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표지와 가름끈이 거꾸로 되어 있는 찰리 채플린의 자서전을 데면데면하게 읽고 있다. 교환할까 생각하다 워낙 게을러 터져 보내고 받는 그 절차가 번거로워 가름끈을 아래에서 위로 올리는 괴이한 행동을 하며 생각보다 안 넘어가는 책장을 꾸역꾸역 넘기고 있다. 처절할 정도로 빈곤했던 어린 시절의 역경을 딛고 잭팟이 터지듯 재능이 시의적절하게 발화하고 톡톡한 보상을 받는 그 대목들을 넘기면서 누구나 그런 것은 아닌데 하필 이 사람이 그럴 수 있었던 동인이 뭔가 반문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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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을 우리 노력의 결과로 여길수록, 뒤처진 사람들에 대한 책임감은 줄어들기 때문이다. 성공을 미덕에 대한 포상으로 보아야 한다는 이 끈질긴 믿음은 단순한 오해이며, 버려야 할 그릇된 통념이다.
-마이클 센델 <정의란 무엇인가>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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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정말 찰리가 다른 누구보다 더한 극한 상황에서 몇 배의 지난한 노력을 기울였기 때문일까? 동시대의 궁핍과 특출난 재능이 그만을 조준할 걸까? 설사 그랬다 해도 그것이 반드시 사회적 명예와 경제적 대가로 보상받게 된 필연성을 지녔을까? 이런 식의 의아함들을 품고 누군가의 드라마틱한 성공 여정을 따라가는 것은 자서전의 바람직한 독자의 태도가 아닌 것 같다. 한 마디로 몹시 비딱하게 책표지까지 거꾸로 들고 줄을 아래에서 위로 들어올리며 하는 요즘 나의 독서는 나의 마음 같기도 하다.
십여 년을 들락날락하는 까페에서 누군가가 심하게 공개적으로 비난을 받는 모습을 보게 됐다. 닉네임으로 통용되는 그녀의 그 상처를 주기 십상이라는 댓글을 나는 사실 기억하지 못했다. 우르르 나도 상처 받았다,고 호응하는 과거의 기억 들추기 댓글들에서 슬며시 나도 그녀가 다른 사람한테 단 어떤 댓글로 간접적으로 상처받았었다,는 기억을 끄집어 내게 되었다. 이유는 원글이의 경험이 나와의 것과 흡사했고 그녀는 그것을 한 마디로 아주 부정적인 것으로 단정짓는 심판을 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일면 그것에 맞는 부분이 있었다. 어떤 것에 심하게 화르륵 하는 것은 그것이 어느 정도 진실을 내포하고 있다는 그 뼈아픈 독소에 데이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알지만 외면하고 싶은 것을 그녀는 용케도 집어 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너도 나도 그녀의 댓글이 아팠다고 댓글 하나로 이미지화한 그녀 전체를 매도하는 모습도 섬뜩했다. 누군가를 지목해서 한꺼번에 욕하기는 너무 쉬운 일이다. 그리고 그 대열에 참여하는 것도. 하지만 그 누군가가 나도 될 수 있다는 개연성은 내가 그 누군가가 되지 않아 다행이라는 비겁한 안도 밑으로 슬몃 가라 앉고 만다. 사이버 공간은 그래서 자판을 치며 튕겨나갈 칼날을 벼리는 일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참으로 무서운 일이다.
원래 소심한 성격이 직장 생활도 따악 그런 분야로 가서 더 소심해지고 나이가 들어 켜켜이 얹어지는 소심증까지 한꺼번에 엉켜 나중에 살아서 행동하고 말하는 그런 생명체가 아니라 남 눈치만 보다 구둣점 하나로 오그라들지나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