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나가 있다가 집에 돌아와 냉장고를 열어보니 있는 것이라곤 커피 뿐이다. 날씨는 귀 떨어지게 추운데 결심을 굳게 하고, 커다란 배낭을 메고나가 수퍼에서 장을 봐 오니까 아니 글쎄 아파트 입구의 금속 문이 얼어붙어 열쇠가 들어가질 않는게 아닌가. 그 무거운 걸 이고 지고 도로 두 블럭 떨어진 공중전화 있는 데로 볼때기 에이는 얼음바람을 맞으며 가려니까, 욕이 저절루 나왔다. 특히 내 코 앞에서 문을 잠그고 총총히 사라진 여인네, 다음에 만나기만 해봐라! (사실은 얼굴 못 봐서 가망 없음. --.--;;)

쓰러져서 십분쯤 있다가 배고파서 얼른 저녁을 했다.
오늘 같은 날은 천금을 준대도 복잡한 요리를 못 하리. (정말로 준다면 사실은 하리라...)

밥이 끓는 동안, 칙칙폭폭...

두부 두 모를 썬 다음에 대파 하나를 썰어넣고 간장+굴소스+식초+물+깨소금+고추가루 섞은 걸 쏟아붓고 12분 끓여서 막 지어진 밥이랑 먹었다. 자취생 식단 같아 보이지만, 막 지어진 기름기 좔좔 흐르는 흰 밥하고 먹으면 임금의 식탁이 부럽지 않다.

인생 최고의 호사 중의 하나는 매 끼에 '막' 지어진 밥을 먹는 게 아닐까? 아무리 좋은 쌀로 지은 밥이라도 묵은 밥맛은 막 지은 새 밥맛에 비할 바가 아니라서. 그래도 밥을 할 때면 늘 약간씩 더 해서 찬밥을 냉장고에 들이밀게 된다. 금고에 금괴는 채우지 못할 망정 배가 등가죽에 붙어 들어오는 날 뎁혀 먹을 찬밥은 있어야겠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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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2006-01-16 09: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헐, 자취생 식단이라뇨, 우리집에서 구경하기 힘든 호사식단으로 아뢰요. *^^*

2006-01-16 10: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플레져 2006-01-16 1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긴 봄날 같아요. 한 겨울에 갑자기 뽀나스처럼 봄이 와서 어리둥절해요.
어제 두부조림 해먹었는데, 프라이팬에 두부가 눌러붙었어요.
두부가 촉촉해 보입니다 ^^

merryticket 2006-01-16 1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맛있어 보여요...
천금"이라 하심은 천만불인가요??
아님 천만 유로??

paviana 2006-01-16 1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스렌즈 바닥 깨끗한 거에 감탄하고 갑니다.
아 ! 난 왜 저런 것만 보일까

검둥개 2006-01-16 1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선인님, 정말요? 진짜요? ^ .^
전 저거랑 밥이랑 정말 딱 그릇 두 개 놓구 먹는답니다.

속삭님 밥 드세요 밥! ^^

플레져님 여긴 날씨 좋다가 오늘 얼어붙었어요.
얼마나 춥던지 집에 못 들어가고 공중전화 앞에 서 있는데 울고 싶더라구요. ^^*
전 두부를 그냥 양념에 한 데 넣구 끓여서 그래요 헤헤.

올리브님 증말이요? 배고프면 다 맛있어요. ㅎㅎ ;)
천만불이 뭡니까, 실은 만불만 준다고 해두 바로 일하러나갈껄요.
(이렇게 말하니 쫌 비참해질라고 해요. 흑. :)

파비아나님, 왼쪽 중앙에 낀 라면 부스러기와 얼룩이 보이지 않으십니까?
실은 시어머니가 오시기 전에 부랴부랴 가스렌지 닦았어요. ㅎㅎ ^^

진주 2006-01-16 14: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미..저도.. 까스렌지와 냄비가 무쟈게 반딱인다고 감탄하는 중이었어욤^^

산사춘 2006-01-17 08: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멋지세요. 덕분에 위장에 불땡겨져서 저도 간만에 아침을 지어먹어야 겠어요. 후식으로 와플이 짱인디... 음홧

검둥개 2006-01-17 15: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주님 ㅋㅋㅋ 조명발두 좀 있는 거 같어요. 실은 가스렌지 위에 전자렌지고 그 밑에 있는 알전구를 켜놓구 찍었거든요. 헤헤. ^^

산사춘님 아침 맛있게 드셨나요?
저 두부+대파 조림은 시간도 많이 안 걸려서 저의 비장의 요리목록에 들어가는 음식입니다요. ^ .^
 

삼돌이가 학교에 갔다.

컴퓨터를 켜고 기웃기웃 하다가 에스프레소를 한 잔 뽑아서 의자에 앉았다. 올해는 겨울이 널널하다 했더니 그런 말 하는 걸 딱 알아챘는지 바로 눈이 내리고 수은주가 뚝 떨어졌다. 눈이 내린 옆집 지붕(=교회)을 바라보면서 커피를 마시고 있으니까 큰 호사를 하는 것 같다. 혼자서 집에 있는 게 이렇게 좋을 수가 없다. 성탄선물로 삼돌이에게 받은 스피커로 음악을 듣는다. 일부러 볼륨을 약간 세게 해서 듣는데 질이 좋은 스피커라 음이 뭉개지지 않는다. 평생 이렇게 여유작작 커피나 마시고 음악이나 들으며 이웃집 지붕이나 쳐다보고 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으랴 싶지만, 그럴 수는 없는 노릇. 이런 순간이 그저 가끔 있는 삶을 사는 것만두 봉 잡았다 생각해야 한다.

시댁에 있는 내내 나는 아프고 피곤하고 (아무래도 시집이니만큼) 불편해서 삼돌이와 티격태격했다. 그러고나서 좀 무안해서 또 얼굴색을 싹 바꾸고, "언제가 내가 제일 좋아", 라구 옆구리를 찌르며 물어봤다. 그랬더니 글쎄 이 넘이 "나는 네가 옆방에 있을 때가 제일 좋아" (--> 즉, 같은 방에 있을 때가 아니라 내가 옆 방에 가 있을 때가 더 좋다는 말이다 흠흠) 라구 그만 충격발언을 하는 게 아닌가. 자기도 모르게 그 말을 해놓고는 그만 실실 쪼개기 시작한다. 자기도 모르게 발설해버린 진실이 면구스러웠던 모양이다!

나도 불쑥 우리 앞에 출몰한 진실이 난감하여 같이 실실 웃었다.
나는 네가 옆방에 있을 때가 제일 좋다니, 사랑하는 타인들의 심정을 이토록 잘 표현하는 말이 따로 있을까!


어제 전경린의 신간, <언젠가 내가 돌아오면>을 읽고 리뷰를 쓸까 하다가 결국 못 썼다.

사랑에 대해 쓰고 또 써대는 작가들이 나는 참 위대하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무수한 사랑 이야기를 다 읽고 또 읽어주는 나같은 독자들도 위대하다.

마른 오징어처럼 꾸덕꾸덕해진 사랑 이야기를 그렇게 우리는 두고두고 씹고 또 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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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스 2006-01-16 0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 진실에 실실 같이 웃을 수 있는 사이. 그런 사이가 되기란 또 역시 쉽지 않아요. ^.^ 간만의 시댁 나들이에 힘드셨겠어요. 이제 푹 쉬세요~ 옆방에서 ㅎㅎ

검둥개 2006-01-16 02: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런가요? 그런 말을 들으니 그래도 쫌 위안이 됩니다요. ^^;;;
옆방에서 푹 쉬도록 하겠습니다. ㅎㅎ

마냐 2006-01-16 0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호호. 검둥개님...저도 연말에 시댁 식구들과 보름여를 보냈죠. 수고하셨슴다..ㅋㅋㅋ 암튼, 옆방에서 푹 쉬도록, 삼돌님이 배려해주셔야 할텐데...^^;;

이리스 2006-01-16 0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나, 추천을 한 줄 알았는데 하지 않았군요. -.-
추천 누르고 갑니다 ~

플레져 2006-01-16 07: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옆방에 그대가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흐흐...
삼돌님의 명언이 정말 부부사이를 단적으로 드러내주는군요.
울남편도 제가 방문 닫고 자고 있을 때 행복해하는 것 같아요...흠...

로드무비 2006-01-16 07: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삼돌이님의 명언에 한 표!^^

merryticket 2006-01-16 08: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아침입니다*^^*
옆방이라니, 듣는 사람 무안하게스리...그래두 옆집이 아닌게 다행인가요? ㅎㅎ

검둥개 2006-01-16 09: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감사합니다. 저랑 살더니 그 새 현인이 되었나봐요. ^^* ㅋㅋ

플레져님, 오우 노우, 그대가 있는 것만으로 행복해 ~~ 이런 다정한 뜻이 아니구요,
이 방에 같이 있을 때가 아니고 저 옆방에 가서 따루 있을 때가 제일 좋다, 이런 뜻이라요. ^^;;;

어마, 낡은구두님 감사합니다. ^^* 옆 방에서 행복해하구 있어요.

마냐님, 그 보름이 시댁에서 보내면 한 달 같지 않나요? ^^
이제 푹 쉬세요. 헤헤.

검둥개 2006-01-16 09: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리브님 저 방금 저녁 먹구 왔어요! 앗, 그런데 왜 무안해요?
맞아요. 그래두 옆 집이 아니라 천만다행입니다. ^_____^*
역시 한 수 위셔요!!!

2006-01-16 11: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검둥개 2006-01-16 1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님, 이런. 그럼 다음을 기약해요 ^^* 밥 꼭 챙겨드시고요.

깍두기 2006-01-16 2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검둥개님의 글을 오랜만에 보니 너무 좋아요^^

blowup 2006-01-17 0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결혼하지 말고 옆집 남자가 되어 달라고 했어요. 예전에.

검둥개 2006-01-17 15: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깍두기님, 진짜요? 정말요? *^^* 헤헤헤. (좋아서 실실)

나무님 결혼도 하기 전에 어찌 그렇게 잘 아셨단 말입니까?
같은집 남자가 된 지금은 어떤가요? 옆집 남자보다 나은가요? ^^
(써놓고 보니 무슨 소리람 이게? =3=3=3 :)
 

시댁에 삼 주 정도 있다가 방금 돌아왔다. 샤워하고 짜파게티 끓여먹고 바로 접속! 나는 시댁에 간다고 해서 특별히 시집살이를 하는 것도 아니고 일찍 일어나야 하는 것도 아닌데, (그런데 삼돌이 시중은 다 들어줘야 한다. 집에 가면 왕자로 돌변함.) 그래도 역시 집에 오니까 살 것 같다. 

성탄 직전에 갔는데 성탄절날 친척 애들하고 놀아주다가 감기 걸려서 쓰러지고, 겨우 나은 다음에는 입병 나서 또 고생하고, 입병이 좀 잡히나 하니까 그 다음엔 왼쪽 눈이 근질근질해서 혹시 다래끼라도 날까봐 노심초사하다가 휴가를 다 보냈다. 한 주에 병 하나씩 해치운 셈이라고나 할까. --.--;;; 성탄 트리 옮기다가 삔 허리는 아직두 아프누나. 그 여파로 살은 안 빠지고, 얼굴만 처참한 몰골이 됐다. 꺼이꺼이.

휴가 동안 기억에 남았던 것은 역쉬 알라딘에 새해 첫 주문을 냈던 일과, 시집에서 나의 버섯전골을 요리해 시어머니의 찬사를 받았던 것이다. 사실은 과거에 시집에서 요리 함 해보인다고 하다가 (왜 그랬을까!  --.--;;;) 부엌을 엉망으로 만들어놓고 도망가야 했던 적이 있었기 때문에, 이번에 전골을 만들 때는 요리에 쓴 시간보다 부엌에서 요리하면서 카운터에 생기는 얼룩 닦는 데 쓴 시간이 더 많았다. 퇴근해서 돌아온 시어머니는 일단 부엌부터 체크하고 깨끗한 것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전골은 그런데 정확히 얼마나 더 만들어야 하는지 몰라서, 먹은 것보다 남은 양이 더 많았다.

여기저기 아프다보니 당연히 시내에는 한 번도 안 나가고 돌아올 뻔 했는데 선배언니에게서 전화가 와서 모처럼 한인타운으로 짜장면도 먹으러 가고 소호의 일식 주점에서 술도 마셨다. 크크크.

나는 그런 일식주점이 이 곳에도 있으리라고 상상을 못했는데, 선배가 어디서 보고 주소를 적어온 것이다. 예전에 다니던 대학 근처에 있던 장소와 메뉴도 대충 비슷했고 무엇보다 진로 참이슬이 있다는 사실에(!) 기절할 정도의 감동을 금치 못했다. 그런데 가격은 한 병에 12불(12,000원)!  겁나게 비싸지만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리? 일단 참이슬 한 병 시켜놓고 정종하고 같이 돌아가며 마셨다. 메뉴 중에 조개국이 있었는데 우리나라와는 달리 일본된장이 약간 섞여서 맛은 떨어졌다. 김치 나베라는 안주가 일품이었는데 김치에 콩나물과 돼지고기를 넣고 끓인 그러니까 김치찌개였다! ^^ 국물이 조금 뿐이어서 상당히 애석했다.

어쨌건 그 날 코 삐뚤어지게 마시고 다음날 숙취로 무지하게 고생했다. 선배는 말짱했다고 함. 어쨌건 무척 뿌듯한 날이었다. 이 곳에서 한국식으로 술 마시고 늦은 밤에 귀가하여 뻗어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왜 이 동네에는 그런 술집이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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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6-01-14 1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코 삐뚤어지게 마신 것 축하드립니다.
일식주점 저도 가보고 싶어요.
요즘 여기는 오뎅바가 그리도 유행이라는데......

이젠 자주 볼 수 있는 거지요?^^

paviana 2006-01-14 1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오늘은 검둥개님의 새 소식도 올라왔네요.
요 며칠 통 안보이셔서 살짝 걱정되기 시작했거든요.ㅎㅎ
집으로의 무사귀환을 축하드리며, 삼돌님의 군기를 다시금 바짝 잡으세요. ㅎㅎ

검둥개 2006-01-15 0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감사합니다. *^^*
근데 남아서 애지중지 싸들고 온 소주병을 그만 시댁에 놓구 왔지 뭐예요.
오뎅이라면 저두 사족을 못 쓰는데! 이 곳에도 오뎅바가 열렸으면 좋겠어요. :)
이제 자주 출현하도록 하겠습니다. ^^

파비아나님. 뒷좌석에서 해리와 씨름하며 여섯시간 차타고 오느라고 기절하는 줄 알았어요. ^^ 그래도 집에 오니까 너무 편하네요. 군기 잡는 건 왜 이렇게 잘 안될까요. 흑흑.

kleinsusun 2006-01-15 1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이슬을 $12이나 내시고 드시다니....ㅎㅎ
왜 외국에 있으면 참이슬이 더 땡기는걸까요?
한국에선 와인을 마시고, 외국에선 비싼 참이슬을 마시고...ㅎㅎ
근데...전 어제 참이슬 넘 많이 마셔서 상태가 안좋아요.^^

검둥개 2006-01-16 0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무래도 구하기 어려우니까 더 그런 거 아닐까요? 한국에선 짜장면이나 라면처럼 일주일에 몇 번은 먹는 건데 그걸 일이년에 한 번 먹으니까. ^^ 그러고보니 참이슬 가격이 와인 가격과 비슷하네요. ㅎㅎ

플레져 2006-01-16 07: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이슬 본 지도 참 유구한 세월이 흘렀네요.
저는 어제 하이네켄과 골뱅이 안주랑 먹는 남정네를 보았어요.
울남편...ㅋㅋ 술을 보고 그냥 지나치는 기호가 되버렸다는...

검둥개 2006-01-17 15: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플레져님 우째 참이슬 자주 안 드신단 말여요? 일케 좋은 술을? ^^ 부군과 한 잔 하셔요! (술 권하는 사회? ^^;;) 하긴 그 사이에 더 훈늉한 술이 많이 나왔는지도... 산사춘이란 술이 좋다던데 그것도 어케 구해 함 마셔보구 싶어요. 헤헤. 플레져님의 골벵이 무침과 함께라면 한 병이 문제겠어요. :)
 
문화의 수수께끼 - 마빈 해리스 문화 인류학 3부작
마빈 해리스 지음, 박종렬 옮김 / 한길사 / 2000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1974년에 출판된 마빈 해리스의 <소, 돼지, 전쟁과 마녀: 문화의 수수께끼>는 너무 유명해서 오히려 더 안 읽게 되는 책들 중의 하나이다. 읽지 않아도 여기저기서 얻어들은 풍월 덕에 마치 책의 내용을 다 알아버리기라도 한 듯한 착각에 빠지는 것이다. 하지만 <문화의 수수께끼>는 단순히 왜 인도인은 소고기를 먹지 않고, 반면 이슬람교인들과 유대인들은 돼지고기를 금기시하는가만을 설명하는 책이 아니다. 각 장에 등장하는 소재들은 얼핏 보기엔 아무렇게나 선택된 수수께끼들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설명의 복잡성 정도에 따라 세심하게 배열되었다.

해리스는 힌두인들의 암소 숭앙이나 이슬람교인/유대인들의 돼지고기 금식, 뉴기니 매링족의 돼지 숭앙을 그들의 거주환경이 인간에게 부과하는 제약과 그 제약 속에서 거주환경의 자연적 수용능력을 파괴함 없이 생활하기 위해 고안된 문화적 장치라고 설명한다. 사상자를 내며 무의미하게 반복되는 듯 보이는 전쟁이라든가 여성 수가 남성 수에 비해 절대적으로 부족한 사회에서 산모들이 오히려 여아만을 선택해 방치하거나 살해하는 현상을 고찰하면서, 해리스는 전쟁이 원시적 공격성의 산물이 아니라 사실은 정교한 인구조절 장치이며, 여아살해와 여성학대는 전체 집단이 일정한 단백질을 섭취할 수 있도록 남성들의 공격성을 북돋고 섹스를 그 보상으로 제공하는 사회제도라는 것을 보여준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해리스의 주장대로 전쟁이나 사회적 남성우월주의가 생존에 있어서의 혹은 어떤 다른 경제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고안된 문화적 장치라면, 그러한 목적을 다른 방식으로 충족시킴으로써 전쟁이나 남성우월주의/여아살해와 같은 관습을 제거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책의 나머지 반을 차지하는 포트라치 관습과, 유령 화물, 구세주, 중세의 마녀 사냥에 대한 해리스의 논변은 이러한 문화적 현상 배후의 진정한 역학관계를 밝히면서 놀라움을 선사한다. 포트라치 관습이 부의 재분배를 위한 것이라는 것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지만, 거주 환경에 따라 부의 재분배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짐을 보이는 해리스의 설명은 매우 정교하다. 일견 지극히 비이성적으로 보이는 유령 화물에 대한 믿음이 사실은 제국주의 서양 열강의 지배 하에서 뉴기니의 고산지대 원주민들이 착취된 노동의 댓가에 대한 일종의 주장으로 기능하는 동시에 식민지배에 대한 저항운동의 발판이 되었다는 부분은 독자의 감탄을 사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역시 이 책에서 가장 탁월하게 보여지는 것은 뉴기니의 원시부족들의 관습과 서양 중세의 마녀사냥을, 기독교 성립 초기의 정치적 상황과 그 속에서 예수의 죽음이 정치적으로 변용되어 수용되고 전파되는 방식을, 그리고 나아가 저술 당시의 반문화운동의 정치적 의미와 한계를 연결시키는 해리스의 통찰력이다. 삼십년 전에 쓰여졌음에도 여전히 신선하고 인상적인, 읽어갈수록 독자의 흥미를 배가시키는, 가히 그 명성에 걸맞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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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둥개 2006-01-15 0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행복나침반님, 맞아요. 서로의 문화를 이해하는 게 정말 어려운 일 같아요. ^^

열린사회의적 2006-01-21 15: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화의 다양성에 대한 접근을 던져준 책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 책을 tv에서 누구가 나와 설명한 적이 있는데.. 선교사가 아프리카에 가서, 사람들이 너무 옷을 벗고 있는게 흉측하여 옷을 입혀 주었더니 얼마가지 못하여 다시 벗고 말았다는 것입니ㅏㄷ. 그곳은 습하고 물 속, 나무 위를 돌아다녀야 하는데 옷이 불편한 것이였죠. 이렇듯 상대성을 인정 해 주어야 하는데... 이런 화두를 던지는 책이 아닐까 합니다.

검둥개 2006-01-30 09: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열린사회의 적님, 반갑습니다. ^^ 그러네요. 옷을 벗고 있는 것이 생활에 적합하기 때문에 그런 풍습이 성립되었겠어요. 이 책 저도 참 재미있게 읽었답니다.
 

book cover   권투에 대하여, 조이스 캐롤 오츠 (1986)


권투라고 하면 무엇이 제일 먼저 떠오르는가? 폭력, 빈곤, 근육질의 남자들, 땀과 피에 동물처럼 환호하는 관중들? 권투가 내게 가장 먼저 상기시키는 것은 주말마다 식구들의 원성을 무시하고 실황 권투중계에 채널을 고정시키던 아버지의 모습이다. 사각의 링 위에서 상연되는 끔찍스런 폭력, 권투경기는 내 눈에는 오직 그렇게만 보였다. 그것을 경탄하며 바라보는 아버지가 나는 잘 이해되지 않았다. 아버지 역시 바둑이나 산행과는 달리 권투경기 관전의 즐거움을 자식들에게 굳이 설명하려 하지 않으셨다. 참 이상한 일이 아닌가, 나는 늘 생각했다. 일상에서는 주먹 한 번 휘두르기는 고사하고 큰소리도 잘 치지 않으시는 아버지가 저렇게 피비린내나는 스포츠를 좋아하다니!

그래서 헌책방의 1달러 카트에서 이 책을 발견했을 때, 나는 오랫동안 잊혀졌던 유년의 한 수수께끼를 조우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낡은 표지에 박힌 사각형 사진, 온통 검은 바탕에 두 손을 위로 향해 들었지만 머리는 땅으로 숙인 저 손톱만한 고독한 복서의 모습. 그 사진을 봤을 때 머릿 속으로 기찻간처럼 휘리릭 수많은 이미지가 한꺼번에 몰려 지나갔다.

복서가 되는 것이 후진국에서는 (그것을 우리는 개발도상국이라고 불렀지만) 가난하고 못 배운 사람이 정당하게 성공하는 몇 안 되는 방법 중의 하나였던 적이 있었다. 가난한 것이 분하고, 못 배운 것이 억울하고, 불공평한 사회가 때려부수고 싶을 때 링 위에 올라가서 주먹을 휘둘러라. 능력이 따르면 있는 것이라고는 맨몸에 주먹과 층층이 쌓인 울분 뿐인 일개인도 영웅이 될 수 있었다. 상대를 KO시키는 데 필요한 것은 잘 훈련된 육체와 집중력, 매서운 주먹 뿐이다. 그러나 지옥훈련을 견뎌내며 간신히 얻은 승리의 벨트는 오래 한 사람에게 머무르지 않는다. 승리의 순간은 그야말로 순간일 뿐이다. 복서는 누구나 진다. 결국에는 패배한다. 승리란 오직 찰나에 불과할 뿐이다. 검은 사진 속의 흰 점처럼 박힌 복서의 모습이 십자가에 박힌 예수를 연상시키는 것은 그 때문이다.

조금이라도 힘이 남아 있는 한 일어나서 싸우라고 복서는 훈련받는다. 상대가 두 발로 서 있는 한 쓰러질 때까지 주먹으로 치라고 복서는 훈련받는다. 그래서 링 위에서 죽음을 맞이한 복서들은 신화가 된다.

Paret lays helpless on the ropes after a flurry by Griffith.

"페렛(Paret)은 어떤가? 그는 두 발로 서서 죽었다. 그가 18번의 강펀치를 받으며 서 있을 때 그 경기를 지켜보고 있던 관중들 모두의 심리 영역에 뭔가가 일어났다. 패렛의 죽음의 일부가 우리에게까지 다가왔다. 죽음이 공중에 떠도는 것을 사람들은 느낄 수 있었다. 패렛은 여전히 로프줄에, 그 덫에 갇혀 서 있었다. 그는 후회가 섞인 반 웃음 같은 것을 지어보였다. 마치 '내가 오늘 이렇게 죽을 줄은 알지 못했는데'라고 말하는 듯이. 그의 머리가 천천히 뒤로 기울어 갔다. 여전히 똑바른 상태로. 죽음이 그의 주변에 숨쉬러 왔다. 그는 의식을 잃어갔다. 그 어느 복서보다도 더 천천히 그는 쓰러졌다. 똑바로 서서 회전하면서 자신의 무덤으로 일초 간격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거대한 선박처럼 그는 바닥으로 쓰러졌다. 페렛이 쓰러졌을 때 그의 상대 그리피스의 주먹 소리는 먼 곳으로부터 들려오는 젖은 통나무를 베는 무거운 도끼소리처럼 사람들의 마음에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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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먼 메일러, "Ten Thousand Words a Minute"

  

사람들은 권투가 원시적이고 폭력적이고 잔인하고 미개한 스포츠라고 생각한다. 그건 승리와 패배가 삶과 죽음에 등치될 수 있는 유일한 스포츠가 권투이기 때문이다. 권투선수는 자신을 공격하는 상대를 끝장내려는 살인충동을 지닌 괴물로 보일 수도 있지만, 또한 권투선수는 상대를 무너뜨릴 단 한 번의 주먹을 휘두를 기회를 위해 수십번의 펀치를 감내하고 죽음이 다가오는 순간에도 쓰러진 바닥에서 다시 일어서는 투사일 수도 있다. 그 때 그는 신 앞에 홀로 서서 죽음의 운명에 도전하는 인간의 영웅이다. 그 때 사각의 링은 신전이 된다. 패배가 예정된 순간에도 의식불명으로 쓰러지기 전까지 포기하지 않고 되풀이해 일어서는 복서는 인간에게 가장 기본적 생존본능을 거스른다. 1982년 라이트웨이트급 세계 챔피언에 도전한 김득구는 레이 만시니(Ray Mancini)의 주먹에 뇌출혈로 쓰러지는 그 치명적인 죽음의 순간에도 의지로 자신의 몸을 일으켜세우려 했다.
Korean lightweight champion Duk Koo Kim lays on the canvas, knocked out by Ray Mancini in the 14th round at Caesars Palace on November 13, 1982. Kim struggled to his feet, but collapsed moments later and died of brain injuries on November 17.

"만약 그들이 내 머리털 한 올 없는 머리를 잘라 연다면,
그들은 커다란 하나의 복싱 글러브를 발견할 것이다.
그것이 나라는 인간의 전부다. 나는 권투를 인생으로 산다."
---마빈 해글러 (Marvin Hagler)

인간은 평생 오만가지 방법으로 자신의 부모를 이해하려 한다. 어떤 경우에, 그건 자신을 이해하는 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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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바람 2006-01-13 1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권투랑 비슷한 이유로 저는 장판지 밑에 깔려 있던 아빠의 '복권'도 떠오른답니다. 정말 잘 보았어요. 새해 좋은 일 많이 생기시길... 뒤늦은 인사를 부칩니다.

로드무비 2006-01-13 1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헌책방의 1달러 카트에서 이 책을 발견했을 때
너무 부럽습니다.
모처럼 글 올리셨네요.
입술 부르튼 건 좀 괜찮으세요?^^

마냐 2006-01-13 15: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죽음을 맞으면, 신화가 되고.....살아남으면, 평생 고생하고...저로선, 이 처절한 게임에 정이 안 갑니다...에효.

비로그인 2006-01-13 2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마전에 본 밀리언 달러 베이비가 생각 납니다. 러셀 크로우의 신데렐라맨도 곧 DVD로 나온다던데, 끊임없이 권투영화가 만들어지는 이유 또한 권투의 원초성, 그 처절한 아름다움 때문이겠지요.

검둥개 2006-01-14 06: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Manci님, 전 사실 록키의 여파로 권투영화를 생각하면 웃음이 나와요. ^^;;; 실제 중계는 무서워서 못 보구요. 이 책을 읽으면서 권투라는 스포츠에 대해 새롭게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답니다.

마냐님 맞어요. 그래도 목숨 걸구 뛰는 사람들이 있고 그걸 죽어도 봐야되는 관중이 있고요... 저도 에효. ^ .^

로드무비님 입술은 거의 다 나았답니다. 그 동안 제가 좀 뜸했죠?
이제 집에 왔으니 앞으로 맹렬히! ^^ =3=3=3

돌바람님 *^^* 새해 복 많이 받으셔요. 제가 흔적은 잘 못 남기지만 (주눅이 들어서) 님의 글을 늘 열심히 읽어요. 장판 아래 복권이라, 이래저래 아버지들이 생각나는 시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