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의 문장들 청춘의 문장들
김연수 지음 / 마음산책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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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이제는 인정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내가 시인과 소설가들이 쓴 산문집 junkie라는 것을. 다른 책은 몇 권 읽지도 않았는데, 산문집은 정현종, 황인숙, 함민복, 유하, 최윤, 김훈의 것을 다 읽어치웠다. (시인과 소설가가 아닌 사람들이 쓴 잡문집까지 포함하면 이보다도 더 많다! 하이고, 자랑이다.)  관심있게 읽는 시인이나 작가들의 시시껍절한 사생활이나 뒷이야기를 얻어듣고 싶은 생각은 없고 그럴 가능성도 거의 제로지만, 그들이 직접 털어놓는 일상사를 듣는 재미는 짭짤하다. 게다가 시나 소설이 아닌 문장 속에서 시인과 소설가를 만난다는 것부터가 즐거운 경험임에 분명하다. 독자들의 입장에서 작가는 언제나 특별한 인간. 우리와 그들이 함께 거주하는 이 공통의 세계를 그들이 어떻게 경험하는 지에 대해 우리는 끊임없이 궁금해하지 않는가!

김연수는 이름만 많이 들은 작가인데 역시 도서관에서 가져온 몇 권의 책들 중에서 제일 먼저 산문집부터 꺼내 읽어버렸다. 청춘의 문장들이라고 이 젊은 작가가 소개하고 있는 것은 의외로 아주 오래된 한시나 옛문장들이 대부분인데, 나는 그게 바로 그 제목이 말하는 저 청춘의 문장들인 줄은 모르고 책의 마지막 장을 덮은 후에도, 도대체 뭐가 그래서 청춘의 문장들이야, 라고 혼잣말을 했다. 각 단문들이 전혀 그 문장이나 시 하나를 소개하려고 쓰여졌다는 느낌이 들지 않도록 자연스러웠던 것이다. 그건 다른 한편으론, 소개된 시나 문장들이 그 자체만으로는 내 마음을 움직이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소개된 시나 문장들이 김연수의 글 전체 안에서만 비로소 그럴 듯 해보였다는 것은, 명문을 명문으로 알아보지 못한 독자인 내게는 부끄러운 일이겠지만, 글쓰는 이로서의 김연수가 글와 삶을 엮어서 볼 줄 아는 지혜를 가졌음을 의미한다.

이를테면 "은은 고령 사람인데"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책을 읽다가 문득문득 목이 메어와 갈피를 덮는 일은 요 몇 년 새 얻은 버릇이다. 쓸데없는 일에 관심이 많다고 핀잔 꽤나 듣는 처지고 보니 <조선조 문인 졸기> 따위의 책을 펼치는 일이 많다. 이 책은 <조선왕조실록>에서 조선시대 이름난 문인들의 죽음을 다룬 구절만 가려 뽑았다. 세상에 이런 책도 쓸모가 닿는 곳이 있을까 생각했는데, 그 쓸모라는 게 결국 내 가슴을 울리는 일이었다. 성종 때 태어나 연산군 때 죽은 사람 중에 박은이란 분에 대한 글이 눈에 들어왔다.  ...  이 사람의 졸기卒記는 간단하다. '연지시살지然之是殺之, 시년이십육時年二十六'. 실록은 왕이 (그 정직함을 미워해) 결국 그를 죽이니 그 나이는 26세 때였다고 간단하게 전한다. 실록이 전하지 않는, 그 열 글자 속에 숨은 스물여섯 살의 회한과 아쉬움과 슬픔을 헤아리는 것은 모두 다 내 몫이다. 카드결제일과 원고마감일 같은 것을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부족해 이런 것까지 마음에 짊어지고 살아야 하니 여간 고달픈 일이 아니다." (50-51)

이 글에 소개된 또 하나의 문장은 윤치호의 일기 1919년 9월 12일치에서 나온다.

오후에는 집에 있었다. 3시 20분즘 예쁘장하게 생긴 여학생이 찾아왔다. 그녀는 조선인민협회 명의의 서한을 내밀면서 조선독립을 위해 자금을 대달라고 요구했다. 난 나 자신과 내 가족이 위험에 처할 수 있는 만큼 돈을 줄 수가 없다고 말했다. ... 그녀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서한을 챙겨서 가버렸다.

위의 윤치호의 일기에 대해 김연수는 다음과 같이 적는다.

"일기는 여기서 끝나지만, 내 마음은 다시 그 예쁘장하게 생긴 여학생을 따라 윤치호의 집을 나선다. 사라진 나라 대한제국에서 태어났을 그 여학생은 얼마나 실망했을까? 윤치호의 집 앞에다 침이라도 뱉었을까? 아니면 도저히 넘을 수 없는 벽 앞에서 절망했을까? 윤치호의 변명을 듣는 순간, 그 여학생의 가슴속에서 꺼져버렸을 불빛. 나는 그 불빛을 상상하고 그 불빛에 매료되고 그 불빛에 빠져든다." (52)

김연수가 소개하는 문장들은 그것들 자체가 빛나는 문장이라서가 아니라 그 문장들을 보는 그의 마음이 빛나는 것이어서 비로소 청춘의 문장이 되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명문장을 소개해준다기보다는 문장을 명문장으로 볼 줄 아는 젊은 작가의 마음을 엿보는 기회를 준다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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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아라 버스야
정현종 지음 / 큰나(시와시학사)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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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시절, 텅빈 여름의 강의실에서 다른 학생들 대여섯명과 교포 선생 앞에 둘러앉아 매주 영어 수업을 들었던 적이 있다. 나는 내 손으로 수강증을 끊어놓고도 회화 따위를 공부해야 한다는 사실에 볼이 메었고, 강의에 가서는 신나고 활기차게 수업을 진행하는 젊은 교포 영어강사의 그 생기 넘치는 목소리에 괜시리 심술이 솟아 쩔쩔매곤 했다. 원래 명랑한 성품인 그녀는 게다가 신혼이기까지 해서 남편과의 열애담이며 깨소금맛 나는 일상도 종종 이야기해주곤 했는데, 애인은 고사하고 만만한 남자친구도 없던 내게는, 행복으로 발그랗게 달아오른 그녀의 그 얼굴이 이뻐보일 리 만무했다. 그녀가 시인이고 나무를 좋아했다면 아마 이렇게 노래했을까?

사람들이 나무 아래로 걸어온다
움직임은 이쁘구나
모든 움직임은 이쁘구나
특히 나무의 은혜여
  --정현종, "움직임은 이쁘구나 나무의 은혜여"

그렇게 읊었다면 당시의 나는 필시 이렇게 답했으리라: 이쁘기는 지랄.

기쁨의 표현, 생명의 도약, 자연의 신비, 감각의 예찬, 정현종의 시는 이 모든 것들이다. 대학 서점에 서서 읽던 정현종의 시들은 언제나 내게 낯설었는데, 그건 그 시들의 하나같은 그 좋아라, 예뻐라, 하는 분위기에 도저히 적응할 수가 없어서였다. 나는 젊었고, 젊음의 몫인 불행을 내딴에는 최대한 극적으로 살고 있었다. 세상사는 다 시시하고 내 인생은 비천하다는, 저 불안한 자들의 최고로 용감한 얼굴 표정을 하고서. 그런데 오늘 책장을 넘기다가 이런 구절을 발견하고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그런데 현재에 대한 기대를 파괴하는 자들이 있다. 마치 기대된 현재--비교적 아름답고 비교적 행복한--의 도래를 저지하는 걸 사명으로 삼고 태어난 것처럼 말하고 행동하는 자들이 있다. 그들은 있을 수 있는 비교적 살 만한 현재를 끊임 없이 파괴한다."

어떤가, 찔리지 않는가?

"그들은 기대된 현재를 어떻게 파괴하는가. 그들은 적재용량이 많은 쓰레기차처럼 많은 오해와 편견 그리고 타성적인 잡념들을 짊어지고 다닌다. ... 그런 종류의 짐은 누구나 다소간 짊어지고 있고 그래서 그 중압 아래 있는 게 불가피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렇다면 그들은 그 압력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방법을 생각해 보지 않으면 안 된다. 자멸감으로부터 나온 시니시즘 따위는 우리들의 기대된 현재를 파괴할 따름이다. ... 그들은 기대된 현재를 어떻게 파괴하는가. 그들은 자신이 거세되었다는 사실로부터 나온 힘으로 남의 급소를 친다. 실은 다같이 거세되어 발길질할 불알도 없는데 신경질적으로, 매우 약삭빠른 척하고 먼저 찬다. ..." (44)

이쯤 되면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한다.
삼십이 넘기 시작하면 사람들은 누구나 행복에 대해 보다 진지하게 배울 자세를 갖추게 마련이다.

시인은 젊은 시절 그를 지배했던 정서는 감동과 신비감이었다고 고백한다. (21) 눈을 씻고 기억을 돌아다봐도 대학시절 내 과거에 감동과 신비감은 흔적조차 없건만, 궁핍하기 그지없었을 전후 60년대에 청춘을 보내고서도 시인은 당시를 감동과 신비감에 싸여 지내던 시기라고 회상하는 것이다.

겨울 하늘을 배경으로
(너무 이뻐서 도무지 어찌할 바를 모르겠거니와)
落木들의 저 큰가지들과 잔가지들 좀 보세요!
그 가지들은 하늘의 혈관이에요!
(물론 하늘의 뿌리이기도 하고
하늘의 天井畵이기도 하지만)
하여간 그 가지들은 하늘의 혈관이에요!
  --정현종, "하늘의 혈관"

아, 얼마나 불공평한가,
어떻게 해야 몸이 오그라붙게 추운 겨울날 말라비틀어진 겨울 나무를 보고도 이런 마음을 가질 수 있나?

시인답게 그의 대답은, 시를 읽어라, 다.
시는 지적, 논리적 이해를 뛰어넘는 이미지의 비약과 도약을 통해 우리로 하여금 일상의 범용함이라는 그 두꺼운 천막을 찢고 유년기에 경험했던 세상과 자연에 대한 신비감과 감동을 회복하게 해준다는 것이다.

그것은 아름답지 않은 것을 억지로 아름답게 보는 것도 아니고, 기쁘지 않은 것을 억지로 기쁜 척 하는 것도 아니며, 미래에 대한 두려움 없이 과거에 대한 회한 없이 현재를 보는 것이다.

그렇게 보여진 현재는 그 자체로 기쁨이며, 튀어오르는 생명, 미래와 과거에서 해방된 환희. 그래서 시인은 매연을 뿜으며 달리는 작업복처럼 구질구질한 시내버스 안의 풍경도 이렇게 노래한다.

내가 타고 다니는 버스에
꽃다발을 든 사람이 무려 두 사람이나 있다!
하나는 장미-여자
하나는 국화-남자
버스야 아무데로나 가거라
꽃다발 든 사람이 둘이나 된다.
그러니 아무데로나 가거라.
옳지 이륙을 하는구나!
날아라 버스야.
이륙을 하여 고도를 높여 가는
차체의 이 가벼움을 보아라.
날아라 버스야!
   --정현종, "날아라 버스야"

아, 날고 싶지 않은가, 꽃다발이 아니라 밥주걱을 들고서라도?
발뒤꿈치가 새의 그것처럼 근질근질해지는 그런 순간을 맞이하는 법이 궁금한 이들은 이 책을 열어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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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6-06-08 17: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검둥개님의 이 리뷰가 너무너무너무 마음에 듭니다.
두서넛 제 친구들에게 소개하고 싶습니다.
잠시 빌려갈게요.

'꽃다발이 아니라 밥주걱을 들고서라도!'ㅎㅎㅎ

nada 2006-06-08 18: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 로드무비님 퍼오신 거 따라 구경 왔어요. (로드무비님은 정말 알라딘의 대모 같으셔요.) 저래서 정현종을 싫어하는 데다, 별로 구원받고 싶은 생각도 없지만, 검둥개님의 리뷰는 정말 일품이군요. 저도 너무 마음에 듭니다.^^

검둥개 2006-06-09 09: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맘에 드신다니 기쁜데요! ^^
기대보다 훨씬 재미있게 읽은 산문집이었어요.
밥주걱도 꽃다발 만큼 아름답지 않나요 ㅎㅎ 들고 날아갈 수만 있다면야.

꽃양배추님 처음 뵈어요 ^ .^
"별로 구원받고 싶은 생각도 없지만"이라고 하시는 말투가 멋지신데요 ㅎㅎ

잉크냄새 2006-06-09 1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는 젊었고, 젊음의 몫인 불행을 내딴에는 최대한 극적으로 살고 있었다."
그때 그 시절의 가슴속에 머물던 공통된 정서였나 봅니다. 리뷰가 멋지네요.

검둥개 2006-06-09 1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서는 비장했고, 생활은 시시껄렁했었죠.
그렇지 않았었나요? ^^
 
나는 고독하다
황인숙 지음 / 문학동네 / 199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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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대학시절에 자취를 하던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의 자취방은 특이하게도 엄청나게 널찍했다. 어느 정도로 널찍했느냐 하면 보통의 손바닥만한 하숙방의 서너배는 너끈히 되고도 남을 크기였다. 그 자취방은 전철역 주변에 있었는데 이발소며 분식가게, 갈비집, 여관 등등을 지나 뒷골목으로 걸어들어가면 정말이지 멀쩡하게 생긴데다가 멋진 마당까지 딸린 이층집의 이층에 있었다. 조그만 부엌과 화장실에 딸린 그 자취방의 한 면은 바로 마당으로 트여 있어서, 유리문을 열면 베란다가 있고 그 밖으로는 보기좋은 주택가 경치가 한아름이었다. 물론 그 당시에 유행하기 시작했던 오피스텔하고는 물론 시설 면에서 비교할 수 없는 재래식 셋방이긴 했지만 나는 혼자서 그 커다란 방을 차지하고 사는 친구가 부러워죽을 지경이었다. 게다가 친구가 반색을 하며 설명해준 바에 따르면 그 방에서 사는 값이나 손바닥만한 방에서 하숙하는 거나 같은 값이라는 거였다. 세상사에 밝은 친구는 엄마를 설득해 은행에서 그 널찍한 방의 전세금에 해당하는 액수를 대출받았는데 그 대출금의 이자가 손바닥만한 하숙방에서 기거하며 매달 내는 하숙비와 같은 금액이라는 설명이었다. 그래서 매일 아침 공용 화장실 때문에 끙끙거리고 손바닥 만한 방에서 죄수처럼 사는 대신, 친구는 속이 시원하게 뚫린 경치 좋은 널찍한 이층 방의 임자가 된 거였다.

황인숙의 이 산문집에는 "꿈의 오피스텔"이라는 짤막한 글이 있다. 이 글을 읽고 있으니 문득 그 옛 일이 생각났다. 철없던 나는 그 때 이런 방만 있다면 혼자서 평생 그 곳에서 살아도 억울하지 않겠다는 엉뚱한 생각까지 했었다. 실상은 방 하나 넓은 것 빼고는 별볼일 없는, 세면대도 없어서 수도꼭지에서 물을 대야에 받아 그걸로 세수도 하고 발도 씻어야 하는 좁아터진 화장실에다가, 수압이 낮아 변기 물 내리는 것도 고역인 그런 자취방이었는데도 말이다.

동네가 시끄러워 이사를 결심한 친구를 따라 시인은 남산 근처 문화원 (독일 문화원일까?) 아래 있다는 오피스텔을 찾아나선다. 애를 쓰다 한참만에 겨우 찾은 그 오피스텔은 "파르랗고 영롱하고 장엄한"  "거대한 진주 궁전"이어서 거기서 "살면 글이 저절로 써질 것 같"은 그런 건물이었다.  한밤에 매물가를 묻는 시인과 친구에게 수위는 둥그런 눈을 하고 열여덟 평 짜리가 있는데 보증금 오백만원에 월세가 사십만원이라고 가르쳐준다. 시인은 친구가 그 곳에 방만 얻으면 자주 놀러갈 수 있겠다는 생각에 무조건 생각보다 싸다며 안달을 낸다. "그럼 전세로 이천오백만원이네. 어휴 너무 싸다, 그치?"

울적한 마음으로 친구와 헤어져 누추한 방으로 돌아온 시인은 "시무룩히 시무룩한 방을" 치운다.

그리고는 이렇게 썼다: "시는 내가 좋아서 쓰는 것이고, 허구한 날 빈둥빈둥 노는 내게 과분한 방인데. 가난하다는 건 때로는 고독한 거다. 고독은 일에 대한 정열을 강화시켜줄 뿐. (이를 앙 다물고!)"

나는 이 글을 읽다가 이 시인이 괄호 안에 느낌표와 함께 넣은 이 "이를 앙 다물고" 부분에서 낄낄 웃고 말았다. "고독은 일에 대한 정열을 강화시켜줄 뿐", 이라는 건 어딘지 모르게 구체제 (그게 무슨 종류건)의 표어 같은 냄새가 나는 데다가, 그걸 이를 앙 다물고 외쳐야 하는 시인의 얼굴을 상상해보라.

매달 하숙비 낼 돈으로 은행대출을 받아서 널찍한 방을 얻은 그 친구가 그 때는 무한히도 존경스러웠건만, 이제 생각해보니 보증금이 오백에 월세가 사십인 거나 전세로만 이천오백인 거나 같은 것이듯, 월세를 꼬박이 바쳐야 하는 구두상자 같은 하숙방이나 남의 돈을 끌어와서 얻은 널찍한 자취방이나 그거이 그거다. 이 생각까지 하고 나니, 산다는 게 한겨울 밤 광에서 하나씩 둘씩 빼먹는 곶감 같아서 영 입맛만 씁쓰름해졌다. 이를 앙 다물고 시인처럼 외쳐보지는 못하고.

세련된 작가들은 저작에 자기들 얼굴 사진을 붙이는 건 도대체가 황당한 발상이라고 목소리를 높이지만, 촌스런 독자는 좋아하는 작가의 개인사를 엿보느라 헐렁헐렁하게 썼을 잡문 모음이 반갑기만 하다. "안면도는 아직 섬이다"라는 짧은 글에는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한 3박 4일의 해변문학캠프에 참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새벽 여섯시에 울리는 사이렌 소리에 맞추어 애국가를 부르고 체조를 해야 했단다. "내일도, 모레도! 나는 울고 싶었다." 시인의 코멘트다. 문학 캠프에 국민체조라니. 잡문집이 아니면 어디 가서 이런 이야기를 주워듣는단 말인가. 이러구러해서 책장을 넘기는 나의 손은 빨라지기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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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06-05-28 08: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누나 집에서 대학생활을 보냈던 저도 반지하 자취방이나 이층집 자취방에 대한 묘한 동경심을 품었던 기억이 나네요.그 구질구질했던 시절이 마냥 그리워지는 시절이네요.

검둥개 2006-05-28 09: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반지하는 딱 질색예요. 습기차고 눅눅하고 해 안 들고! ^^;;
옥탑방은 여름에 또 너무 덥고. 그 친구가 있던 이층집 자취방은 정말 멋졌어요.

로드무비 2006-05-29 09: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는 고독하다>, 황인숙 씨의 책 제목 처음 보고 얼마나 웃었는지.
평창동의 한 카페에 가니 황인숙 씨 책이 두어 권 꽂혀 있더라고요.
인숙만필도 그렇고 마음에 들어요.
아무튼 재밌으니......

검둥개 2006-06-05 1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게 말씀하시니 <인숙만필>도 읽어보고 싶은데요.
책 읽을 시간은 주는데 읽고 싶은 건 많아만 지니 어쩜 좋아요? ^^
 
자유의 무늬
고종석 지음 / 개마고원 / 2002년 10월
품절


우리말은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만큼 복잡하고 엄격하고 정교한 경어 체계를 지닌 언어다. 우리말의 2인칭 대명사는 연령이나 신분이 비슷한 사람들끼리, 또는 연령이나 신분이 낮은 사람에게나 사용될 뿐, 존칭을 사용해야 할 자리엔 아예 사용되지 않는다. 그 경우 한국인들은 그 자리를 비워두거나 연령적-가족적-직업적-신분적 위계를 표시하는 명사(선배님, 아버님, 국장님, 선생님, 숙자 씨 등)를 사용한다. 2인칭 대명사만 위계에 예민한 것이 아니다. 한국어는 말하는 사람이 듣는 사람과 자신의 위계를 설정하기 전에는 단 한마디도 입 밖에 낼 수 없는 언어다. 언어로 표현되는 그 위계질서를 우리는 다시 그 언어를 통해 내면화한다. 경어를 썼느냐 반말을 썼느냐가 흔히 사람들 사이의 다툼의 원인이 되는 것이 그 증거다.

경어법은 연령의 위계만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신분적 위계(갑오경장 이래 법률적 신분이야 없어졌지만 영원히 없어지지 않을 '계급'이라는 이름의 사회적 신분)를 드러내교, 그 신분적 위계는 그것을 드러내는 경어법에 의해 다시 강화된다. 한국어가 민주주의적인 언어가 아니라는 것, 그것은 국어에 대한 내 애정에 주름을 만든다.

--경어-158-159쪽

내가 요즘 읽고 있는 소설 문장의 문제점이 문체 이전의 것이듯, 한국어 논문 문장의 문제점도 논리적 일관성 이전의 것이다. 다시 말해 글이 되지 못한 '학술적 메모'에서 논리를 찾는다는 것 자체가 우스꽝스러운 시도다. 그런데도 가끔씩 학술 논쟁이 있는 게 신기하기는 하다. 사실 비문은 한국어 출판물에 너무나 만연해 있어서, 그걸 지적하는 사람이 신경증 환자라고 핀잔받을 정도다. 나도 내 발 밑이 불안하다. 비문투성이의 글을 밤낮없이 읽고 있으니, 나 역시 비문의 함정을 빠져나갈 자신이 없다.

나는 백낙청이나 정과리의 애독자인데, 그것은 그들의 아슬아슬한 지적 곡예나 눈부신 수사에 혹해서가 아니다. 그들의 문장에서 비문을 발견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한국의 문학비평이 임화나 최재서의 시대로부터 얼마간이라도 진화했다면, 그 진화는 세계관의 확장이나 논리의 세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비문의 감소를 의미할 것이다. 백낙청이나 정과리 같은 비평가가 그런 진화의 증거지만, 문제는 그들이 우리 문단의 장삼이사가 아니라 예외적인 글쟁이에 속한다는 사실에 있다.

----"메모"와 "글"-162쪽

사람에 대한 사람의 감정은 기본적으로 적대감이고 경쟁심이다.

그런 사정을 비판적으로 되돌아볼 능력이 인간에게 없는 것은 아니다. 염치나 양심 같은 것이 그 반성적 능력의 이름이다. 그러나 그 염치나 반성의 항진은 투쟁력의 수축을 의미한다. 반성하는 사이에 남의 밥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인간은 반성하기보다는 싸운다.

기독교나 마르크스주의를 포함한 종말론적 이데올로기들은 그런 염치나 양심 같은 인간의 반성 능력을 과대평가하거나 인간의 비루함의 원인을 인간 바깥의 구조에서 찾으면서 유토피아의 건설을 꿈꾼다. 그러나 유토피아니즘이라는 말을 거부하고 과학의 옷을 걸쳤던 마르크스주의를 포함해 모든 유토피아니즘이 실패로 돌아간 사실은, 인간의 반성 능력이 타인에 대한 사랑으로 전환될 만큼 크지는 않다는 것, 인간의 비루함의 원인은 그 적지 않은 부분이 인간 내부에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기독교의 역사나 마르크스주의의 역사는 사랑의 이름으로 이룩한 증오의 역사다. 그들이 내건 사랑이 그렇게 크지만 않았더라도, 그들이 역사 속에서 실천한 증오의 크기가 그렇게 엄청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기독교나 마르크스주의를 포함한 모든 유토피아니즘이 그려온 유토피아는 먼 미래나 과거, 또는 외딴 섬에 설정돼 있다. 그들이 그리는 유토피아가 지금 이 곳과는 동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그리는 사랑이나 우애는 무책임하게 클 수 있었고, 그 반동으로 그들이 실천한 증오도 덩달아 그리 클 수 있었다.

바로 여기서 반-유토피아주의자의 금언이 나온다: 남을 도우려고 애쓰지 마라. 남을 해치지 않도록 애쓰라.

--유토피아에 反해-233쪽

개인에 대한 존중과 이해, 개인주의적 상상력은 지금 공산주의를 대치해 지구를 피로 물들이고 있는 커다란 집단주의, 예컨대 종교적 근본주의나 약화된 파시즘으로서의 민족주의에 대한 처방일 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를 짓누르고 있는 지역주의나 이런저런 연고주의 같은 작은 집단주의에 대한 처방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것은 최대의 선이 아니라 최소의 악을 목표로 삼는 소극적 도덕의 출발이기도 하다.

--개인주의적 상상력(1)-25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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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6-03-22 07: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남을 도우려고 애쓰지 마라. 남을 해치지 않도록 애써라.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훌륭한 인간이 되기는커녕 기본이라도 충실히...^^


검둥개 2006-03-22 0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원래 기본이 젤 어렵잖아요. 인간은 변덕의 동물인지라. ^^
 
눈물은 왜 짠가
함민복 지음 / 이레 / 2003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생각해보면 어렸을 때 가난과 체면에 대해 많이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가난과 체면이라는 개념에 대해서 생각을 했다기보다는 왜 친구가 가진 것을 나는 갖지 못하나, 왜 우리 집에 뭐가 뭐가 없다는 것을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숨기게 되나, 왜 너와 내가 이건 있고 저건 없다고 속을 다 까발리면서 이야기하지 못하는 걸까, 그런 생각을 종종 했다는 거다. 그 때는 가난과 체면이 한 발짝 한 걸음 내딛는 곳에서마다 인간의 인생을 자빠뜨리는 그렇게 골치아픈 문제인 줄을 알지 못했다. 그저 얼른 커서 어른이 되면 돈을 많이 벌어서 갖고 싶은 것은 다 사고 하고 싶은 것은 다 하리라고만 생각했었다. 그런 야심은 대부분 이루어지지 않아서 세상은 불만족 상태의 어른들로 가득차 있다. 먹고 살기도 힘든 사람들이 있고, 먹고는 살아도 영 시원찮은 사람이 있고, 웬만하긴 하지만 원하는 바에 비하면 한참 멀었다고 투덜대는 사람들이 있다. 그 사이에서 바둥거리면서 나는 어디쯤에 낑겨 있나 생각해본다.  

함민복의 이 책, <눈물은 왜 짠가>를 읽으면서 어쩌다가 가난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한 것은 딱히 이 책 속에 시인이 겪은 가난의 경험이 미어지게 들이차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책을 다 읽고 나면, 아, 이 시인이 참 힘들게 살았구나, 이런 생각이 들기는 한다. 허나 정작 시인은 가난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작정한 태세가 전혀 아니다. 그냥 붓 가는대로 자기 사는 이야기, 고향 이야기, 식구 이야기, 가축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을 뿐이다. 속으로는 그 마음이 참으로 쓰리겠다 싶은 이야기를 해놓고서는 그래도 사는 게 배부르고 슬픔도 배부르다고 이야기한다.  시장통엘 가면 패자에게도 삶에의 의지지분이 있다고 귀뜸한다. 부도가 나서 사방팔방으로 흩어진 가족을 추억하면서 이렇게 담담하게 말한다. "나는 가족과 피붙이가 무엇인가 하는 생각에 든다. 서로에게 향긋한 냄새를 풍겨주는 것만이 아닌, 시큰한 냄새가 나는 김칫국물 자국을 서로에게 남겨주는 존재가 아닌가. 나는 형의 가슴에, 형은 내 가슴에 엎질러진 김칫국물이 아닌가. 어머니는 내게, 나는 어머니에게, 아버지는 내게, 나는 아버지에게, 누나는 ..."

여기다 대고 마음이 가난해도 그렇게 아끼고 사랑하는 가족이 있으니 얼마나 좋으냐고 물어서는 안 되겠지만, 그렇게 정말 들이대고 물으면 시인은 뭐라고 답할까, 엉뚱하게 심술궂은 마음이 잠깐 들기도 하고. 돼지새끼도 살리고, 뻘밭에서 구멍을 후벼 낙지도 잡고, 보신탕집에 팔려갈 개를 키우면서 마음고생도 하는 시인의 이야기는 빨리 읽히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덮어놓을 수도 없어 머리가 어지러워지기도 한다.

어느 날은 지갑이 부도가 나고 어느 날은 마음이 부도가 나고, 어느 날은 그 둘이 한꺼번에 터지기도 한다. 부도가 줄줄이 나면 어쩔 것인가, 나는 대로 산다고. 장사꾼이 그러면 영 성공을 못할 위인이라 하겠지만, 시인이 그러면 듣는 사람 마음에는 시큼한 김칫국물이 번지리라. 본인 말대로 유하씨 시집에 나오는 시인과 이름이 같다는 시인 함민복이 그렇게 말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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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2-21 17: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드무비 2006-02-21 17: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느 날은 지갑이 부도 나고 마음이 부도 나고
어느 날은 그게 한꺼번에 터지기도 한다.

명문입니다.^^

검둥개 2006-02-21 18: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님 ^^ 답글 너무 재미있게 읽었어요. 이 책을 읽고 저는 이것이 정말 궁금합니다. 본인 왈, "지금까지 살아온 한 단면을 베어넘겨보는 소설 ... 사랑과 성과 어머니와 글쓰기에 대한...... 뭐, 그냥 삼십사 년을 살아온 현 상태를 되짚어보자는 식의."(107) 그 소설은 정말 나왔는가요? ;)

로드무비님 진짜요? ^ .^ 에헤헤,감사합니다.

blowup 2006-02-22 0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아직도 이 시큼한 김칫국물을 훌훌 마시지 못해요. 김칫국물 흐른다고, 도시락에도 절대 안 싸가지고 다니던 새침떼기였어요.
네가 내 가슴에 엎질러진 김칫국물인 것을 나는 부끄러워하지 않고 있는지...

검둥개 2006-02-22 1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namu님 그러셨군요 ^^ 전 도시락을 엄청나게 싫어했어요. 도시락 때문에 감출 수 없는 그 속사정의 모양새를요.

산사춘 2006-02-23 0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함민복 시인 책을 의도적으로 피하고 있었는데, 꼭 봐야 겄어요.

검둥개 2006-02-23 0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산사춘님 꼭 보셔요. 읽어서 맘 편한 책은 아니지마는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