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소룡 세대에 바친다
유하 지음 / 문학동네 / 1995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유하는 과거를 추억하는 데 부끄러움이 없는 시인이다. "세상의 모든 아침은 다시 오지 않는다. 생을 탕진했으므로, 나는 지나간 아침들에 대해 집착한다."(p.278) 이렇게 센치한 문장을 태연자약하게 발설하는 시인. "강호에 출도한다는 사실이, 둥지에서 처음 날으려는 어린 새처럼 두렵다. 그러나 힘차게 날아보리라. 매일 매일 작품으로 성숙해지리라." 그의 등단소감은 이러했다고 한다. 치기와 엄숙함의 이 발랄한 조화라니. 여기다가 그는 종종 지면에서 그의 모교 근처 유흥지에서 술마시던 기억을 회상한다. 그 유흥지가 중고등학교 시절 내가 놀러다니던 동네와 겹친다는 이유까지 해서 나는 그의 팬이다. 물론 심정적으로 그렇다는 이야기다. 출판된 지(1995) 십 년이 넘은 이 책을 이제서야 읽고 있으니까.

1995년이면 문화이론이 한창 유행하던 때였는데, 그 때는 물론 술독을 푸느라고 이런 책을 읽고 있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어쨌거나 이 책에서 유하는 대중문화에 대해 나름대로 상당히 분석적인 면모를 보여주는데, 아마 이 책을 진작에 읽었더라면 예전에 별 관심 없이 후닥닥 읽어치우고 말았던 그의 다른 시들에도 좀더 관심을 두고 보지 않았을까 싶다.

이 책은 3부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소재는 대략, 영화, 대중문화, 시 순이다. 그는 물론 영화평론가가 아니라 시인이므로, 영화와 영화관에 매혹되었던 그의 어린시절에 대한 추억 이야기가 그가 본 영화평보다 재미있게 읽힌다. 무협영화를 즐겨본(/보는) 사람들에게는 무협영화광인 유하의 "무협영화는 왜 보는가"가 상당히 인상적으로 읽힐 것이다. 이를테면 이런 구절을 보라: "역설적으로 말하자면, 무협영화는 일상에 놓여진 무의미성의 터널이 무협영화 속에서 보여지는 그 어떠한 시련보다도 훨씬 통과하기 어렵다는 것을 잘 깨닫게 해준다. 다르게 말하면, 무협영화가 펼쳐보이는 모험과 축제는 ... 현실에 대한 심한 무기력증을 선사한다. 왜냐하면 무협영화 속의 주인공이 겪는 험난한 시련과 그것을 뚫고 나가는 지혜와 용기 때위들은 '일상의 진실'과 현실감각이 완벽하게 거세된 자리에서 생성되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p.81) 이 에세이를 통해서 나는 평론가 김현이 "무협소설은 왜 읽히는가"라는 글을 썼다는 사실도 덤으로 알게 되었다. 

2부에서 대중문화에 대해서 그가 이야기하면서 거명하는 연예인은 최진실과 심혜진, 문제삼는 담론은 오렌지족과 압구정동이다. 여기서 십년의 차이가 느껴진다. 오래된 책을 읽는 재미는 아마 이렇게 회고하면서 읽는 데 있는 것일까? 하긴 대중문화에 대한 나의 친밀한 기억도 대략 그 부분에서 끝나기는 한다.  3부에서는 시인 허수경과 진이정, 함민복이 등장한다. 이 중 한 시인이라도 좋아하는 독자라면 유하의 글을 읽으며 실망하지는 않을 것 같다. 

게으른 영혼으로 산문을 쓰는 게 어렵네, 어쩌네 하고 책머리에서 시인은 엄살을 떨지만 이 책은 그의 재기발랄한 문장만으로도 읽을만한 잡문집이다. 게다가  평소에는 노래만 하는 시인의 조근조근한 이야기 소리까지 들을 수 있으니 하루 저녁을 즐거이 벗하기에 좋은 묵은 책이라고나 할까. 유하와 묵은 책이라는 말은 어째 좀처럼 어울리지 않는 듯도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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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2-17 14: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검둥개 2006-02-18 1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님 그러네요, 사는 게.
건강하겠습니다. 속삭님도요.

로드무비 2006-02-18 1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젊은 날엔 이상하게 유하가 얄미웠어요.
약아빠진 것 같아서.
좀 늙은 유하를 화면으로 보니 짠하더군요.^^

검둥개 2006-02-18 1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하 저도 늘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 넘의 '압구정동'이란 말 때문이었을까요?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요. 사실은 저보다 나이도 한참 많고 덩치도 크다던데! 장정일처럼 왜 유하에겐 나이를 먹지 않을 듯한 이미지가 있을까요? (아무래도 필명 때문인 것 같아요. 하하하) ;)

잉크냄새 2006-02-21 2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상의 모든 아침은 다시 오지 않는다. 생을 탕진했으므로, 나는 지나간 아침들에 대해 집착한다." 이 구절 참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어느날, 울컥하고 눈물이 날 정도로 가슴에 와 닿을것 같거든요. 잘 지내시죠?^^

검둥개 2006-02-22 14: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치명적인 구절이랄까, 그렇죠? ^.^
잉크냄새님 오랜만여요. 잉크냄새님도 잘 지내고 계시죠?
 
문화의 수수께끼 - 마빈 해리스 문화 인류학 3부작
마빈 해리스 지음, 박종렬 옮김 / 한길사 / 200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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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1974년에 출판된 마빈 해리스의 <소, 돼지, 전쟁과 마녀: 문화의 수수께끼>는 너무 유명해서 오히려 더 안 읽게 되는 책들 중의 하나이다. 읽지 않아도 여기저기서 얻어들은 풍월 덕에 마치 책의 내용을 다 알아버리기라도 한 듯한 착각에 빠지는 것이다. 하지만 <문화의 수수께끼>는 단순히 왜 인도인은 소고기를 먹지 않고, 반면 이슬람교인들과 유대인들은 돼지고기를 금기시하는가만을 설명하는 책이 아니다. 각 장에 등장하는 소재들은 얼핏 보기엔 아무렇게나 선택된 수수께끼들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설명의 복잡성 정도에 따라 세심하게 배열되었다.

해리스는 힌두인들의 암소 숭앙이나 이슬람교인/유대인들의 돼지고기 금식, 뉴기니 매링족의 돼지 숭앙을 그들의 거주환경이 인간에게 부과하는 제약과 그 제약 속에서 거주환경의 자연적 수용능력을 파괴함 없이 생활하기 위해 고안된 문화적 장치라고 설명한다. 사상자를 내며 무의미하게 반복되는 듯 보이는 전쟁이라든가 여성 수가 남성 수에 비해 절대적으로 부족한 사회에서 산모들이 오히려 여아만을 선택해 방치하거나 살해하는 현상을 고찰하면서, 해리스는 전쟁이 원시적 공격성의 산물이 아니라 사실은 정교한 인구조절 장치이며, 여아살해와 여성학대는 전체 집단이 일정한 단백질을 섭취할 수 있도록 남성들의 공격성을 북돋고 섹스를 그 보상으로 제공하는 사회제도라는 것을 보여준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해리스의 주장대로 전쟁이나 사회적 남성우월주의가 생존에 있어서의 혹은 어떤 다른 경제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고안된 문화적 장치라면, 그러한 목적을 다른 방식으로 충족시킴으로써 전쟁이나 남성우월주의/여아살해와 같은 관습을 제거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책의 나머지 반을 차지하는 포트라치 관습과, 유령 화물, 구세주, 중세의 마녀 사냥에 대한 해리스의 논변은 이러한 문화적 현상 배후의 진정한 역학관계를 밝히면서 놀라움을 선사한다. 포트라치 관습이 부의 재분배를 위한 것이라는 것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지만, 거주 환경에 따라 부의 재분배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짐을 보이는 해리스의 설명은 매우 정교하다. 일견 지극히 비이성적으로 보이는 유령 화물에 대한 믿음이 사실은 제국주의 서양 열강의 지배 하에서 뉴기니의 고산지대 원주민들이 착취된 노동의 댓가에 대한 일종의 주장으로 기능하는 동시에 식민지배에 대한 저항운동의 발판이 되었다는 부분은 독자의 감탄을 사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역시 이 책에서 가장 탁월하게 보여지는 것은 뉴기니의 원시부족들의 관습과 서양 중세의 마녀사냥을, 기독교 성립 초기의 정치적 상황과 그 속에서 예수의 죽음이 정치적으로 변용되어 수용되고 전파되는 방식을, 그리고 나아가 저술 당시의 반문화운동의 정치적 의미와 한계를 연결시키는 해리스의 통찰력이다. 삼십년 전에 쓰여졌음에도 여전히 신선하고 인상적인, 읽어갈수록 독자의 흥미를 배가시키는, 가히 그 명성에 걸맞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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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둥개 2006-01-15 0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행복나침반님, 맞아요. 서로의 문화를 이해하는 게 정말 어려운 일 같아요. ^^

열린사회의적 2006-01-21 15: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화의 다양성에 대한 접근을 던져준 책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 책을 tv에서 누구가 나와 설명한 적이 있는데.. 선교사가 아프리카에 가서, 사람들이 너무 옷을 벗고 있는게 흉측하여 옷을 입혀 주었더니 얼마가지 못하여 다시 벗고 말았다는 것입니ㅏㄷ. 그곳은 습하고 물 속, 나무 위를 돌아다녀야 하는데 옷이 불편한 것이였죠. 이렇듯 상대성을 인정 해 주어야 하는데... 이런 화두를 던지는 책이 아닐까 합니다.

검둥개 2006-01-30 09: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열린사회의 적님, 반갑습니다. ^^ 그러네요. 옷을 벗고 있는 것이 생활에 적합하기 때문에 그런 풍습이 성립되었겠어요. 이 책 저도 참 재미있게 읽었답니다.
 
꼿 가치 피어 매혹케 하라 - 신문광고로 본 근대의 풍경
김태수 지음 / 황소자리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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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화 이래 한국의 역사는 혼란의 역사였다. 정체의 혼란, 일제 강점기의 혼란, 이념의 혼란, 민간인 사상자 수가 최고로 많은 전쟁이었다는 소리를 듣는 6.25에서의 동족상잔에 이르기까지. 그래서 우리의 조부모, 우리의 부모들은 과거에 대해 역사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꺼렸다. 기껏 제사날이나 차례날에도 얻어듣는 이야기라곤 옛적에는 운동화 한 켤레가 얼마나 선망의 대상이던 물건이었나, 사진기란 얼마나 드물고 귀하고 신기한 것이었나, 같은 게 전부였다. 

한 때 나는 그것이 불만이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우리의 조부모와 부모 세대에게 그런 침묵은 어쩌면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6.25 사변에서 사망한 피붙이의 이야기라거나 일제 때 끌려나간 친척의 기억, 편재하던 빈궁의 조건 같은 건 회상하기엔 너무 끔찍하고 아파서 차라리 잊는 게 좋고 죽을 때 무덤에 자신의 뼈와 함께 묻고 싶은 그런 종류의 내밀하고 쓰린 역사였던 것이다.

덕분에 우리는 전쟁의 직접적 기억을 물려받지 않았다. 일본에 대한 막연하고 강렬한 반감은 있지만 그것도 그 뿐이다. 그건 좋은 일이기도 하겠지만, 역사는 이야기되지 않고 추억되지 않고 말해지지 않는 사이에 어느새 우리에게서 영영 잊혀지지는 않았나? 왕조 드라마가 나올 때마다 궁궐 안 일에 초미의 관심을 보이며 시청하지만 당시의 평민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는가? 막연히 상상하기로 짚신과 초가집, 고무신에 흰 무명 한복이 전부일 뿐이다. 개화기의 사람들은 뭘 입고 뭘 먹으며 살았을까? 창씨개명을 강요당하던 일제 강점기의 조선인들은 무슨 낙으로 인생을 살았는가? 기껏 백 년 이백년 전의 우리 조상들, 거슬러 올라간다고 해봤자 기껏해야 두세 세대인데 나의 증조부모는 어떻게 살았나, 하면 머리 속이 창호지처럼 하얗게 빈다.

기껏 백년 이백년 전 역사도 우리 기억에서 이렇게 멀기만 한데 툭하면 "반~만년 역사"라고 으스대던 것을 생각해보면 무슨 헛구라람, 하고 한숨이 절로 나온다. 그런 당연한 생각을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해보지 못했다. 겨우 백 년 거슬러 올라간 시대에 서울에서 전주에서 부산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살고 있었나 하는 것이 박물학적 관심의 대상으로 취급된다는 것이 얼마나 부자연스러운가, 하는 생각!

이 책의 부제는 책의 내용을 적절하게 요약해준다. <신문광고로 본 근대의 풍경>. 그 속에서 우리는 거북선 표 고무신을, 박가분을, 바리깡을, 성병을, 기생연합노조를, 연애라는 '관념'의 유행을 만난다. 영어를 배우지 않으면 살기 어려워질 세상이라고 외치는 광고는 우리로 하여금 쓴웃음을 짓게 하고, 서민에게 가장 친밀했다는 전당포 이야기에는 눈가가 약간 붉어지려고 한다.

몇 장만 읽어보면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학술적인 책은 아니지만, 우리에게서 잊혀진 그 시대가 받아야 할 정당한 관심을 단숨에 제자리로 복권시킨다. 게다가 그것도 무척 신나고 다른 한편으로는 정당하게 마음이 저릿저릿한 그런 방식으로.  한두 세대쯤 후에는 우리에게도 조선 왕조 말기, 개화기, 일제 강점기, 내전의 시기, 그 이후를 다 포괄하는 바로 지금의 우리 같은 평범한 과거의 사람들, 우리의 고조부모, 증조부모, 조부모, 부모의 생활사에 대한 학술적 연구가 촘촘히 축적되어, 더 자세하고 더 재미있고 더 생생한 과거 이야기를 들으며 더이상 근대의 역사 앞에서 난처하고 어색하지 않아도 좋았으면, 근대가 우리에게서 작은 개천에 놓인 다리 하나 건너듯이 쉽게 가서 만날 수 있는 역사였으면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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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5-12-19 1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만 해도 전당포 출입을 했는데 말입니다.
친구 금반지 잡혀서 술 마시느라.
우와, 빨리도 읽고 근사하게 리뷰 쓰셨네요.
저도 빨리 읽고 어느 님께 이 책 드리기로 했는데......
마음이 조급해집니다.^^

검둥개 2005-12-20 0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저 숙제 했어요!!! *^^* 잘 했죠? 사실은 쓰느라고 고생 깨나 했어요. 내용은 전부 재미있는데 읽고 있자니 그 시대가 떠올라 마음이 복잡하더라고요. ^^ 역사에 무심한 자신에 대한 자책도 되고... 전당포 이야기는 특별히 마음에 드실 겁니다. 문인들이 나오거든요. 근데 그 금반지 이야기는 또 뭐예요? 뻬빠로 써주삼. ^ .^*

플레져 2005-12-20 0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재밌는 책은 리뷰 쓰기 어려운데...^^
(전 아직 이 책 못봤어요 ㅋㅋ) 하지만! 알라디너들의 필독서처럼 굳혀져서 안읽고 있는 것 조차 마음에 좀 걸려요...ㅎㅎ 또 한번 염장샷 받고 갑니다.

검둥개 2005-12-20 0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시면 금방 뿅 가실 거에요. 표지에 나온 광고들이 얼마나 재밌는지!
전 플레져님 땜시롱 김애란의 책이 읽구 싶어서 미치겠어요. ^^ 가까이 살면 바꿔보면 딱 좋을텐데 아쉬움입니다. ㅎㅎ 하여간 우리 사이 좋은 사이에요 ㅎㅎ

2005-12-23 02: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검둥개 2005-12-23 0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 속삭님, 방금 속삭님 서재에 갔다 왔는데 ㅎㅎ 악필을 그리 좋게 봐주시니 감사합니다. 사실은 읽지도 못하신 거 아닐까 은근히 걱정이어요. ^ .^ 크아, 거의 성탄에 맞춰갔죠? (괜시리 혼자서 뿌듯해하는 ;)
 
2046 S.E.
왕가위 감독, 양조위 외 출연 / 20세기폭스 / 2005년 3월
평점 :
절판


왕가위처럼 천연덕스러운 감독도 많지 않다. 많은 영화를 만들었으나 주제는 단 하나 뿐이다. 왕가위 덕분에 관객들은 일정한 풀의 배우들이 돌고 돌면서 이렇게 저렇게 변주해내는 똑같은 이야기를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지치지도 질리지고 않은 채 듣고 또 듣고 있는 자신들을 발견하게 된다. 붙잡고 있는 그 주제를 가지고 얼마까지 갈 수 있냐고 물어보라. 창문 밖을 멍하니 내다보고 있는 안드로이드 왕정문을 보여주며 감독 왕가위는 이렇게 대답한다. 10년 후, 100년 후, 1000년 후 ...

미국의 한 평론가는 이 영화 2046을 일컬어 "사랑한다는 것의 불가능성에 대한 명상"이라고 했다고 한다. 그 평론가, 똘똘하기도 하지. 그리도 똑떨어지게 한 구절로 그 말을 내뱉어버리다니, 동사서독이며 중경삼림이며, 그리고 <아비정전---화양연화---2046>으로 이어지는 트릴로지에서 내내 되풀이되던 그 테마가 두부 한 모처럼 야속하게 똑 떨어진다. 되풀이해서는 얼마든지 볼 수 있지만 정작 그에 대해 듣고 싶거나 말하고 싶지는 않게 만드는 그런 묘한 매력이 왕가위의 영화에는 있다.

아비정전(1991)에서의 유가령을 기억하는가? 얼빠진 장학우 앞에서 직업을 가르쳐준다며 라디오 음악에 맞춰 춤을 추어보이던 젊은 댄서 루루. 2046(2004)의 첫머리에 십삼년의 세월을 이고서 늙은 그녀가 중년 여인이 되어 등장할 때 나는 가슴이 철렁하고 내려앉는 소리를 들었다. 자신을 사랑해주지 않는 사람을 사랑한 비극으로 치자면야 그녀 루루나, 고운 얼굴로 "나는 내가 이겼다고 생각했지만, 내가 가장 아름다웠을 때 내가 사랑한 사람은 내 곁에 없었다"고 읊조리던 동사서독 속의 장만옥, 새장을 치며 가슴을 찢는 울음소리를 내던 같은 영화 속의 임청하 모두 다 사랑의 여러 얼굴 중의 하나에 불과했다. 하지만 퍼석한 피부로 피곤한 눈매로 지친 얼굴로 2046 에 등장한 루루의 얼굴은 내가 본 사랑의 얼굴 중에 가장 정직한 것이었다.

화양연화에서 수리첸(장만옥)을 보며 마음만 졸이던 차우 선생(양조위)을 기억하는 관객이라면 2046에서의 뻔뻔하고 능글맞기까지 한 차우 선생이 낯설기만 할 것이다. 바람피우는 아내 때문에 말도 못하고 가슴이 무너지던 그 차우 선생이 수리첸만 바라보며 평생을 살 줄 알았던 우리의 기대를 무참하게 배반하며, 13년 사이에 도박을 즐기며 신문에 색정소설 나부랑이를 연재해서 생계를 잇는 데 부끄럼이 없는 원나잇 스탠드의 전문가로 변신해 나타난다. 사람은 변하는 것이다. 싱가폴 도박판에서 만난 수리첸(공리)이라는 캄보디아 여자를 그는 사랑했고, 홍콩으로 돌아와 이웃이 된 바이링(장쯔이)에게도, 애인의 편지를 전해주다가 무협소설을 함께 쓰는 사이가 된 여관주인 딸 왕정문에게도 그는 마음을 주었다. 혹자는 말할 것이다. 그 모든 과정에서 그가 원하고 있던 단 한 명의 여자는 오직 십삼년 전의 수리첸 뿐이었다고. 그 모든 여자들을 통해 사실 차우 선생은 오직 수리첸 단 한 명만을 사랑하고 있을 뿐이라고.

십 년 전의 나라면 아마 나 역시 2046을 그렇게 읽었을 것이다. 평론가 누구의 말마따나 그것은 사랑의 불가능성에 대한 명상이라고, 영화 속에서 차우 선생이 말하듯 "사랑은 타이밍이라고, '인생의 바로 그 사람'을 만났다는 것 자체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중요한 건 언제 그 사람을 만났느냐 하는 거"라고. 나는 왕가위가 변할지, 변할 수 있을지, 혹은 조금씩 변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 그러나 사람은 변한다. 나는 차우 선생이 그 모든 여자들을 다 사랑했다고 읽기로 했다. 바람난 아내 때문에 속을 태우며 알게 된 수리첸을 그는 사랑했으며, 검은 장갑을 끼고 도박하던 또다른 수리첸도, 그녀를 버리고 훌쩍 떠난 옛 남자친구(=아비) 이야기를 많이 했다는 댄서 루루도, 고급창녀 바이링도, 왕정문도 그는 모두 사랑했다고.

왕가위 영화 속의 인물들은 좀처럼 그들의 사랑과 맺어지지 않는다. 덕분에 그들은 영화 속 그들의 인생에서 일반인보다 서너배 이상 되는 사랑을 만난다. 흔하지는 않겠지만 지구상의 수십억 인간 중에 그 정도 사연을 가진 사람도 없으란 법은 없다. 왜 우리는 진정한 사랑은 인생에 단 한 번이라고, 사랑을 아는 자는 오직 그 인생에 단 한 번이라는 그 사랑을 평생 가슴에 품고 사는 인간이라고만 고집하는가? 이 사람과 저 사람과 그 사람, 그 사람들을 사랑하던 저마다 다른 시기의 우리는 그 사람들만큼이나 다른 인간이었는지도 모른다. 왜 차우가 아내의 정부의 아내이던 수리첸을 사랑했다고 해서, 그녀와의 사랑을 비밀로 앙코르와트 어느 나무에 구멍을 뚫고 봉인했다고 해서, 옛애인을 못 잊고 미미가 된 루루를, 싱가폴의 도박사이던 또다른 수리첸을, 바이링을, 일본어 교본을 탐독하던 왕정문을 그 만큼 사랑했어서는 안 되는가? "모든 기억은 눈물 자국"이라고 왕가위는 영화 중간에 글씨로 써넣었다. 왜 시간 속에 떨어진 눈물들이 모두 공평한 기억이어서는 안되는가?

왕가위의 변하지 않는 영화를 보면서도 관객은 변한다. 2046을 보고 나는 그것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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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wup 2005-12-18 17: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끙... 2046은 일부러 보지 않았어요. 너무 허망해질 것 같아서. 그런데 정말 이 트릴로지를 순서대로 보고 싶은 생각이 드네요.


hanicare 2005-12-19 1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퍼갑니다.

로드무비 2005-12-19 1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검둥개님, 제 2046 페이퍼 보셨어요?
그것보다 훨 잘 쓰셨어요.^^
너무나 근사한 리뷰!!!

kleinsusun 2005-12-19 2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검둥개님, 넘 멋진 글이예요!
음...전 <2046>을 보고 실망을 많이 했었는데.....
"사랑한다는 것의 불가능성에 대한 명상"이라..... 불가능한가요? ㅎㅎ

검둥개 2005-12-20 0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kleinsusn님 전 이제 이십대 초반에 그랬듯이 왕가위 영화를 마음 졸여가며 보지 않아요. ^^ 실실 웃으면서 봤거든요. 실망이란 건 기대와 늘 함께 가는 거니까, 어떤 기대를 했느냐에 따라서 실망을 하느냐 아니냐가 갈릴 수 있겠죠. ;)

로드무비님, 물론 봤죠. (까치둥우리 머리 언급이 나와 무척 뜨끔했던 기억이 생생!) ^^;;; 감독이 주구장창 하도 같은 소리만 해대니까 이젠 슬슬 딴지를 걸구 싶어지는 관객의 심정이랄까 그런 게 들어서 써봤어요. 그래도 아비정전이랑 2046이랑 같이 묶어서 영화관에서 큰 스크린으로 봐서 좋았어요. ㅎㅎ

hanicare님, 조잡한 리뷰야요. ^^;;;

namu님 순서대로 보세요. ^^ 전 아비정전이 뭐가 트릴로지의 첫번째라는 거야 하다가 다시 보고 기억이 나더군요. ㅎㅎ

플레져 2005-12-20 0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휴...숨막히게 너무 잘 쓴, 2046을 이해하지 못한 내가 원망스러운 그러나 내 가슴이라면 조금 이해도 되는... 검둥개님만의 감각이 살아있는 리뷰네요... 아...검둥개님의 이 리뷰를 먼저 봤더라면 2046을 좀 더 멋지게 봤을 텐데. 극장엔 함께 간 일행들, 여섯 명 뿐이었고, 우리들은 마치 우리만을 위해 상영하는 영화를 보는 양 취해 있었는데...

왜 우리는 진정한 사랑은 인생에 단 한 번이라고, 사랑을 아는 자는 오직 그 인생에 단 한 번이라는 그 사랑을 평생 가슴에 품고 사는 인간이라고만 고집하는가?

글을 쓴 사람만의 사유가 녹아있을 때 비로소 빛나는 문장을 '명문' 이라 하지요...


검둥개 2005-12-20 0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오 플레져님, 이런 칭찬을 받아두 되나요? *^^* (얼굴이 화끈화끈)
아이 감사합니다.
 
보르헤스 문학을 말하다 르네상스 라이브러리 9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박거용 옮김 / 르네상스 / 2003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그 이름 자체마저 어째 포스트모던하게 들리는(!) 보르헤스라면 거의 "라틴 문학"보다도 더 유명한 말이며, <돈키호테>를 세르반테스 다음으로 잘 알려진 라틴 작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문학을 말하다>라는 제목으로 그런 유명한 작가가 쓴 책이 나오면 도저히 읽어보지 않고는 배길 수 없을 것 같다. 하지만 책 한 권에서 대작가의 특별한 작품창작 비결이 공개될 것처럼 제목을 짓는 것은 물론 출판사의 상술이니, 그런 것을 기대해서는 곤란하겠다. 작가 자신조차도 그런 것을 과연 책 한 권으로 엮어낼 수 있을 정도로 체계적으로 알고 있는지 수상쩍거니와 (대부분의 작가들은 늘 종이와 펜을 들고 고뇌하지 않는가, 비결이 있다면 몇 시간만 일필휘지하고 나가 놀 수 있을 텐데!), 정말 알고 있다고 한다면 그 비결이라는 건 더욱더 공개할 수 없는 보물일 것이 아니겠는가.

설령 그런 다소 허황한 기대를 품고 책을 샀다가 대뜸 튀어나오는 시, 시, 시, 이야기에 기겁을 했다면, (보르헤스가 시도 썼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으며 그의 시들은 더욱 그러하니) 후다닥 페이지를 넘겨 마지막 장의 이런 구절을 읽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것이 좋겠다.

"... 이제 시간을 건너뛰어 내가 제네바에 갔던 때의 이야기이다. 그 때 나는 매우 불행한 젊은이였다. 젊은이들이란 불행함에 지극한 애착을 갖는 듯 하다. 그들은 불행한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하며 대개는 그 원을 이룬다. 그 때 나는 분명 무척이나 행복한 인간인 한 작가를 알게 되었다. 내가 월트 휘트먼의 시를 읽은 것은 1916년이었음에 분명하다. 그의 시를 읽은 후 나는 무척 창피했다. 왜냐하면 그 때에도 나는 도스토예프스키를 읽으면서 더욱 더 불행해지려고 노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늙어서 철이 든 노작가의 솔직한 이런 고백은 정말이지 유머러스하다. 아마 이 말을 하면서 자신도 도스토예프스키에 너무 빠져서 휘트먼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정말이지 어쩔 뻔 했는가,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한국에서 지구 정반대라는 아르헨티나에 사는 이 작가가 갑자기 무척 친근하게 느껴진다. 마지막 장을 계속 읽어나가다 보면 (끈질기게 튀어나오는 중세 영어나 라틴어, 스페인어 등은 대담하게 무시하면서) 더욱 재미있는 고백이 이어진다.

"내가 처음 단편을 쓰기 시작했을 때는 독자들을 속여먹으려고 용을 썼다. 스타일에 무지하게 신경을 썼으며, 그래서 때로 정작 하려던 이야기들은 수많은 덮개 아래로 숨겨져버리고 말았다.  ...... 그렇게나 많은 이상한 형용사들 하며 비유들을 남발하지만 않았었더라도 ...... 이제 나는 (그런 경로를 거쳐) 뭔가 지혜를 얻었다기보다는 아마도 좀 정신을 차린 것 같다. ..." (위의 두 인용은 제가 대충 번역한 것이므로 책과는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노년의 보르헤스는 확실히 젊었을 때보다 훨씬 행복해진 모양이다.

이 책의 원제, <이 詩作의 기술 This Craft of Verse>이 시사하듯이, 이 책의 내용은 사실 거의 90%가 시에 대한 것이다. *시란 무엇인가, *은유란 어떤 것인가, *시와 서사시, *시의 번역, *시의 의미, *표현과 암시, 이런 주제들이 차례차례로 다루어지므로 <보르헤스, 문학을 말하다>라는 제목이 주는 인상과 실제 책의 내용에는 차이가 있다.

시에 대한 그의 입장을 정확히 몇 단어로 표현할 수 있는 문학이론 용어를 몰라 아쉬운데, 이 강연(이 책은 보르헤스가 1967-1968년 사이에 강연한 내용을 엮은 것이다)에서 그가 주장하는 내용은 시는 반드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 전에 느끼는 것이며, 시에서 우리가 느끼는 아름다움은 그 시의 의미 만큼이나 혹은 그 이상으로 직접적이고 우선적이라는 것이다. (물론 보르헤스는 문학이론가가 아니므로 이런 주장을 체계적으로 논변한다기보다 그냥 자기 생각에 그렇다는 식으로 말한다. 청중석 앞좌석에 주르르 앉아 이런 보르헤스의 주장을 심각한 표정으로 듣고 있었을 오만가지 문학 전공교수들을 상상해 보면 무척 재미있다.) 개인적으로 시를 잘 이해하지 못하면서 무조건 좋아서 여러번 읽는 나로서는 보르헤스가 직접 이렇게 말해주는 것이 무척 뿌듯했다. 보르헤스는 더 나아가 말의 기원을 상징에서 찾으면서 "단어들은 공유된 기억의 상징일 뿐"이며 시인이 할 수 있는 것은 생각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며, 언어가 수행할 수 있는 최대치는 오직 '암시'일 뿐이라고 한다.

보르헤스의 시는 모르더라도 시 읽기를 좋아하거나, 보르헤스의 소설을 한 번쯤 즐거이 읽은 적이 있어 그 작가가 시나 소설 일반에 대해 뭐라 말할까 궁금증을 품어본 적이 있는 사람들에게 추천할 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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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wup 2005-12-08 1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군침 돌게 만드는 리뷰예요. 리뷰는 페이퍼보다 힘드시다더니. 검둥개 님이 손목에 힘만 좀 풀면... 이렇다니까요. 저, 퍼갈게요.

로드무비 2005-12-08 12: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암팡진 리뷰입니다.
검둥개님의 번역, 그 말투가 좋아요.^^

마태우스 2005-12-08 12: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야, 정말 인간이 쓸 수 있는 최고의 리뷰군요. 최근 석달간 이주의 리뷰에 당선되신 적이 없다면 다음주를 기대하셔도 될 듯.... 당근 추천입니다.

hanicare 2005-12-08 1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트에 가서 도열해있는 보르헤스 올리브유를 보면 그냥 웃음만 납니다.그나저나 나이들수록 행복해진다는 건 맞는 말 같아요. 젊었을 때는 불만의 알리바이 찾는데 시간을 다 보냈던 듯.

검둥개 2005-12-09 0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무님 군침이 도신다니 ^^ 뭘 잡수시려구요? ^^

로드무비님 진짜요? 헤벌쭉 ^^* =3=3=3

마태우스님, 없어요. ㅎㅎ 추천 감사합니다 ;)

hanicare님 세상에 그런 올리브유 브랜드가 있군요. ^^ 상당히 포스트모던해서 맛은 과연 어떨지 모르겠네요... 어째 덥석 사기엔 약간 불안할 듯. 나이 들어서 행복이 더 쉬워지는 듯 하다는 것에 저두 동감입니다. 불만이 한 풀 꺾이는 게 그 이유 중 하나겠죠? ^^

2005-12-09 10: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검둥개 2005-12-10 0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님 지금 체크해보니 제 팔뚝이 ^^;;; 얇은 편은 아니로군요 흑. =3=3=3

이리스 2005-12-14 14: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 누르고 갑니다. *^^*

검둥개 2005-12-15 05: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구두님 ^^*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