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서 아름다운 것들은 나의 기갈에 물 한 모금 주지 않았다. 그것들은 세계의 불가해한 운명처럼 나를 배반했다. 그러므로 나는 가장 빈곤한 한 줌의 언어로 그 운명에 맞선다. 나는 백전백패할 것이다.

-김훈 <자전거 여행> 책 머리에 중


 


백전백패할 것을 알고 또 만인앞에 공표하고 그럼에도 한 줌의 언어로 그 운명에 맞설 것을 약속한 사람을 쉽게 저버릴 수 없음을 나는 안다. 삶이 치사하고 남루하고 던적스러움을 눈물을 흘리며 응시함에도 결국 남은 시간 사랑과 희망을 얘기하고 싶어하는 초로의 사내는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의 형해이다. 결국 그렇게 될 것을 알기 때문에 그의 언어들은 읽는 이를 무장해제 시키고 만다.

생명은 결국 긍정이다. 실존적 고통은 무한한 낙관주의와 긍정을 저버리지 못하기 때문에 헤어나올 수가 없다. 지금 아프지만 우리는 또 노래하고 꿈꾼다. 김훈은 그걸 고약하게도 너무 잘 안다. 건조하고 예리한 그의 단문들에 자꾸 쓸리우는 듯한 환각은 무언가를 너무 적나라하게 들키고 만 것 같은 낭패감 때문일런지도 모른다. 긴박하고 박진감 넘치는 서사가 썰물처럼 쓸려 나가고 해안가에 남은 그의 연필 자국들은 내가 이미 밟아 놓은 흔적과 앞으로 밟고 지나가게 될 삶 그 자체다. 사실 우리 삶이 뭐 그리 드라마틱하겠는가. 누군가가 나의 삶을 기록하게 된다면 어쩌면 날카로운 회한과 망상과 소망의 어휘 몇 묶음이 고작일런지도 모른다. 우리가 자꾸 이야기를 찾아 읽고 서사에 집착하는 것도 결국 그게 아닌 것임을 알기 때문인 것 같다. 삶이 드라마틱한 여정과 정교한 플롯으로 채워질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다. 삶은 생각보다 지루하고 비상식적이고 아귀가 맞지 않는다. 그 결을 쓰다듬으며 부조리와 모순을 하나 하나의 언어로 차례차례 걷어내다 보면 그것은 하나의 이야기라기보다는 체념을 위한 설득의 얘기에 가까워진다. 여기에 반하는 행위는 도발적이고 매혹적이다. 그게 문학이고 예술이다.


<내 젊은날의 숲>에서는 유독 서사가 휘하다. 민통선 안 국립 수목원 전속 세밀화가인 ‘나’는 언뜻 김훈 그 자신을 연상시키듯 주변을 냉연하고 관조적으로 읊조린다. 말단 공무원으로 뇌물을 공공연하게 받아 상사에게 상납하다 구속된 아버지가 서서히 시들어 가는 모습과 자폐아 아들을 둔 싱글파더 수목원 연구실장이 꽃이 제 색깔을 내는 그 필연성을 설명하고자 그 무위의 시도를 계속하는 모습이 이제 곧 사회로 첫발을 내디딜 학군단 장교의 모습과 서로 교차하고 비껴가는 모습이 나를 통과하여 펼쳐진다. 세상으로부터 겉돌고 헤매는 자들의 메마름, 황폐함을 얘기하는 것은 ‘내’가 도저히 종이 위해 온전하게 옮겨 놓을 수 없는 개별적 생명의 현재성을 지난하게 찾아 헤매는 일과도 같다. ‘나’는 끊임없이 한계를 확인하고 그것에 쓸리우며 멀고 무관한 삼인칭인 ‘그’를 내 눈앞의 이인칭인 ‘너’로 바꾸어 놓고자 한다.

복수초의 노란 꽃 안에서도 오십 년 전 ‘아’와 ‘피아’의 구별이 무너졌던 전장에서 죽어가며 상추쌈을 그리워했던 학군단의 백골 위에서도 안실장의 자폐증 아들의 빛이 내리는 머리 가마 위에서도 울리는 ‘쟁쟁쟁’ 소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손 안에 움켜쥐고 싶은 사랑과 희망에 대한 가능성의 울림이다. 그 ‘쟁쟁쟁’ 소리는 도저히 화폭에 옮겨 담을 수도 언어로 형상화할 수도 없지만 삶의 골조이자 생의 동인이다. 모든 불가능한 것들을 소망하게 되는 발원지이자 아름다운 것들을 꿈꾸게 되는 몹쓸 환각 지대다.

작가는 육십이 넘어 그 환각 지대에 발을 담궜다. 언어로 도저히 가둘 수 없는 것들이기에 그것들은 더 아름답다. 우리의 인식의 한계의 지평 저너머에 옹크리고 있는 그것들이 결국 우리 삶 그 자체를 지배한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말은 전 우주를 다 채우고도 모자랄 만한 것임에 분명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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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10-11-22 2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훈 진짜 멋지네요.. 라고 하면 안 되고, 블랑카님 페이퍼 댓글이 이모양이라 죄송하지만, 존나 멋있네. 라고 해줘야 할 것 같아요. ㅎ

blanca 2010-11-23 22:36   좋아요 0 | URL
하이드님, ㅋㅋㅋ 저 그 용어 좋아라 합니다. 이런 댓글이 더 좋은데요 ㅎㅎ

굿바이 2010-11-23 1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배교자는 오늘도 웁니다 ㅜ.ㅜ

blanca 2010-11-23 22:52   좋아요 0 | URL
굿바이님의 배교는 어떤 것에 대한 것일까요? 힌트좀 주셔요...혹 김훈 작가일까요?

2010-11-23 12: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1-23 22: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poptrash 2010-11-23 15: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다면 저는 백일전백일패... 쿨럭

blanca 2010-11-23 22:54   좋아요 0 | URL
poptrash님, 저도 쿨럭. 저는 백전은커녕 한 십전하면 나가떨어질 깜냥입니다.

비로그인 2010-11-23 19: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면서도 가는 길이 있습니다. 이미 뻔히 알고 있는데, 그 길로 가야만 하는 경우.

blanca 2010-11-23 22:55   좋아요 0 | URL
쥬드님...그런데 그건 머리로 알고 가슴을 따르는 일일까요? 아니면 가슴으로 고통스러워하며 머리를 따르는 일일까요....그 앎이 의외의 해피엔딩으로 막이 내리기를 바랍니다...

2010-11-23 21: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1-23 22: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10-11-24 07: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오랫동안 음미하고 갑니다^^

blanca 2010-11-24 22:34   좋아요 0 | URL
후와님 좋은 글이라고 하시니 진심으로 부끄럽네요...의욕만 앞서지 항상 너무 모자라요...

cyrus 2010-11-24 14: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여유만 있다면 자전거 여행을 해보고 싶네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blanca 2010-11-24 22:35   좋아요 0 | URL
저도 그런 생각했었어요...자전거에 몸을 싣고 몸전체로 대지 위를 굴러가고 호흡하고 싶은 소망. 하지만 저는 자전거 안장에 앉기만 하면 바로 앞으로 고꾸라진답니다. 겁이 너무 많아서 자전거를 배우지 못했어요. 언젠가는 또다시 도전해서 신나게 가로수길을 달리는 꿈을 가져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