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도록 매일 있었던 일들을 다이어리에 기록하려고 한다. 이것은 오 년 뒤, 십 년 뒤의 나를 위한 일이다. 미래의 나를 염두에 둔 과거 속에 현재를 밀어 넣는 행위다. 되도록 자기검열을 하지 않으려 하고 내가 어떤 일에 대하여 느낀 감정이나 감상보다는 실제 있었던 일을 기록하는 차원으로 만들려고 한다. 별것도 아닌 일에 전전긍긍했던 과거의 내 모습을 들키고 싶지 않다는 학습된 마음도 있다. 그보다는 현실들로 채우고 싶다. 기록하지 않으면 과거는 희미해지고 흩어진다. 


아버지 생신. 살아계셨으면 96세가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 오늘로 96세다. 그도 다른 사람들처럼 96세가 될 수 있었지만, 고맙게도 그렇게 되지는 않았다. 그랬더라면 그의 인생이 내 인생을 완전히 끝장내 버렸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어떻게 됐을까? 나는 글도 쓰지 못했을 것이고, 책도 없었을 터, 생각할 수 없는 노릇이다.

-<울프 일기> 버지니아 울프
















버지니아 울프는 서른세 살부터 자살하기 나흘 전까지 27년간이나 일기를 적었다고 한다. <울프 일기>는 이 방대한 일기 중 주로 울프가 작품을 쓰고 고치고 송고하고 그 반응을 기다리는 일에 관련한 것들 위주로 남편 레너드가 출간한 [A Writer's Diary]를 기본으로 한 것이다. 울프 자신이 자기검열을 최소화하겠다고 표방한 일기는 어떤 글이나 이보다는 잘 쓸 수 있다고 위트 있게 말한 그녀의 사전 경고가 아니어도 진솔하면서도 문학적으로 아름다워 시종일관 읽는 이를 설득시키고 끌어당기는 강력한 매력을 발산한다. 누군가의 일기에 이토록 흠뻑 빠져 마치 그녀와 함께 호흡하는 듯한 착각마저 느끼게 한 경우는 처음이다. 무엇보다 이 위대한 작가가 끊임없는 자기 의심과 자기 비하로 고생했었다는 건 놀라운 발견이다. 천하의 버지니아 울프가 스스로를 머리가 나쁘고 글도 못 쓰고 늙었다고 표현하다니. 


이처럼 세월은 흘러간다. 가끔 나는 자문해보다. 어린애가 은빛 공에 홀리듯, 나는 인생에 의해 최면에 걸린 것은 아닐까, 라고. 그리고 이것이 산다는것이냐,고. 이것은 매우 빠르고, 반짝거리고, 자극적이다. 그러나 어쩌면 천박할지도 모른다. 나는 인생이라는 공을 두 손에 들고, 그 둥글고, 매끄럽고, 무거운 감촉을 조용히 느끼면서, 그렇게 며칠이고 가지고 있고 싶다. 

-<울프 일기> 버지니아 울프


인생이라는 공에 홀린 우리. 그것을 손안에 들고 있고 그 반짝거림에 때로 아연해지는 나. 이렇게 세월은 흘러간다고 울프는 이야기한다. 그녀가 <댈러웨이 부인>, <올랜도>, <파도>,<세월> 등을 얼마나 처절한 자기 의심과 싸워가며 아이를 낳듯 산고를 겪으며 세상에 내어놓고 그것의 반응을 전전긍긍하며 기다렸는지를 읽는 일은 그녀가 확신하지 못하는 미래를 이미 알아버린 입장에서 묘한 감흥을 준다. 그녀는 자신이 이토록 위대한 작가로 남게 될 것이라 전혀 예감하지 못했다. 때로는 독자가 없을 거라 반응이 없을 거라 미리 걱정하고 절망하기도 했다. 평범한 사람들이 가지는 자기 의심, 삶에 대한 절망을 그녀도 고스란히 똑같이 통과하며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들을 읽는 일은 산다는 일은 이런 거구나, 같은 묘한 동질감을 자아낸다.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울프의 묘사력으로 소설의 장면처럼 생생하게 살아나는 건 덤이다. 캐서린 맨드필드가 울프의 집에 와서 비웃으면서 읽기 시작한 조이스의 [율리시스]를 읽다 갑자기 놀라서 "영문학사에 남을 만하다고 생각되는 광경이" 연출되는 장면. 버지니아 울프집에 와서 조이스의 원고를 읽고 놀라는 캐서린 맨드필드.


버지니아 울프가 죽음을 선택하게 될 징조는 일기에 보이지 않는다. 아니 인생 전반에 걸쳐 그녀가 갑자기 어떤 절망감을 표현하는 대목들이 있긴 하지만 대부분 그녀는 삶과 생에 대한 강렬한 애착을 느낀 사람으로 보인다. "나는 깃발을 휘날리면서 쓰러지고 싶다."는 표현이 그것에 대한 암시일까. 죽은 뒤에 영국 작가의 반열에 오를 수 있을까? 반문했던 그녀는 역사가 되었다. 일기장 속의 울프에게 들어가 더 이상 괴로워하거나 의심하지 말라고 당신은 그 자체로 위대하다고 이야기해주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누군가 지금 나의 삶이 이대로 충분히 괜찮다고 잘살고 있다고 얘기해주면 좋을 텐데, 같은 개인적 소망과 함께.


나도 일기를 계속 쓰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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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2-06-08 11: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남의 죽음 가지고 뭐라고하면 안되겠지만, 울프는 왜
노년에 자살을 했는지 모르겠어요. 물론 오랜 우울증으로 그렇게 됐겠지만…

울프의 일기는 잘 읽히지 모르겠어요. 카프카의 일기는 난해했는데 말이죠.
일기를 쓰시는군요.
저는 매번 써야지 하곤 드문드문 쓰고 있습니다.ㅠ

blanca 2022-06-08 16:06   좋아요 2 | URL
저도 지루할 것 같아서 기대도 안 했는데 예상 외로 정말 재미있었어요! 그리고 천하의 버지니아 울프가 자기 자신에 대해 가지는 생각이 우리 평범한 사람들과 별반 다르지 않아 또 놀랐고요. 사후 이런 존재가 되리라고는 꿈도 꾸지 않더라고요. 자살은, 결국 조울증 발작에 대한 두려움 때문인 걸로 추정하다고 합니다.

persona 2022-06-08 11:5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 울프에게 줄리아 카메론의 아티스트 웨이를 추천하고 싶어지네요. 근데 저도 3개월 지나니 모닝페이지 아예 안 쓴다는 ;;

blanca 2022-06-08 16:07   좋아요 2 | URL
삼 일 전까지 행복을 이야기한 사람이 갑자기 죽음을 택하는 게 참 아이러니하죠. 저는 요새 글씨를 쓰는 게 너무 귀찮아졌어요. 그래도 일기만큼은 손글씨를 고집하는데 게을러져 큰일입니다.

기억의집 2022-06-09 12:0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고맙게도 아버지가돌아가셨다는 글에 충격이… 아버지랑 사이가 안 좋았군요. 저는 울프의 작품을 지루하게 읽었는데… 문득 아주 문득 그녀의 짧은 문장이 생각나곤 해요. 제가 이해했던 그 범위안에서…. 예전에 자살하고 싶었다던 지인의 말을 들어보면, 아주 한순간에 자살 충동이 일어난다고.. 그래서 아파트 베란다 창밖 아래를 보면 시멘트로 안 보이고 푹신한 풀밭으로 보여 뛰어내릴까하는 충동이 일어난다고 말했던 게 기억이 나요….

blanca 2022-06-09 21:48   좋아요 1 | URL
아버지가 보수적이고 강압적이었던 모양이에요. 당시 딸이 글을 쓴다는 걸 응원하거나 지원하는 분위기가 아니었던 모양이에요. 죽음에 대한 충동은 합리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것 같아요...

북깨비 2022-06-10 14: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얼마전 종영된 ‘나의 해방일지‘라는 드라마를 넷플릭스로 시청하고 큰 위로를 받아서 아 나도 일기나 다시 한번 써볼까 하는 생각이 막연하게 들었는데 blanca님 리뷰 읽고 나니 막 의욕이 샘솟습니다. ˝미래의 나를 염두에 둔 과거 속에 현재를 밀어 넣는 행위˝라고 하신 표현이 인상 깊었어요. 솔출판사에서 나온 버지니아 울프 전집이 예뻐서 저도 천천히 한권씩 사모으고 있는데 다음은 이 일기를 사야겠어요.

blanca 2022-06-10 20:22   좋아요 1 | URL
저는 ‘나의 해방일지‘는 아직 못봤지만 많은 사람들이 칭찬한 드라마라 관심 있었어요. 일기는...정말이지 시간이 지나고 나서 뒤돌아 보면 나의 과거가 아니라 타인의 기록처럼 느껴질 정도로 낯설게 보이더라고요. 그만큼 쓰지 않은 시간은 그냥 사라진다는 생각이 들 정도예요. 북깨비님도 한번 시도해 보세요. 전집 참 예쁘고 맘에 들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