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질 수 있는 곳에 닿을 수 없는 것들을 비비적대는 게 삶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어떤 장소든 이윽히 응시하게 되면 기시감에서든, 그곳과 관련된 추억에서든 삶을 물큰 베어물은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정릉 근처에 짬뽕이 맛난 중국집이 있다는 소문에 용감무쌍하게도 한창 자신의 걸음마능력 과시에 심취하여 있는 아이까지 데리고 물어물어 가게 되었다. 세계의 끝이 있었다. 하늘과 땅이 맞닿은 그럴듯한 지평선 대신 하늘로 올라가는 듯한 좁다란 계단길이 어서 올라와 보라고 손짓하고 있었다. 시원한 짬뽕 국물에 별점을 매기는 와중에 아이는 벌써 하늘로 달음질치고 있었다.
아이를 잡으러 간 엄마는 그 계단 끝에 펼쳐진 세상에 아연했다. 그 계단은 다시 내리막길로 이어지고 있었고 좁다란 골목길에 아기자기한 삶들이 올망졸망 매달려 있었다. 마치 숨어 있는 엄지공주 동네 같았다. 그 골목 속에 뛰어들려는 찰나 아이는 또다른 곳으로 튀었고 오직 그 아이를 잡으러 다녀야 하는 중대 책무를 잊으면 안되는 어미는 아쉬움을 씹으며 그 동네를 떠났다.
지금도 궁금하다. 그 숨어 있던 골목길의 사연들이.
거기 사람들은 터널 아래 사람들과는 상관없이 느리게 살았다. 어깨 높이의 담장 위를 올려다보면 채반에 무를 썰어 말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푸른 플라스틱 화분에 줄맞춰 심어놓은 고춧대엔 고추가 빨갛게 익어 매달려 있었다.
-신경숙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중
아이는 절대 전진하지 않는다. 하나하나 다 참견해야 한다. 평상에 널어놓은 빨간 고추도 기가 막히게 신기하고 골목길에서 열심히 훌라후프를 돌려대는 열 살 남짓의 언니한테도 한 몫 거들어 봐야 한다. 책을 읽듯 풍경 하나하나를 짚고 해독하려 한다. 안내자 역할을 해야 하는 나에게도 그런 풍경들은 또다르게 흘러들어 온다. 예전에는 나와는 무관한 배경으로 그저 뒷걸음질치는 차창 풍경 같았던 그것들이 이제는 하나하나 너무나 절절하게 들어와 박힌다. 그리고 그곳의 사연들이, 그곳의 삶들이 궁금해진다.
그런 길들을 섬세하게 뷰파인더에 담고 넘치지 않을 만큼만 참견하고 또 거기서 얻는 소소한 이야깃거리들을 청랑하게 펼쳐 놓았다. 서울 통의동, 부암동, 청파동 만리시장길, 부산 문현동 안동네, 서울 상도동 밤골마을, 논산 황경읍 황산마을 등 이제는 사라져 가는 골목길을 온 몸으로 더듬더듬 읽어 나간 시인의 겸손하고 아늑한 얘기가 다사롭다. 읽고만 있어도 괜히 자꾸 마음에 물기가 차오른다.
사람들이 물건을 쉽게 버리지 못하는 이유는 그 물건을 버리는 순간 자기 생의 한 부분이 휘발할 것이고 그러면 그 질량 만큼 외로워질 것이란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p.102
나의 헛된 집착을 누군가가 이렇게나 명징하게 해석하여 합리화해 준다면 그 순간은 그 작가를 전적으로 받아들여도 무방하지 않을까. 이런 작가가 바라 본 좁고 구불구불한 골목길마다 매달려 있는 삶들은 그 자체로 각양각색의 인생의 은유 같아 묵직하다. 가벼운 책인 것 같으면서도 가슴께가 둔중해지는 까닭이다.
시인은 익숙한 풍경을 새롭게 받아들이는 지점에 골목을 들이민다. 신산하지만 고달프지만은 않고 약간의 처절함을 안고 있지만 너그러운 이 삶들도 이 시대의 마구잡이식 개발 논리 앞에서 몸살을 앓는다. 이 골목길들은 대부분이 스러져 가는 길목에 있다. 다만 다행인 것은 그것이 최종적 귀착점이 될 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각종 공공미술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보존되는 경우가 왕왕 있다는 것이다.
통영 동피랑에는 '파고다 까페'가 있다. 어느 방문객이 마치 영화 속 '바그다드 까페' 같다고 한 칭찬을 '파고다 까페'로 해석한 귀가 어두운 구멍가게 주인 할아버지의 작명 덕택이란다. 바그다드 까페보다 이 파고다 까페에서 아이스케키 하나를 사들고 평상에 퍼질러 앉아 해가 홍시처럼 떨어지는 것을 보고 싶다. 붙잡을 수 없는 것들이 가득한 이 삶에서 그 순간 만큼은 정지되어 있을 지도 모른다는 환상을 가져보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