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46 S.E.
왕가위 감독, 양조위 외 출연 / 20세기폭스 / 2005년 3월
평점 :
절판


왕가위처럼 천연덕스러운 감독도 많지 않다. 많은 영화를 만들었으나 주제는 단 하나 뿐이다. 왕가위 덕분에 관객들은 일정한 풀의 배우들이 돌고 돌면서 이렇게 저렇게 변주해내는 똑같은 이야기를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지치지도 질리지고 않은 채 듣고 또 듣고 있는 자신들을 발견하게 된다. 붙잡고 있는 그 주제를 가지고 얼마까지 갈 수 있냐고 물어보라. 창문 밖을 멍하니 내다보고 있는 안드로이드 왕정문을 보여주며 감독 왕가위는 이렇게 대답한다. 10년 후, 100년 후, 1000년 후 ...

미국의 한 평론가는 이 영화 2046을 일컬어 "사랑한다는 것의 불가능성에 대한 명상"이라고 했다고 한다. 그 평론가, 똘똘하기도 하지. 그리도 똑떨어지게 한 구절로 그 말을 내뱉어버리다니, 동사서독이며 중경삼림이며, 그리고 <아비정전---화양연화---2046>으로 이어지는 트릴로지에서 내내 되풀이되던 그 테마가 두부 한 모처럼 야속하게 똑 떨어진다. 되풀이해서는 얼마든지 볼 수 있지만 정작 그에 대해 듣고 싶거나 말하고 싶지는 않게 만드는 그런 묘한 매력이 왕가위의 영화에는 있다.

아비정전(1991)에서의 유가령을 기억하는가? 얼빠진 장학우 앞에서 직업을 가르쳐준다며 라디오 음악에 맞춰 춤을 추어보이던 젊은 댄서 루루. 2046(2004)의 첫머리에 십삼년의 세월을 이고서 늙은 그녀가 중년 여인이 되어 등장할 때 나는 가슴이 철렁하고 내려앉는 소리를 들었다. 자신을 사랑해주지 않는 사람을 사랑한 비극으로 치자면야 그녀 루루나, 고운 얼굴로 "나는 내가 이겼다고 생각했지만, 내가 가장 아름다웠을 때 내가 사랑한 사람은 내 곁에 없었다"고 읊조리던 동사서독 속의 장만옥, 새장을 치며 가슴을 찢는 울음소리를 내던 같은 영화 속의 임청하 모두 다 사랑의 여러 얼굴 중의 하나에 불과했다. 하지만 퍼석한 피부로 피곤한 눈매로 지친 얼굴로 2046 에 등장한 루루의 얼굴은 내가 본 사랑의 얼굴 중에 가장 정직한 것이었다.

화양연화에서 수리첸(장만옥)을 보며 마음만 졸이던 차우 선생(양조위)을 기억하는 관객이라면 2046에서의 뻔뻔하고 능글맞기까지 한 차우 선생이 낯설기만 할 것이다. 바람피우는 아내 때문에 말도 못하고 가슴이 무너지던 그 차우 선생이 수리첸만 바라보며 평생을 살 줄 알았던 우리의 기대를 무참하게 배반하며, 13년 사이에 도박을 즐기며 신문에 색정소설 나부랑이를 연재해서 생계를 잇는 데 부끄럼이 없는 원나잇 스탠드의 전문가로 변신해 나타난다. 사람은 변하는 것이다. 싱가폴 도박판에서 만난 수리첸(공리)이라는 캄보디아 여자를 그는 사랑했고, 홍콩으로 돌아와 이웃이 된 바이링(장쯔이)에게도, 애인의 편지를 전해주다가 무협소설을 함께 쓰는 사이가 된 여관주인 딸 왕정문에게도 그는 마음을 주었다. 혹자는 말할 것이다. 그 모든 과정에서 그가 원하고 있던 단 한 명의 여자는 오직 십삼년 전의 수리첸 뿐이었다고. 그 모든 여자들을 통해 사실 차우 선생은 오직 수리첸 단 한 명만을 사랑하고 있을 뿐이라고.

십 년 전의 나라면 아마 나 역시 2046을 그렇게 읽었을 것이다. 평론가 누구의 말마따나 그것은 사랑의 불가능성에 대한 명상이라고, 영화 속에서 차우 선생이 말하듯 "사랑은 타이밍이라고, '인생의 바로 그 사람'을 만났다는 것 자체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중요한 건 언제 그 사람을 만났느냐 하는 거"라고. 나는 왕가위가 변할지, 변할 수 있을지, 혹은 조금씩 변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 그러나 사람은 변한다. 나는 차우 선생이 그 모든 여자들을 다 사랑했다고 읽기로 했다. 바람난 아내 때문에 속을 태우며 알게 된 수리첸을 그는 사랑했으며, 검은 장갑을 끼고 도박하던 또다른 수리첸도, 그녀를 버리고 훌쩍 떠난 옛 남자친구(=아비) 이야기를 많이 했다는 댄서 루루도, 고급창녀 바이링도, 왕정문도 그는 모두 사랑했다고.

왕가위 영화 속의 인물들은 좀처럼 그들의 사랑과 맺어지지 않는다. 덕분에 그들은 영화 속 그들의 인생에서 일반인보다 서너배 이상 되는 사랑을 만난다. 흔하지는 않겠지만 지구상의 수십억 인간 중에 그 정도 사연을 가진 사람도 없으란 법은 없다. 왜 우리는 진정한 사랑은 인생에 단 한 번이라고, 사랑을 아는 자는 오직 그 인생에 단 한 번이라는 그 사랑을 평생 가슴에 품고 사는 인간이라고만 고집하는가? 이 사람과 저 사람과 그 사람, 그 사람들을 사랑하던 저마다 다른 시기의 우리는 그 사람들만큼이나 다른 인간이었는지도 모른다. 왜 차우가 아내의 정부의 아내이던 수리첸을 사랑했다고 해서, 그녀와의 사랑을 비밀로 앙코르와트 어느 나무에 구멍을 뚫고 봉인했다고 해서, 옛애인을 못 잊고 미미가 된 루루를, 싱가폴의 도박사이던 또다른 수리첸을, 바이링을, 일본어 교본을 탐독하던 왕정문을 그 만큼 사랑했어서는 안 되는가? "모든 기억은 눈물 자국"이라고 왕가위는 영화 중간에 글씨로 써넣었다. 왜 시간 속에 떨어진 눈물들이 모두 공평한 기억이어서는 안되는가?

왕가위의 변하지 않는 영화를 보면서도 관객은 변한다. 2046을 보고 나는 그것을 알게 되었다. 


댓글(7)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blowup 2005-12-18 17: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끙... 2046은 일부러 보지 않았어요. 너무 허망해질 것 같아서. 그런데 정말 이 트릴로지를 순서대로 보고 싶은 생각이 드네요.


hanicare 2005-12-19 1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퍼갑니다.

로드무비 2005-12-19 1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검둥개님, 제 2046 페이퍼 보셨어요?
그것보다 훨 잘 쓰셨어요.^^
너무나 근사한 리뷰!!!

kleinsusun 2005-12-19 2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검둥개님, 넘 멋진 글이예요!
음...전 <2046>을 보고 실망을 많이 했었는데.....
"사랑한다는 것의 불가능성에 대한 명상"이라..... 불가능한가요? ㅎㅎ

검둥개 2005-12-20 0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kleinsusn님 전 이제 이십대 초반에 그랬듯이 왕가위 영화를 마음 졸여가며 보지 않아요. ^^ 실실 웃으면서 봤거든요. 실망이란 건 기대와 늘 함께 가는 거니까, 어떤 기대를 했느냐에 따라서 실망을 하느냐 아니냐가 갈릴 수 있겠죠. ;)

로드무비님, 물론 봤죠. (까치둥우리 머리 언급이 나와 무척 뜨끔했던 기억이 생생!) ^^;;; 감독이 주구장창 하도 같은 소리만 해대니까 이젠 슬슬 딴지를 걸구 싶어지는 관객의 심정이랄까 그런 게 들어서 써봤어요. 그래도 아비정전이랑 2046이랑 같이 묶어서 영화관에서 큰 스크린으로 봐서 좋았어요. ㅎㅎ

hanicare님, 조잡한 리뷰야요. ^^;;;

namu님 순서대로 보세요. ^^ 전 아비정전이 뭐가 트릴로지의 첫번째라는 거야 하다가 다시 보고 기억이 나더군요. ㅎㅎ

플레져 2005-12-20 0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휴...숨막히게 너무 잘 쓴, 2046을 이해하지 못한 내가 원망스러운 그러나 내 가슴이라면 조금 이해도 되는... 검둥개님만의 감각이 살아있는 리뷰네요... 아...검둥개님의 이 리뷰를 먼저 봤더라면 2046을 좀 더 멋지게 봤을 텐데. 극장엔 함께 간 일행들, 여섯 명 뿐이었고, 우리들은 마치 우리만을 위해 상영하는 영화를 보는 양 취해 있었는데...

왜 우리는 진정한 사랑은 인생에 단 한 번이라고, 사랑을 아는 자는 오직 그 인생에 단 한 번이라는 그 사랑을 평생 가슴에 품고 사는 인간이라고만 고집하는가?

글을 쓴 사람만의 사유가 녹아있을 때 비로소 빛나는 문장을 '명문' 이라 하지요...


검둥개 2005-12-20 0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오 플레져님, 이런 칭찬을 받아두 되나요? *^^* (얼굴이 화끈화끈)
아이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