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빠른 걸음으로 지하철 계단을 올라가는데 갑자기 내가 어른 놀이를 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쁜 척 하면서 사실은 아무 것도 안 든 가방을 들고 지겨운 일만 일어나는 사무실로 종종걸음을 치는 어른. 삼십이 넘었는데 아직도 사는 게 어른 놀이를 하는 것 같다는 생각만 드니 이를 어쩌지?

끊은지 사오년 되었는데도 가끔씩 흡연 생각이 간절하다. 날 좋은 날 계단에 쭈그리고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는 여자들을 보면 가서 구걸이라도 하고 싶다. 

점심시간이면 나는 완전히 다른 인간이 된다. 여덟 개의 발을 흐느적대며 사무실에선 어항의 폭력에 무기력하게 저항하는 졸린 문어일 뿐이지만, 신성한 점심시간만 되면 기운찬 보폭으로 사기가 잔뜩 오른 병사가 되어 나는 빌딩을 나선다. 

마음 속엔 쉽게 충족시킬 수 있는 욕망들이 가득하다. 한 잔의 에스프레소를 마시겠어 오늘은, 나뭇가지 그늘이 창 밖에 배경으로 멋있게 자리한 작은 커피점에서. 쓴 맛이 혀의 작은 돌기들을 맹렬하게 타격한다. 넋을 읽고, 여덟번째 다리 흡판에 잘 붙여둔 자수정을 뚫어져라 바라본다. 시간의 분침이 친숙한 이웃동네를 한 바퀴 도는 동안, 나는 먹물을 뿜으며 대양을 질주하는 부리부리한 눈의 대왕 오징어가 된다.

  거리에서 (박정대) 
 

  어제는 바람이 몹시 불었어, 명동엘 갔었는데 사람들이 깃발처럼 나부
  끼고 있었어. 어제는 바람이 몹시 불었어요, 명동엘 갔었는데 사람들이
  깃발처럼 나부끼고 있었어요. 어제는 바람이 몹시 불었지, 명동엘 갔었
  는데 사람들이 깃발처럼 나부끼고 있었지. 어제는 바람이 몹시 불었네,
  명동엘 갔었는데 사람들이 깃발처럼 나부끼고 있었네 (발성연습 좀 해
  봤어요).
 
  나는 티브이를 끄고 당신에게 편지를 써요
  더이상 쓰레기를 볼 수 없다고
  더이상 힘이 없다고
  나는 거의 알코올중독자가 되었다고
  그러나 당신은 잊지 않았다고
  전화가 와서 내가 일어나려 했다고
  옷을 입고 나갔다, 아니 뛰어나갔다고
  그리고 나는 아프다고 피곤하다고,
  그리고 이 밤을 자지 못했다고 말이에요
 
  나는 대답을 기다려요 더이상 희망은 없어요
  곧 여름이 끝날 거예요 그래요
 
  날씨가 좋아요 사흘째나 비가 와요
  비록 라디오에서 그늘도 더운 날씨가
  되겠다고 예보하지만 하긴 내가 앉아 있는
  집 안 그늘은 아직 마르고 따스해요
  아직이라는 것이 두려워요
  시간도 빨리 흘러요 하루는 밥 먹고
  삼 일은 술 마셔요
  창 밖에 비가 오지만 재미있게 살아요
  오디오가 고장나서 조용한 방에 앉아 있어도
  기분이 좋기만 해요
 
  나는 대답을 기다려요 더이상 희망은 없어요
  곧 여름이 끝날 거예요 그래요
 
  창 밖에는 공사중이에요
  크레인이 일하고 있어요
  그래서 그 옆의 레스토랑이 5년째 휴업해요
  책상 위에는 병이 있고 병 안에는 튤립이 있어요
  창턱에는 컵이 있어요
  이렇게 해가 지고 인생이 흘러가요
  참으로 운이 좋지 않아요
  하지만 하루라도 한 시간이라도
  운 좋은 날이 오겠지요
 
  나는 대답을 기다려요 더이상 희망은 없어요
  곧 여름이 끝날 거예요 그래요
 
  어제는 바람이 몹시 불었네, 명동엘 갔었는데 사람들이 깃발처럼 나부
  끼고 있었네. 어느 죽은 가수의 노래가, 여름이라는 노래가 깃발처럼 나
  부끼고 있었네. 너무 가까운 거리가 우리를 안심시켰지만 그것은 알 수
  없는 불안이었네. 참으로 많은 비밀들이 휘청거리며 나부끼고 있었네.
  가수의 노래가 천 개의 귀를 흔들고 있었네. 스피커에서 흘러나온 영혼
  이 천 개의 추억을 마구 흔들고 있었네. 마침표가 없는 걸음들이 끊임
  없이 쉼표처럼 뒤뚱거리며 걷고 있었네.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어,
  거리에서, 그 거리에서 염소처럼 나는 담배만 피워대고 

 

명동에 가고 싶다. 염소처럼 담배를 피우러.

 


댓글(5)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플레져 2005-09-22 2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illutration by KAZUSA MIYAMOTO

얼마전에 전경린의 염소를 모는 여자를 다시 읽었는데, 문득 그 염소의 우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요.
시도 좋지만, 프롤로그가 더 좋습니다.

 

 


날개 2005-09-22 2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보다도 검둥개님 글이 너무 좋아요....!

로드무비 2005-09-22 23: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네요. 검둥개님 글!
내 청춘의 어쩌구 하는 박정대 시인의 시도 떠오르네요.^^

잉크냄새 2005-09-23 1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도 시보다 님의 글이 더 시적으로 다가오네요.

검둥개 2005-09-23 2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플레져님 저 염소는 그런데 넘 착하게 생겼군요.
담배를 보면 눈에 불을 켜는 저와는 좀 격이 달라보이지 않습니까 ^^;;;

날개님 아이 부끄러워요. ^^;;;

로드무비님, 궁금해서 막 찾아봤는데 안 떠요. "내 청춘의 격렬비열도"라는 시인가요? 흑흑 제목만 뜨고 시는 안 뜨네용. ㅠ_ㅠ

나무님 ㅎㅎㅎ 저도 찌찌뽕입니다. ^^

잉크냄새님, 잉크냄새님의 글발에 어찌 비교가 되겠습니까. *^^* 그래도 은근히 기분은 째지는 아침입니다. 헤헤헷
 

  어떤 갠 날  (이면우)


  운전기사 뒷머리 면도자국 파르스름하다
  그는 파란불 켜진 건널목 세 개를 연달아 통과했다.
 
  생의 어떤 날은 구름 한점 없는 하늘 펼쳐지기도 한다.고
  나는 말할 수 있는 나이다 그러나 휴일 외곽도로에서
  텅 빈 버스의 굉장한 속도에 잠시 어리둥절해졌다
  공기 가득 음악 품은 듯 서늘히 저항하는 오전
  지금 이 행운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님을 그러나
  아주 잠깐 새 깨닫도록 된 나이인 것이다.
 
  그렇다 핸들 쥔 저 장갑의 시리도록 흰빛은 이윽고
  땅에 떨어진 목련꽃잎처럼 누렇게 바랠 것이다
  그러나 지금 하늘의 보상처럼 햇빛 공기 속도가
  핏속에 녹아드는 중인 청년에게 나는 소리없이
  띄엄띄엄, 생각나는 대로 말을 건넨다.
 
  행운을 꽉 움켜쥐려 하지 말고
  가볍게, 계속 끌고 가라고
  바로 지금처럼.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플레져 2005-09-21 15: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자꾸 움켜쥐게 되니...행운은 쉽게 오지 않나봐요...

검둥개 2005-09-21 2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하동문예요... ^^;;; 플레져님.
 

  살구를 따고 (장석남)

  내 서른 여섯 살은 그저 초여름이 되기 전에 살구를 한 두어 되 땄다는 것으로 기록해둘 수밖에는 없네. 그것도, 덜어낸 무게 때문에 가뜬히 치켜올라간 가지 사이의 시들한 이파리들의 팔랑임 사이에다가 기록해둘 수밖에는 없네.
 
  살구나무에 올라
  살구를 따며
  어쩌면 이 세상에 나와서 내가 가졌던 가장 아름다운,
  살구에게 다가가 부드럽게 손아귀를 펴는 내 손길이
  내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나무 위의 저녁을 맞네
  더 이상 손닿는 데 없어서
  더듬어 다른 가지로 옮겨가면서 듣게 되는
  이 세상에서는 가장 오랜 듯한, 내 무게로 인한
  나뭇가지들의 흐느낌 소리 같은 것은, 어떤
  지혜의 말소리는 아닌가
  귀담아 들어본다네
  살구를 따고 그 이쁘디이쁜 빛깔을 잠시 바라보며
  살구씨 속의 아름다운 방을 생각하고
  또 그 속의 노랫소리, 행렬, 별자리를 밟아서
  사다리로 다시 돌아와 땅에 닿았을 때 나는
  이 세상을 다시 시작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내 서른여섯 살은 그저 어느 저녁
  살구를 한 두어되 따서는
  들여다보았다고 기록해두는 수밖에는 없겠네  
 
 


댓글(3)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릴케 현상 2005-09-19 14: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비로그인 2005-09-20 2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이 시가 너무 좋네요.

검둥개 2005-09-21 07: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산책님도 좋다는 말씀이시겠지요? ^^

Manci님 저두요. ^^*
 

  긍정적인 밥  (함민복)


  詩 한 편에 삼만원이면
  너무 박하다 싶다가도
  쌀이 두 말인데 생각하면
  금방 마음이 따뜻한 밥이 되네
   
  시집 한 권에 삼천원이면
  든 공에 비해 헐하다 싶다가도
  국밥이 한 그릇인데
  내 시집이 국밥 한 그릇만큼
  사람들 가슴을 따뜻하게 데워줄 수 있을까
  생각하면 아직 멀기만 하네
   
  시집이 한 권 팔리면
  내게 삼백원이 돌아온다
  박리다 싶다가도
  굵은 소금이 한 됫박인데 생각하면
  푸른 바다처럼 상할 마음 하나 없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진주 2005-09-17 2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래서 이래서
이래서,
제가 함민복시인을 아니 좋아할 수가 없어요.흐흑...

검둥개 2005-09-17 2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요 저도요!!!
진주님 옆에 끼어서 덩달아 좋아하렵니다. ^___^

히나 2005-09-18 2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검둥개님은 추석 어떻게 보내고 있어요? 이런 질문하면 안 되나 쩝 ^^;

검둥개 2005-09-19 1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잘 지내고 있어요. ^^ 다만 명절 음식이 없는 것이 아쉬울 뿐이죠. 스노드랍님은 맛있는 거 많이 드셨어요? :)
 

 제비꽃 (안도현)


 제비꽃이 하도 예쁘게 피었기에 
 화분에 담아 한번 키워보려고 했지요 
 뿌리가 아프지 않게 조심조심 삽으로 떠다가 
 물도 듬뿍 주고 창틀에 놓았지요 
 그 가는 허리로 버티기 힘들었을까요 
 세상이 무거워서요 
 한 시간이 못되어 시드는 것이었지요 
 나는 금세 실망하고 말았지만 
 가만 생각해보니 그럴 것도 없었어요 
 시들 때는 시들 줄 알아야 꽃인 것이지요 
 그래서 
 좋다 
 시들어라, 하고 그대로 두었지요 


댓글(3)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물만두 2005-09-17 1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비꽃 보면 볼 수록 이뻐요^^

비로그인 2005-09-17 1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궁. 아침에 읽으니까 참 좋은 시네요. 저도 시들어가는 제비꽃 함 올려봅니다.

검둥개님, 텅 빈 알라딘에서 일케 만나뵈니 반갑네요, 안냥요~


검둥개 2005-09-17 1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만두님 저도 제비꽃이 저렇게 예쁜 줄 찾아보고서야 알았답니다. ^^*

복돌이님, 그런가요? 헤헷. 시들어가는 제비꽃도 아주 예쁘네요. 가지가 참 가는 것이 제게는 아주 인상적이네요. 복돌이님을 만나뵈어서 저도 무척 반가워요. ^^ 즐거운 한가위 보내세요 ~~ ^________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