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구를 따고 (장석남)

  내 서른 여섯 살은 그저 초여름이 되기 전에 살구를 한 두어 되 땄다는 것으로 기록해둘 수밖에는 없네. 그것도, 덜어낸 무게 때문에 가뜬히 치켜올라간 가지 사이의 시들한 이파리들의 팔랑임 사이에다가 기록해둘 수밖에는 없네.
 
  살구나무에 올라
  살구를 따며
  어쩌면 이 세상에 나와서 내가 가졌던 가장 아름다운,
  살구에게 다가가 부드럽게 손아귀를 펴는 내 손길이
  내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나무 위의 저녁을 맞네
  더 이상 손닿는 데 없어서
  더듬어 다른 가지로 옮겨가면서 듣게 되는
  이 세상에서는 가장 오랜 듯한, 내 무게로 인한
  나뭇가지들의 흐느낌 소리 같은 것은, 어떤
  지혜의 말소리는 아닌가
  귀담아 들어본다네
  살구를 따고 그 이쁘디이쁜 빛깔을 잠시 바라보며
  살구씨 속의 아름다운 방을 생각하고
  또 그 속의 노랫소리, 행렬, 별자리를 밟아서
  사다리로 다시 돌아와 땅에 닿았을 때 나는
  이 세상을 다시 시작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내 서른여섯 살은 그저 어느 저녁
  살구를 한 두어되 따서는
  들여다보았다고 기록해두는 수밖에는 없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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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케 현상 2005-09-19 14: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비로그인 2005-09-20 2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이 시가 너무 좋네요.

검둥개 2005-09-21 07: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산책님도 좋다는 말씀이시겠지요? ^^

Manci님 저두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