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꼿 가치 피어 매혹케 하라 - 신문광고로 본 근대의 풍경
김태수 지음 / 황소자리 / 2005년 6월
개화 이래 한국의 역사는 혼란의 역사였다. 정체의 혼란, 일제 강점기의 혼란, 이념의 혼란, 민간인 사상자 수가 최고로 많은 전쟁이었다는 소리를 듣는 6.25에서의 동족상잔에 이르기까지. 그래서 우리의 조부모, 우리의 부모들은 과거에 대해 역사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꺼렸다. 기껏 제사날이나 차례날에도 얻어듣는 이야기라곤 옛적에는 운동화 한 켤레가 얼마나 선망의 대상이던 물건이었나, 사진기란 얼마나 드물고 귀하고 신기한 것이었나, 같은 게 전부였다.
한 때 나는 그것이 불만이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우리의 조부모와 부모 세대에게 그런 침묵은 어쩌면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6.25 사변에서 사망한 피붙이의 이야기라거나 일제 때 끌려나간 친척의 기억, 편재하던 빈궁의 조건 같은 건 회상하기엔 너무 끔찍하고 아파서 차라리 잊는 게 좋고 죽을 때 무덤에 자신의 뼈와 함께 묻고 싶은 그런 종류의 내밀하고 쓰린 역사였던 것이다.
덕분에 우리는 전쟁의 직접적 기억을 물려받지 않았다. 일본에 대한 막연하고 강렬한 반감은 있지만 그것도 그 뿐이다. 그건 좋은 일이기도 하겠지만, 역사는 이야기되지 않고 추억되지 않고 말해지지 않는 사이에 어느새 우리에게서 영영 잊혀지지는 않았나? 왕조 드라마가 나올 때마다 궁궐 안 일에 초미의 관심을 보이며 시청하지만 당시의 평민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는가? 막연히 상상하기로 짚신과 초가집, 고무신에 흰 무명 한복이 전부일 뿐이다. 개화기의 사람들은 뭘 입고 뭘 먹으며 살았을까? 창씨개명을 강요당하던 일제 강점기의 조선인들은 무슨 낙으로 인생을 살았는가? 기껏 백 년 이백년 전의 우리 조상들, 거슬러 올라간다고 해봤자 기껏해야 두세 세대인데 나의 증조부모는 어떻게 살았나, 하면 머리 속이 창호지처럼 하얗게 빈다.
기껏 백년 이백년 전 역사도 우리 기억에서 이렇게 멀기만 한데 툭하면 "반~만년 역사"라고 으스대던 것을 생각해보면 무슨 헛구라람, 하고 한숨이 절로 나온다. 그런 당연한 생각을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해보지 못했다. 겨우 백 년 거슬러 올라간 시대에 서울에서 전주에서 부산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살고 있었나 하는 것이 박물학적 관심의 대상으로 취급된다는 것이 얼마나 부자연스러운가, 하는 생각!
이 책의 부제는 책의 내용을 적절하게 요약해준다. <신문광고로 본 근대의 풍경>. 그 속에서 우리는 거북선 표 고무신을, 박가분을, 바리깡을, 성병을, 기생연합노조를, 연애라는 '관념'의 유행을 만난다. 영어를 배우지 않으면 살기 어려워질 세상이라고 외치는 광고는 우리로 하여금 쓴웃음을 짓게 하고, 서민에게 가장 친밀했다는 전당포 이야기에는 눈가가 약간 붉어지려고 한다.
몇 장만 읽어보면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학술적인 책은 아니지만, 우리에게서 잊혀진 그 시대가 받아야 할 정당한 관심을 단숨에 제자리로 복권시킨다. 게다가 그것도 무척 신나고 다른 한편으로는 정당하게 마음이 저릿저릿한 그런 방식으로. 한두 세대쯤 후에는 우리에게도 조선 왕조 말기, 개화기, 일제 강점기, 내전의 시기, 그 이후를 다 포괄하는 바로 지금의 우리 같은 평범한 과거의 사람들, 우리의 고조부모, 증조부모, 조부모, 부모의 생활사에 대한 학술적 연구가 촘촘히 축적되어, 더 자세하고 더 재미있고 더 생생한 과거 이야기를 들으며 더이상 근대의 역사 앞에서 난처하고 어색하지 않아도 좋았으면, 근대가 우리에게서 작은 개천에 놓인 다리 하나 건너듯이 쉽게 가서 만날 수 있는 역사였으면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