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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룡 세대에 바친다
유하 지음 / 문학동네 / 1995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유하는 과거를 추억하는 데 부끄러움이 없는 시인이다. "세상의 모든 아침은 다시 오지 않는다. 생을 탕진했으므로, 나는 지나간 아침들에 대해 집착한다."(p.278) 이렇게 센치한 문장을 태연자약하게 발설하는 시인. "강호에 출도한다는 사실이, 둥지에서 처음 날으려는 어린 새처럼 두렵다. 그러나 힘차게 날아보리라. 매일 매일 작품으로 성숙해지리라." 그의 등단소감은 이러했다고 한다. 치기와 엄숙함의 이 발랄한 조화라니. 여기다가 그는 종종 지면에서 그의 모교 근처 유흥지에서 술마시던 기억을 회상한다. 그 유흥지가 중고등학교 시절 내가 놀러다니던 동네와 겹친다는 이유까지 해서 나는 그의 팬이다. 물론 심정적으로 그렇다는 이야기다. 출판된 지(1995) 십 년이 넘은 이 책을 이제서야 읽고 있으니까.
1995년이면 문화이론이 한창 유행하던 때였는데, 그 때는 물론 술독을 푸느라고 이런 책을 읽고 있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어쨌거나 이 책에서 유하는 대중문화에 대해 나름대로 상당히 분석적인 면모를 보여주는데, 아마 이 책을 진작에 읽었더라면 예전에 별 관심 없이 후닥닥 읽어치우고 말았던 그의 다른 시들에도 좀더 관심을 두고 보지 않았을까 싶다.
이 책은 3부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소재는 대략, 영화, 대중문화, 시 순이다. 그는 물론 영화평론가가 아니라 시인이므로, 영화와 영화관에 매혹되었던 그의 어린시절에 대한 추억 이야기가 그가 본 영화평보다 재미있게 읽힌다. 무협영화를 즐겨본(/보는) 사람들에게는 무협영화광인 유하의 "무협영화는 왜 보는가"가 상당히 인상적으로 읽힐 것이다. 이를테면 이런 구절을 보라: "역설적으로 말하자면, 무협영화는 일상에 놓여진 무의미성의 터널이 무협영화 속에서 보여지는 그 어떠한 시련보다도 훨씬 통과하기 어렵다는 것을 잘 깨닫게 해준다. 다르게 말하면, 무협영화가 펼쳐보이는 모험과 축제는 ... 현실에 대한 심한 무기력증을 선사한다. 왜냐하면 무협영화 속의 주인공이 겪는 험난한 시련과 그것을 뚫고 나가는 지혜와 용기 때위들은 '일상의 진실'과 현실감각이 완벽하게 거세된 자리에서 생성되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p.81) 이 에세이를 통해서 나는 평론가 김현이 "무협소설은 왜 읽히는가"라는 글을 썼다는 사실도 덤으로 알게 되었다.
2부에서 대중문화에 대해서 그가 이야기하면서 거명하는 연예인은 최진실과 심혜진, 문제삼는 담론은 오렌지족과 압구정동이다. 여기서 십년의 차이가 느껴진다. 오래된 책을 읽는 재미는 아마 이렇게 회고하면서 읽는 데 있는 것일까? 하긴 대중문화에 대한 나의 친밀한 기억도 대략 그 부분에서 끝나기는 한다. 3부에서는 시인 허수경과 진이정, 함민복이 등장한다. 이 중 한 시인이라도 좋아하는 독자라면 유하의 글을 읽으며 실망하지는 않을 것 같다.
게으른 영혼으로 산문을 쓰는 게 어렵네, 어쩌네 하고 책머리에서 시인은 엄살을 떨지만 이 책은 그의 재기발랄한 문장만으로도 읽을만한 잡문집이다. 게다가 평소에는 노래만 하는 시인의 조근조근한 이야기 소리까지 들을 수 있으니 하루 저녁을 즐거이 벗하기에 좋은 묵은 책이라고나 할까. 유하와 묵은 책이라는 말은 어째 좀처럼 어울리지 않는 듯도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