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애는 또래보다 이른 시기에 둘째는 또래보다 늦은 시기에 낳았다. 여섯 살 차이라 그런지 첫애를 키울 때의 그 전투력, 엄격함과는 전혀 다른 결로 둘째를 대했던 것 같다. 무엇보다 곁에 품고 있는 기간이 영원히 끝날 것 같지 않던 그 아득함이 하루하루가 줄어드는 아쉬움으로 대체됐다. 오십대에 아이를 얻은 지인은 아빠가 아니라 할아버지 같아 아이에게 미안하다고 했다. 그러나 그는 신생아의 머리 냄새, 그 통통한 손발을 잡는 시간이 얼마나 황금 같은지를 알 것이기에 한편 부럽다. 그는 육아를 지난한 시간을 죽여야만 하는 소모적인 것으로 오인하지 않을 것이다. 나이 들어 가지는 아이는 줄어드는 시간에 비례해 성장하며 부모의 삶의 밀도를 높인다. 나는 몰랐다.
팀 오브라이언은 쉰여덟에 큰 아들을 이 년 뒤에 둘째 아들을 얻게 된다. 오랜 기간 아버지가 되기를 망설였고 따라서 인생이 종반부에 왔을 때에 그에게 기적처럼 온 아들들을 키우며 노년과 탄생, 성장의 기간이 겹치는 아이러니를 맛본다. 그는 아들들에게 자신이 베트남전에서 겪은 그 지옥 같은 전쟁의 무익한 폭력과 글을 쓴다는 것에 대해, 그리고 자기만의 헤밍웨이에 대하여 일종의 인생 수업을 위한 <아빠의 어쩌면책>을 쓴다. 자신이 아들들의 성장의 여정에 길게 동행하지 못할 것에 대한 두려움에 대한 사전 예방작 업의 일환으로. 시간이 아주 많이 흐른 후 아버지를 기억하기 위한 자료로 아빠의 Maybe Book은 씌어진다. 그러나 그의 예상과는 달리 운 좋게도 그는 성인이 된 아들들 옆에 아직도 건강하게 생존 중이다.
지극히 사적으로 보이는 이 책은 그러나 역시 팀 오브라이언의 글답게 모두에게 공명하는 공적 영역으로 심화, 확장된다. 지금도 우리는 전쟁 중이다. 그 어떤 명분으로 포장해도 그건 팀 오브라이언의 말을 빌리자면 "누군가의 자부심은 누군가의 슬픔이다. 누군가의 조국 봉사는 누군가의 죽은 아들이다. 올곧음은 일방통행이 아니다." 그는 용기있게 미국의 패권주의를 비판한다. 정당한 명분을 동원해도 결국 약자들과 민간인을 도살하게 되는 전쟁의 그 잔인한 본질을 날카롭게 비판한다. 악의 핵심에 있는 익명화되는 적들측에는 우리만큼 소중한 아들과 딸들이 있음을 지적한다. 그 어떤 전쟁도 결국 아이들을 죽게 한다는 그의 말이 무겁다. 전쟁을 승인하는 자들을 직접 전쟁터에 보내라는 그의 말에는 이십 대 초반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고 그저 피곤한 군화를 한 걸음씩 옮기며 명령에 복종하여 사람을 죽여야 했던 그의 과거에 대한 회한들이 깊게 투영되어 있다. 그는 무사히 건강하게 평범하고 안전한 삶으로 돌아왔지만 그 자신 증언의 의무를 방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기억은 그의 평생을 따라붙는다.
죽을 때가 되면 모든 게 빛을 띤다. 평화로울 때, 이를테면 청춘기에는 당연하게만 여겼던 것들이 언제부턴가 눈물이 날 만큼 소중해지는데, 혹시 늙음을 벌충해주는 장점이란 게 있다면 한때 어이없을 만큼 시시하게 보였던 것들의 진가를 알아보는 즐거움이 그것이다.
-<아빠의 어쩌면 책> 팀 오브라이언
이 눈부시게 아름다운 여름 하늘이 유한하다는 걸 이제는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