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리 채플린, 나의 자서전
찰리 채플린 지음, 류현 옮김 / 김영사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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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천적으로든 후천적인 노력에서라고 주장하든 선택받은 소수의 얘기는 언제나 그 자체로 흥미진진한 서사가 된다. 우리는 그럴 법한 얘기보다는 그랬던 얘기에 허풍을 곁들였을 때 흔히 더 귀를 기울이게 된다. 이미 완결된 얘기의 내밀한 속내를 들추어 내는 그 은밀한 즐거움과 누군가의 삶을 편하게 앉아 조망하고 판단하는 그 권력의 맛은 평전과 자서전의 식지 않는 인기의 한 대목을 설명해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찰리 채플린의 자서전은 사실 모든 흥행 요소를 골고루 갖추고 있다. 배우였던 부모님, 처절할 정도의 빈곤했던 유년시절, 그리고 희극배우로서 무성영화시대의 아이콘으로까지 부상한 드라마틱한 성공의 여정, 네 번의 결혼, 공산주의자로 몰려 끝내 할리우드에서 추방되다시피한 이력 등이 그러하다. 그런데 이러한 기막힌 삶의 굴곡들이 그의 입에서 더없이 무감하고 건조하게 뚜욱뚝 단속적으로 끊어져 나온다. 그 어떤 과장도 해명도 덧댐도 없이 그저 있었던 사실들을 성실하게 나열하고 갑자기 다른 기억으로 넘어가는 식이다. 이런 정직한 면면이 사실 이 자서전의 한계점이기도 하고 매력이기도 하다. 융이 살아 생전에 출판되면 자신의 삶에 대해 객관적인 태도를 견지하는 자서전이 나올 수 없다고 했던 얘기가 사실 찰리 앞에서는 조금 김 빠지는 얘기가 되기도 한다. 투박하고 정직하고 꾸밈없는 자서전은 낯선 만큼 독특한 이끌림을 가지고 있다.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산 지 40년이 넘었지만 지금까지도 다 못 읽었고 가끔 꺼내 펼쳐보지만 이내 덮게 된다는 고백을 우리는 쉽게 친구에게 할 수는 있지만 자서전을 쓸 위치가 되어 자신의 삶을 윤색하고 싶은 욕망을 누르고 솔직하게 얘기하게 되긴 쉽지 않다. 찰리 채플린의 이런 고백들은 군데군데 불쑥불쑥 튀어 나와 듣는 이를 난감하게도 하고 또 안도하게도 한다. 이 자서전은 위대한 사람의 자화자찬이 아니라 희극영화를 미치듯이 사랑했던 영화인의 솔직담백한 자신의 삶에 대한 회고담에 더 가깝다. 뭉툭한 그 끝이 예리하지 않아 싫기도 하고 좋기도 한 셈이다. 

그가 정치적인 배우로 인식되다시피 한 것도 그가 구태여 정치 현장에 대한 심오한 의식과 강렬한 투쟁 의지를 가졌기에 비롯된 것이 아니라 결과론적인 우연에 더욱 가깝다. 사실 스스로가 영국인으로서의 긍지 같은 것도 갖고 있지 않고 애국심이라는 것 자체도 없다고 고백하고 있다. 단지 그는 전체주의에 대한 당연한 알레르기를 솔직하게 고백했을 뿐이다. 그러나 단순하고 당연한 모습이 쉽게 용인되는 사회는 언제나 조금씩 먼 발치로 밀려 나가기 마련이라 그의 이런 모습은 수시로 비판과 비난의 대상이 된다. 전체주의를 거부하는 것이 바로 공산주의에의 동조로 치부되는 그 뻔하고 치졸한 색깔입히기는 그 시대에도 횡행했다. 어느 순간 그는 갑자기 정치적인 배우가 되어 있었다. 

헐리우드에서 영국 국적을 가지고 어마어마한 성공을 거두는 모습은 그 시절에도 끊임없이 안티를 양산했나 보다. 결국 찰리 채플린은 미국을 부랴부랴 떠나 스위스에서 여생을 보낼 수밖에 없게 된다. 스무 살이 넘게 차이나는 유진 오닐의 딸 우나와 재혼하여 다복한 가정을 이루어 안정되고 행복한 노년을 보내게 되는 그의 모습으로 자서전은 대미를 장식한다. 찰리 채플린이 할리우드에서 추방되어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고만 생각했던 사람들의 선입견과는 다른 모습이다. 그가 행복하다고 되뇌는 대목도 사실 그가 희극배우로서 눈부신 성공을 구가했던 나날들이 아니라 바로 이 대목이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삶의 궤적들을 되짚어 오면서 결국 '사랑'을 얘기한다. 칼 융이 하나의 화두처럼 희미하게 던지고 간 바로 그 사랑이 이 위대한 영화인의 목소리로 다시 재생되는 묘한 우연의 일치가 신기했다. 자신의 인생은 하나의 투쟁이었다고 평가하며 그 인생에서 가장 큰 행운은 바로 다름 아닌 자신의 아내를 만난 것이라고 고백한다.  

구질구질한 다락방을 벗어나기 위해 친구집에 놀러갔다 돌아온 소년에게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따뜻한 점심밥 대신 "너의 엄마 미쳤대!"라는 말이었다. 영양실조로 반쯤 정신이 나가 집집마다 문을 두드리며 연탄재를 나눠준 엄마 앞에서 울먹이던 아이는 그럼에도 삶의 황혼기에 서서 인생의 아름다운 의미와 사랑을 얘기하게 되었다. 그래서 삶은 살아볼 만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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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딧불이 2010-10-27 2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를 보면 재미있을 것 같은데 별이 세개인 것을 보니 그 재미가 채플린의 재미가 아니라 블랑카님의 글맛 때문인가봅니다?

blanca 2010-10-28 21:01   좋아요 0 | URL
반딧불이님, 제가 요새 책에 집중이 좀 안되어서 제대로 못 읽어서 그런 것일 수도 있어요. 자꾸 각종 사념이 들어서, 큰일입니다.

2010-10-28 10: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0-28 21: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ella.K 2010-10-28 1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별점이 세 개 밖에 안 되네요.
오래 전에 그의 전기 영화를 본적이 있는데,
전기 영화는 잘 만들어 봤자 본전치기라고는 하지만
전 그 영화 나름 재밌게 봤어요. 지금은 별로 기억엔 그다지 남아 있는 게 없지만...ㅜ
이거 대따 두꺼운 책인데 완독했네요. 축하해요!^^

blanca 2010-10-28 21:04   좋아요 0 | URL
스텔라님, 대따 두꺼운 책 읽었으니 칭찬받아도 되는 거죠? ^^ 전기 영화는 보지 못했어요. 이제 두꺼운 책은 안읽을랍니다.^^;; 삼백 페이지 이하인지 확인하게 됩니다.

마녀고양이 2010-10-28 2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는 멋진데, 별셋이라...
음,, 가로로 인쇄된 이상한 책을 읽은 영향일까요, 아니면 책 자체가 그냥그냥했나요?
나는 자서전이라면 홀랑 넘어가기 때문에, 무지하게 궁금해여.

blanca 2010-10-28 21:04   좋아요 0 | URL
ㅋㅋ 마고님, 이 자서전 리뷰들 보면 극찬 일색이에요. 제가 오독했을 수도 있는데 재미가 좀--;; 표지를 뒤집어 읽어서 그런 걸까요?

마녀고양이 2010-10-28 21:45   좋아요 0 | URL
음,, 추후 제가 읽어보고 판단해서 말씀드릴게요.
만일 제가 좋다하면, 제대로 된 책으로 다시 읽으셔여... 크크크.

양철나무꾼 2010-10-28 2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제 반품하세요~
읽으신 연후니까,제대로 된 책으로 가지고 계셔야죠~^^

전 책이 어떻든,찰리 채플린을 아주 애정해서 말이죠.

blanca 2010-10-29 15:46   좋아요 0 | URL
양철나무꾼님 ㅋㅋㅋ 비밀글로 하셨어야 그렇게 하죠 ㅋㅋㅋ 찰리 채플린을 좋아하시는군요. 이 책은 아주 많은 시간이 흐른 후 나름대로의 추억거리가 될 수 있을 것 같아 꽂아두기로 했어요. 할머니가 되어 이 거꾸로 된 책을 보면 기분이 묘해질 것 같아요..

2010-10-29 11: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0-29 15:46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