 의도가 어떻게 되었든 생명의 대량 말살을 초래한 잔혹한 행위 속에서 개개의 삶에만 집중했던 것은 '하나의 범죄'였다고 얘기하는 저자 앞에서 어찌 가슴으로 그의 얘기를 듣지 않을 수 있을까? 그의 삶의 고백은 겸허하고 진솔했다. 그리고 여기에서 두 러셀은 만난다. 버트란드 러셀과 러셀 베이커. '나'의 삶이 단지 나만의 것이 아닌 더 큰 것의 일부분이라는 인식 앞에서 겸허하게 타인의 고통과 타인의 삶을 존중하고 좋은 것들의 가치를 주장하는 것은 지적 오만과 허영이 아니라 하나의 의무라는 것을 보여 준 두 거인의 얘기는 언제나 유효한 전언이다.
마지막 장은 다시 더 나아간 현재이다. 망각으로 출발했던 어머니는 이제 그것조차 제대로 할 기력이 없이 잠만 자게 된다. 요만하게 어렸던 소년 러셀을 찾아 헤맸던 어머니는 아예 아들 이름 러셀조차 잃어 버린다. 여장부 같이 씩씩하고 도도했던 그래서 세상의 모든 몹쓸 것들에서 자식을 사수할 수 있었던 그 어머니는 이제 몸도 영혼도 다 자신이 품었던 아이들처럼 쪼그라들었다. 러셀의 성장은 어머니의 망각에서 출발하여 어머니의 '잠'으로 끝난다. 어쩌면 러셀이 얘기하고 싶었던 우리의 삶도 그런 걸까. 마지막 장을 덮고 바람 한 옴큼이 갑자기 가슴 속을 휙 비집고 들어왔다 나갔다. 삶이란, 인간이란, 어쩌면 이다지도 아름답기도 하고 추하기도 하고 결국 허무한 것일까, 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