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살에게 어른의 세계는 위압적이다. 특히나 그 어른이 부모일 경우, 그 세계의 문은 닫혀 있다. 아무리 탈출하려 해도 불가능하다. 그 어린 아이가 어른이 되기 전에는... 그래서 넌 다시 어린이가 되고 싶냐,고 묻는다면 나는 단호히 고개를 젓는다. 아무리 좋은 부모라도 때로 그 부모가 믿는 세계가 얼마나 어린 아이에게 폭압적이 되는지 어른이 되고 나서야 알았기 때문에...
그건 도덕률이 될 수도 있고 때로는 종교가 될 수도 있다. 아이는 선택할 수 없다. 부모가 교회에 가라면 가고, 그 친구를 만나면 안된다고 하면 때로 사랑하는 친구와 헤어진다. 그게 부모의 사랑이라고 한다면 아이는 그걸 도저히 거역할 힘을 낼 수 없다. 그건 반역에 버금가니까. 사랑과 폭력의 경계가 얼마나 얇은지 에리히 프롬은 알았다. 그는 "통제와 폭력 행사는 불과 한 걸음 차이다" 라고 엄중히 경고한다. 내가, 어른이 상정한 완벽한 세계가 과연 절대적인가, 자문하고 의심하는 시간을 주기적으로 가지지 않는다면 나는 나도 모르게 아이를 그 세계 안에 우격다짐으로 구겨 넣게 될 위험이 있다. 그리고 그것은 아이가 성장하고 난 후 기억하는 폭력의 시절이 될 수도 있다. 나는 사랑이라고 생각했는데.
뒤늦게 읽은 <1Q84>의 주인공 아오마메와 덴고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아오마메는 어린 시절 주말마다 폐쇄적 종교 단체에 속한 어머니의 전도 활동에 동행해야 했다. 덴고는 아버지의 회사 수금에 동행해야 했다. 그 아이들에게 마음껏 뛰어놀 수 있는 일요일은 없었다. 아오마메와 덴고는 저마다 나름의 이유로 아픈 시간을 공유한다. 그러나 그 아버지와 그 어머니는 나쁜 사람들이었을까? 내 아이에게 내가 믿는 종교 활동의 전도에 동행하게 하고 나의 삶의 전장에 데리고 다니는 게 과연? 어쩌면 그들에게 그 행위는 하나의 사랑의 방식이라 여겨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이들은 결론적으로 부모가 그럼으로써 아이다울 시간을 잃어버리게 된다.
일요일에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마음껏 뛰어놀아야 하는 것이다. 사람들을 어르고 달래며 수금을 하거나 무서운 세상의 종말을 선전하고 다니거나 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런 건-만일 그럴 필요가 있다면 그렇다는 것이지만-어른들이 하면 되는 것이다.
-1Q84
현실 세계와 덴고가 쓰는 허구의 이야기의 세계가 중첩되는 곳에서 아오마메와 덴고가 각자의 시간대를 살아나가며 그 상실과 아픔을 소화하고 마침내 재회하기까지의 여정은 선과 악의 경계와 옳은 것과 그른 것의 분별의 지점을 사정 없이 흔든다. 우리가 절대적인 가치라 믿는 것의 근간을 뒤흔드는 지점에서 끊임없이 혼란과 질문을 유도하는 하루키의 이야기는 그가 그린 달이 두 개 뜨는 세계만큼이나 몽상적이지만 도저히 고개를 돌리지 못하게 하는 마력을 지닌다.
슬며시 하늘을 올려다 보고 정말 달이 두 개일 수도 있다,고 믿게 만드는 건 이야기의 힘일까.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시간이 또 다른 차원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하나의 이야기에 불과할 수도 있다는 의심 또한 그렇다. 리얼리티에 대한 고정관념을 허무는 이야기다.
사랑이라고 믿고 행하는 것들에 대해서도 돌아보게 만드는 시간이다. 그게 통제하고자 하는 힘으로 분출될 때 얼마나 위험해질 수 있는지에 대한 것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