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 불빛의 서점 - 서점에서 인생의 모든 것을 배운 한 남자의 이야기
루이스 버즈비 지음, 정신아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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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저녁 무렵 노랗게 물든 서점을 그려봐야겠다고, 
나는 여전히 생각하고 있다.
어둠속 영롱한 빛 같은 풍경을.
-빈센트 반 고흐 

 

그래서 고흐는 결국 그렸을까? 노랗게 물든 서점을? 

시험이 끝나면 시내 대형서점에 가서 이만 원 정도의 예산에 맞춰 책을 네 권 정도 골라 품에 안고 한창 머리가 빠지고 있는 아빠와 소박한 외식을 하고 귀가하곤 했다. 그리고 읽고 싶은 책을 모조리 다 살 수 있을 만큼 부자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던 기억이 언젠가 우연히 재회한 고등학교 동창의 꿈이 ㄱ문고 사장 아들과 결혼하는 거였다는 고백과 맞물려 다시 떠올랐다.  

사실 행복하지 않아서 책에 흠뻑 빠졌고 그랬기에 후의 삶은 조금 더 평탄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내가 유년시절 정말 행복했다면, 충만했다면, 나는 지금 이렇게 여기에 와서 이런 글을 쓰지 않았을 것 같다. 울고 싶을 때마다 엄마 젖대신 책을 찾았다. 그러니 서점은 수유의 공간과도 같을 수밖에. 

이 책의 저자는 물론 당연히 탐서가이고 지극히 평범하고 그럼에도 자기 이름으로 낸 책이 몇 권 있고 서점에서도, 출판사 외판원으로도 일한 경력이 있다. 지극히 개인적인 책사랑에 대한 얘기가 책과 서점의 역사와 아름답게 교차하는 구성이 참 싱그럽다. 지나치게 개인적이거나 은밀하지도 않고 '척'하지도 않으면서 자신의 얘기와 대상의 얘기를 풀어내는 입담에 절로 끌려들어가게 된다.  

서점에서 함께 일했던 동료 여직원과 아직도 일주일에 한두 번씩은 통화하며 "당신, 그 책 읽었어?"라고 호들갑 어린 목소리를 듣는다는 고백과 파리 센 강 좌안 고색창연한 <셰익스피어 앤드 컴퍼니> 서점의 역사를 함께 듣는 일은 드물고 근사한 경험이다.  제임스 조이스가 이 서점의 젊은 여주인 실비아 비치 덕분에 외설 시비에 휘말린 <율리시즈>를 출판 배본할 수 있었다는 얘기와 22년 넘게 수많은 예술가들의 아지트가 되어 주었던 그곳이 독일군들의 파리 점령으로 폐점하게 되는 사연. 저자가 열다섯 살에 존 스타인백의 <분노의 포도>를 만나 6개월 안에 전작주의를 실현하게 된 열정적인 독서 편력 들을 듣다 보면 어느새 노란 불빛의 서점 안에 들어서 맘씨 좋은 서점 주인의 배려하에 온몸의 긴장이 풀리며 노곤해진다. 행복한 나른함. 참 오랜만이다.

집에서 가져온 재즈 음반들을 들으며 커피를 마시며 책 주문서를 작성하고 서점 문을 닫고는 닐 영, 스탄 게츠의 음반을 틀어놓고 악을 쓰며 청소를 하고 30년 후에도 변함없이 감동을 줄 책들을 권해받는 풍경은 눈물나도롭 부럽고 행복해 보인다. 과거로 정지해 버린 기억의 영상들을 다시 이어 재생하며 사람들이 서점과 종이 책을 지금보다 조금더 존중했던, 하지만 그래도 역시 어느 정도는 초라한 책을 둘러싼 풍경은 한없는 그리움을 불러일으킨다. 우리는 책을 돌려 읽었고 저마다 가슴에 품은 대목들을 서로 교환했다. 초록색 교복에 검정색 스타킹을 신고 근처 남고생들한테 똥파리라는 별명으로 불리웠던 우리는 이제 다시 만나 책 얘기를 하지 않는다. 그리고 다시 우리였던 나이의 지금 아이들은 책상 위에 돌려 읽는 책대신 스마트 폰을 올려 놓고 끊임없이 짦은 단문으로 얘기할 수 있는 거리들을 터치한다. 무언가 얘기하고 싶은데 얘기할 거리가 없어도 단문 메시지는 부끄러움을 숨기고 '나'와 '너'와 '그것'이 만났다는 환각의 지점에 도착한다.  

노란 불빛의 서점이 셔터를 내리는 날. 종이책이 지상에서 사라지는 날. 그건 삶의 종언보다 더 가혹한 심판의 날이 될 것이다. 언어로 그려지는 '너'의 얘기들을 이제 더이상 들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은 '사랑'을 포기하는 일과도 같은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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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1-03-18 1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알라딘 중고 서점에서 이 책 봤는데, 망설이다가 안 샀는데, 살걸....... 흑.

울고 싶을 때마다 책을 찾았다고 하니 생각나는데,
제가 요즘 <브레인맨 천국을 찾다> 라고 자폐증이 있는 사람의 글을 읽고 있거든요.
그런데........ 제가 좀 그런가봐요. ㅠㅠ. 블랑카님두? 큭큭.

blanca 2011-03-18 21:45   좋아요 0 | URL
마고님 저는 반값세일에서^^;; 그런데 지금도 하고 있지 않을까요? 책에 대한 강박이 있는 것 같아요.그럴 지도 몰라요 ㅋㅋㅋ

비로그인 2011-03-18 1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페이퍼를 읽으니 예전에 동네서점에서 책을 사던 때가 떠오르네요. 찾는 책이 없으면 서점 주인에게 따로 구입해달라고 부탁하곤 했었죠. 삐삐도 핸드폰도 없던 시절이라 이삼일 뒤 산책한다는 핑계로 저녁 밥 먹고 터덜터덜 걸어나오면 주인이 따로 챙겨놓은 책을 무슨 비결서인 양 꺼내주곤 했었는데요 ㅋㅋ 제임스 미치너의 <소설>을 아마 그렇게 샀죠^^

blanca 2011-03-18 21:47   좋아요 0 | URL
후와님, 제임스 미치너 <소설> 제가 기억하고 있는(읽어야 겠다고) 책인데 이 댓글로 다시 장바구니로 넣어 둡니다.^^ 말씀 들으니 레코드점도 그렇고 서점도 그렇고 그렇게 주인들이랑 친분을 쌓아 두었던 과거가 참 그리워지네요.

cyrus 2011-03-18 14: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고보니 동네 서점이나 ㄱ문고에 안 가본지 꽤 오래 됐네요. 알라딘을 자주 애용하다보니
정작 오프라인 서점을 자주 갈 일이 없는거 같아요.

blanca 2011-03-18 21:49   좋아요 0 | URL
cyrus님 여기는 대학가인데도 대부분의 작은 서점이 폐업했어요. 이젠 대형서점들만 살아남는 추세인데 그마저도 가보면 사람들이 많지 않음을 느낍니다. 지하철을 타도 다 스마트폰만 들여다 보고. 책을 좋아했던 친구들도 요새는 책을 읽지 않더라구요. 괜시리 참 서글퍼져요. 저도 알라딘에서 살게 된 이후로 오프에서는 구경만 자꾸 하게 되더라구요^^

양철나무꾼 2011-03-19 0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웅~ㅠ.ㅠ
그러고보니 저도 시내 대형서점 안 나간지가 꽤 됐네요.
동네 서점은 아직도 가끔 들리지만요.
예전엔 동네서점에 가면 철지난 잡지부록도 챙겨놨나 주시고 그랬었는데 말이죠.
새로운 음반이 나오면 전화해 주던 음반 가게도 이젠 온라인쇼핑몰로 돌려버렸더라구요.

책과 스마트폰이 혼재하는 시대, 아이들은 혼란을 겪고 있겠죠.
그 아이들을 종이책으로 인도하는 것, 그 아이들이 종이책을 선택하는 것...우리의 전철을 따르겠죠~^^

blanca 2011-03-19 20:39   좋아요 0 | URL
양철댁님, 저는 요새 아이들이 너무 어렸을 때부터 영상물와 각종 전자기기에 노출되어 활자 텍스트를 거부하는 사태가 오지 않을까, 제대로 뇌발달은 이루어지나, 이런 의문이 들어요. 실제 걸음마도 못하는 아가들이 핸드폰을 손에 쥐고 무언가를 열심히 들여다 보는 풍경이 일상이 되어 버렸으니까요. 종이책이 다시 각광받는 시대가 왔으면 좋겠어요...

비로그인 2011-03-20 2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하나를 만들기 위해 이가 여섯 개나 빠졌다는, 스스로 주어와 동사만으로 문장을 채워 글을 만들어 보라는 혹독한 주문의 어떤 작가의 목소리가 생각납니다.

가끔 서점에 가면 요즘 시대와 점점 닮아 번쩍이고, 화사하기만 한 책들이 점점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더라고요. 저런 노력과 주문이 담긴 책들은 점점 구석으로 몰려 가는 것 같아 아쉬운 밤입니다.

blanca 2011-03-20 23:03   좋아요 0 | URL
우아, 바람결님 정말 오래간만이에요. 요새 왜이리 뜸하신 거예요? 저는 서점을 너무 좋아해서 그냥 대형서점에 가만히 서있기만 해도 스트레스가 스르르 다 풀려 버려요. 아아. 그 이가 빠졌다는 작가는 아마 김훈이지 않을까, 추측해 봅니다. 요즘은 참 이래저래 슬픈 시대인 것 같아요.

노이에자이트 2011-03-20 2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초록빛 나는 똥파리 말이군요.음...귀여운 디자인이었을 것 같은데요...

blanca 2011-03-21 21:06   좋아요 0 | URL
노자님 초록색 치마에 검은색 타이즈 신고 다니니 남고생들이 계속 놀려댔었죠 ㅋㅋ 교복 이쁘다고 소문이 많이 난 학교였기는 했어요. 교복만 이뻤죠--;;

2011-03-22 17: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3-21 14: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3-21 21: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감은빛 2011-03-22 0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을 너무 좋아해서, 도서관과 서점에 있는 것만으로 정말 행복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동네서점에도 무슨 말인지도 모르면서 시집을 뒤적거리거나,
몇 시간씩 서서 소설집에 수록된 단편 몇 편을 다 읽어버리기도 했죠.
이 글 읽으니, 꼭 그 작은 동네서점으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 들어요!
잘 읽었습니다! ^^

blanca 2011-03-22 21:33   좋아요 0 | URL
감은빛님, 정말 서점에서 책 읽는 재미도 참 쏠쏠했지요. 저는 너무 오랫동안 책을 골라 뒤통수가 좀 따가웠던 적도 있었어요^^;; 그런 면에서 대형문고는 저한테는 정말 마법의 공간 같은 곳이었어요. 아무리 오랫동안 영양가 없이 서성거려도 뭐라 그러는 이도 없고. 감은빛님 댓글을 읽다 보니 갑자기 서점으로 막 뛰어가고 싶어지는 걸요.

2011-03-29 23: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3-30 23:13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