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릴케 현상 > [퍼온글] 프랑스의 신문 삽화

http://magazine.jungle.co.kr/junglespecial/reporter/commando_sub_contentpage.asp?idx=285&fk_idx=43&code=2&table=foreignreporter&page=2

 

 

고삐풀린 상상력의 프랑스 삽화를 읽자. 1

 

프랑스에는 신문, 잡지, 정기간행물이 400여종이 된다고 한다.
'르몽드', '리베라씨옹' 등의 주요 일간지를 위시하여 '렉스프레스', '르 쁘엥왕'같은 시사주간지, '마리 끌레르' 등의 여성 월간지, '꺄이에 뒤 씨네마'나 '프르미에르' 등의 영화 잡지, '보자르'와 '아트프레스', '워일' 등 미술잡지들 그리고 '스삐루'와 '위니' 같은 어린이용 만화 잡지도 있다. 그뿐 아니라 '뉴스위크'나 '포츈 인터내셔널' 같은 영어 잡지를 비롯하여 몇몇 외국 잡지들도 다양하게 발행되고 있다.

자~ 그러면, 프랑스 신문들에 실린, 고삐풀린 상상력을 풍부히 가지고 있는 경향이 다른 삽화를 통하여 프랑스문화 엿보기를 해보자.

삽화의 다양성은 신문마다 추구하는 경향에 따라서 제각각이다. 작가들의 정치적 사상에 따라 나타내고자 하는 시사적인 표현이 다르다. 하나의 단어아래 보여주는 만화 내용은 결코 모호하지 않다. 명료하고 대중에게 잘 전달된다. 객관적이고 공정하고 정확하다.

시사만화가는 항상 일반적인 사회성을 관찰하고 지속적으로 다른 정보를 참조하여야 한다.

우선 주요 신문들은 아래와 같다.

* 르몽드 Le Monde (성격: 중도좌파)- 사진을 쓰지 않고 삽화만을 사용한다. 광고도 거의 없고 기사들로만 가득찼다. 삽화를 과감히 신문의 반페이지 또는 전면까지도 사용한다. 기사들이 심도 있는 것, 주로 분석 해석기사들이 많다.

* 리베라시옹 Liberation (좌파) - 사진반+ 삽화반, 프랑스는 독자가 적은 극좌.극우성향 신문까지도 재정난 때문에 문을 닫는 일이 없도록 정부가 지원한다. 여론의 다양성과 언론매체의 다원성을 소중히 추구한다.

* 휴마니떼 L'Humanite (공산당)- 소련이 붕괴되고 공산주의가 사라졌어도, 프랑스에는 아직도 공산당을 지지하는 국민들이 8%를 차지한다. 공산당 신문 휴마니떼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 르 파리지엔느 Le Parisienne (중도좌파) - 삽화는 거의 쓰지 않고 사진들로만 구성- 가격이 다른 신문에 비해 저렴하고 읽기 쉬운 대중적인 신문이다. 일상생활에 유용한 것들과 문화, 사회 기사가 강하다.

* 르 까나 Le cannard - 사진없이 삽화로 밀고 나간다. 삽화들이 기사와 함께 같은 분량을 차지하기도 하며 만화가 거칠고 개성이 강한 것들이 많다. 사회, 정치인의 사생활 폭로 전문지로 이 신문도 프랑스 사람들이 많이 본다.

* 르 피가로 Le figaro (보수우파) - 한국기자들이 많이 본다. 끼리끼리(?)... 우파 눈에는 우파가 이쁘게 보이는 법.

프랑스에 있는 신문들의 성질이 모두 다르듯이, 활약하고 있는 만화가들도 정치적으로 자기 사상과 맞는 곳에 참여한다. 색깔이 다양한 신문 중에서 주황색, 르몽드에 나오는 삽화가들의 시사만화들을 구경해 보자. 다음번에는 리베라시옹과 르까나에 나오는 거친듯하지만 독자적인 화법을 갖고있는 삽화가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 삽화로 본 프랑스 1

▲삽화 설명 : 글쓰는 이들의 힘을 역사적 시대순으로 보여주고 있다. "펜이 칼이다"

르몽드 신문의 터주대감인 삽화가. '세르궤이' SERGUEI - 그는 극도로 절제된 외선들을 사용하여, 날카롭게 시대에 알맞은 표현을 해낸다. 세르궤이의 삽화는 단어(글)가 없다. 데상만으로 대중에게 정확하게 생각하는 것을 전달한다.

한 컷의 만화 안에 깊은 철학의 사상과 시대에 알맞은 표현을 일축해 내는 고도의 작업이 필요로 하는데, 정말로 날카로운 지성과 철학을 겸비해야만, 현실을 직시하는 자세를 갖춘 자 만이 나타내는 작업일 것이다. 아마도 회화보다도 대중에게 더 직접적이고 쉽게 파급 효과가 크다.


♠ 삽화로 본 프랑스 2
▲삽화설명: (좌) "누구야, 이 괴물은 ?!" 우리 애들이잖아!.. / (우) "당신은 여기에 있음" --- 판쵸

PANCHO의 삽화, 두컷을 모아 놓은 것인데, 청소년문제에 대한 것과, 유럽연합의 미로 같은 길에서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삽화를 보시고 여러분이 생각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판쵸 PANCHO의 삽화는 르몽드 신문에 항상 1면 중앙에 놓여있다. 르몽드는 사진을 쓰지 않고 기사들과 함께 삽화로 이루어진다. 현재 언론매체들이 칼라가 판을 치는 세상에 아직도 색을 아끼고 있는 흑백 신문이다.
신문의 얼굴이라 할 수 있는 1면에 주요기사에 해당 하는 것이 삽화로 채워지는 것은 한국신문과 비교해 보면 상상을 못할 일이다. 그만큼 만화에 대한 생각들이 직접적인 사진보다도 더욱더 예술적 가치를 크게 두고 있기 때문이다.


♠ 삽화로 본 프랑스 3

▲삽화설명 : (좌) 질문 / (우) 재교육

깔리가로 CALLIGARO의 삽화는 독자로 하여금 무한한 상상력을 발휘하게 해준다.
좌의 삽화는 주식시장의 문제를, 사람들이 겹겹이 쌓여 주식동세를 보면서 열받아 머리에서 연기가 나는 것이고, 우의 삽화는 재교육; 변화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같은 얼굴을 한 머리를 자르고 서로 다른 생각머리와 다리를 집어넣고 있다.

대부분의 삽화는 단어를 거의 쓰지 않는다. 단어(글)를 쓰게 되면 그림이 주는 의미보다 언어가 먼저 사람 마음에 닿아서 그림의 힘, 감상자의 상상력이 줄어드는 셈이다.
글을 쓰지 않고 그림만으로 생각을 전달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단순하게 명쾌하게 고도의 기술로 자기만의 선으로 사회상을 풍자하여 대중에게 이해시키는 일은 예술의 극치인 것 같다.



♠ 삽화로 본 프랑스 4
▲삽화설명 : (좌) 정보의 홍수화 / (우) 학교와 기업

니꼴라 비알 NICOLAS VIAL 의 삽화는 설명해 줄 수 있는 단어가 없다 독자의 상상력을 동원하여 감상하여야 한다.

정보의 홍수 속에...
사람들이 컴퓨터 앞에 바짝 다가가 앉아있다. 개개인의 정보들이 모여서 컴퓨터를 통해 뒤쪽으로 수많은 정보 나부랭이들이 쏟아져 내려간다.


사람들의 폼을 보니, 스필버그의 영화 ET가 생각이 난다.
미래의 사람들 모습이 ET가 되는 것이 아닐까?
컴퓨터에 메달려 모니터를 보기 위해 고개를 내밀어 목은 길어지고, 눈은 툭 튀어나오고, 수많은 정보들을 입력시키기 위해선 머리통이 저절로 커지고, 움직임이 없이 하루종일 앉아 있어 배가 불룩나오고, 키는 자라지 않고 구부정한 어깨, 자판은 독수리 타법으로 타이핑을 하거나 마우스를 가운데 손가락으로 이용하여서 그것만 길어지는... 이티는 아마도 우리들의 모습 일것이다.

잡다한 정보 나부랭이가 과연 소중한 것인지? 생각해 볼 문제...
아직도 한국의 카툰(만화)시장은 지극히 낮은 수준이다. 자기의 색깔을 가진 작가군도 거의 없다시피 하지만 생각하는 만화를 좋아하는 독자들도 많지 않아 활동하기가 어렵다.

일일이 단어로 알려주어야 하고 만화는 재미있어야만 된다는 저급의 생각들을 가지고 있다. 골치머리를 앓게 하는 것들을 싫어한다.

삽화(만화)를 감상하는 데도 독자들의 노력이 필요하다. 그린 사람 못지 않게 보는 사람도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어야 한다. 한 컷의 그림 안에 깊은 철학을 담고 있는 삽화를 보는 사람의 훈련이 필요하다.

삽화(카툰)이야말로 보편성과 대중성이 있는 예술의 한 장르라고 생각한다. 대중성은 언어와 지역의 벽을 뛰어넘는 이해의 폭을 의미한다. 보편적인 정서를 찾아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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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고유명사의 오역에 대하여

'고유명사'란 말로 내가 지칭하고자 하는 것은 번역서들에 등장하는 인명과 작품명 등이다. 독자에게 생소한 고유명사라면 역자가 '특권'을 가지고 몇 가지 원칙(가령, 원음 표기나 교육부의 외국어 표기안 등)에 따라 '처음'으로 이름을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즉, '그'의 이름을 불러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는 관례(상식)에 따르거나 그에 준하여 표기하는 것이 옳다고 보며, 그를 따르지 않을 경우에는 타당한 이유를 명시해주는 것이 바람직하다(가령, 왜 '베르그송' 대신에 '베르그손'이라 표기하는지 등). 아무런 이유 없이, 역자의 독단에 따라 '임의로' 표기하는 것은, 그리하여 '오역'을 만드는 것은 착오가 아니라면 대개 무지의 결과이거나 오만의 소산이다. 그걸 '관습'에 대한 '도전'으로 미화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갑자기 이런 얘기를 꺼내드는 것은 낮에 도서관에서 유진 홀랜드의 <프로이트의 거짓말>(접힘과펼침, 2004)이라는 '괴이한' 책을 잠시 들춰보다가(번역서의 제목 자체가 '거짓말'이다) 찾아보기에서 '루칵스'란 인명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루칵스? 눈치빠른 이라면 짐작할 수 있을 텐데, 헝가리 출신의 독일 비평가 'Lukacs(루카치)'를 그렇게 표기한 것. 가뜩이나 역자는 '들뢰즈'를 '들루즈'로 '가타리'를 '과타리'로 표기함으로써 자신만의 독자성(singularity!)을 과시하고 있는데, '루칵스'란 표기를 보니까 그 독자성이 무지/오만과 먼 거리에 있지 않다는 걸 알겠다. 본문의 내용이야 어떠하든 이 정도면 책을 집어들었다가 다시 놓을 수밖에.

사실 고유명사를 제대로 옮겨주는 건 생각만큼 쉽지 않은 일이지만, 어느 정도 지명도 있는 저자/작가들의 이름을 잘못 표기해주는 것은, 번역의 수준과 무관하더라도, 역자의 '무지'를 에누리 없이 드러내주는 것이므로 주의해야 할 필요가 있다(그런 '사소한' 오역으로 인상을 구긴다면, 억울할 수도 있지 않은가?). 그리고, 그만한 '지명도'의 저자/작가명, 혹은 작품명이라면 요즘은 인터넷을 통해서 얼마든지 쉽게 검색하고 교정할 수 있다. 그러니까 그러한 무지와 오만을 거드는 것은 불찰과 다소간의 게으름이다. 가령, 리처드 커니의 <이방인, 신, 괴물>(개마고원, 2004)처럼 나름대로 잘 읽히는 번역서에서 프랑스의 비평가 '블랑쇼(Maurice Blanchot)'를 '블랑코'(40쪽)로 읽어주게 되면, 역자가 적어도 문학비평쪽으론 감감하다는 사실이 폭로되는 것이므로 유쾌하지 않은 일이겠다(현대미학사에서 나온 다른 책의 경우지만,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를 '바데스'로 옮기는 것도 마찬가지의 무지를 폭로한다).

비교적 양호한 번역서인 콜브룩의 <질 들뢰즈>(태학사, 2004)에서도 고유명사 표기에 대한 무신경함은  역자의 체면을 깎아먹는다. 프랑스 철학자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를 초지일관 '보들리야르'라고 옮겨준 것은 착각에 의한 거라고 쳐도, 디킨스의 소설 <위대한 유산(Great Expectations)>을 <위대한 기대>로 옮기게 되면 무지와 함께 무교양이 한꺼번에 드러나버린다. <지하생활자의 수기> 혹은 <지하로부터의 수기>로 번역된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을 <지하로부터 온 기록들(Notes from Underground)>이라고 영역본 제목을 직역하게 되면, '들뢰즈와 문학'에 대해서 역설하고 있는 저자 콜브룩과 역자는 코드가 잘 맞지 않는다고 밖에는 볼 수 없다. 조금만 검색해 보더라도 그런 정도는 충분히 '아는 체' 할 수는 있는 일인데, 역자가 고집을 부린 것은 (反들뢰즈적이게도) 문학을 너무 무시한 처사가 아닐까?

 

 

 

 

그런 경우에 조이스의 <더블린 사람들>에 나오는 단편 <고통스러운 경우(A painful Case)>가 한 부인이 기차에 치여죽은 사건을 다루고 있기에 <참혹한 사건>(김종건 역)이라고 옮겨져야 한다든가, 역자가 '레이몽 카버(Ramond Caver)'의 <짧은 컷들(Short Cuts)>이라고 옮긴 작품이 '레이몬드 카버'의 <숏컷>(집사재, 1996)으로 소설이 우리말로 번역돼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원작으로 한 영화가 로버트 알트만의 '걸작' <숏컷>이라는 사실은 '초과적인' 지식일 수 있겠다. 그렇다면,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를 다시 쓴, 노벨상 수상작가 쿳시(J. M. Coetzee)의 <포(Foe)>(책세상, 2003)를 역자가 '코에체의 <적>'으로 옮긴 것도 이해할 만하지만, 좋은 번역서를 내놓고서 굳이 이런 류의 사소한 실수들로 '무식하다'는 인상을 줄 필요가 있는지?

물론 실수라고 하기엔 좀 불성실한 대목도 있긴 한데, 카프카의 <단식 광대(The Hunger Artist>를 '굶주린 예술가'(74쪽)와 '배고픈 예술가'(227쪽)로 다르게 번역해놓고 찾아보기에서도 각기 다른 항목으로 설정한 것은 좀 희극적이다. 이 모두가 피할 수 있었던 오류들이라는 건 너무도 분명하지 않은가?(참고로, 콜브룩이 164쪽에 '돈 데릴로의 위대한 포스트모던 소설 <하얀 소음>'이라고 언급하고 있는 작품은 얼마전에 국역본이 나왔다. 돈 드릴로, <화이트 노이즈>(창비))

하여간에 이런 '사소한'(하지만, 무시하면 창피한) 오류들은 거의 모든 번역서들에서 튀어나온다. 하지만, 동구권이나 동남아 등 우리에게 표기가 생소한 지역 언어들의 표기에서가 아니라면(이런 건 좀 어렵다. 가령, 흔히 '무카로프스키'로 불리는 체코의 미학이론가의 바른 표기는 '무카르좁스키'이며, '벨라 발라즈'로 표기되는 헝가리 출신의 영화이론가는 '벨라 발라슈'이다, 등등).  웬만큼은 상식과 관례에 따라 착오/오류를 피해볼 수 있다. 이젠 피해도 좋을 러시아어 인명표기의 오류를 몇 가지 지적하면서 잔소리 같은 이 글을 마친다(나의 결론은 굳이 쓸데없이/억울하게 무식하다는 소리는 듣지 말자는 것이다. 무릇 아는 체하는 것은 지식인의 도리이다).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민음사, 2004)에 고골(고골리), 도스토예프스키와 함께 등장하는 몇 안되는 러시아인이면서, 유일하게 등장하는 러시아 철학자 '체스토프(L. Chestov)의 바른 표기는 '셰스토프'이다. 그의 책으론 <도스토예프스키, 톨스토이, 니체: 비극의 철학>(현대사상사, 1987)이 우리말로 번역돼 있다(불어로 'Chestov'를 '체스토프'라고 읽는가? 그럴 법하지 않으므로, 아마도 '체스토프'는 '상상해본 러시아어'인 듯하다). 물론 <차이와 반복>은 훌륭한 번역서이므로 이런 옥의 티가 개정판에서는 교정되기를 기대한다.

독일의 러시아문학 애호가인 엘스베트 볼프하임 여사의 <마야코프스키와 에이젠슈테인>(아카넷, 2005)은 읽을 만한 저작이자 듀오그라피의 한 전범이다. 이 책을 최근에 재미있게 읽고 있는데, 역시나 고유명사 표기는 실수들을 포함하고 있다. 좀 낯선 인명으로 1920년대 연극이론가이자 극작가로 '추츠학(Chuzhak)'이라고 옮겨진 이는 '추작'(니콜라이 추작)이라고 표기해야 옳다('추츠학'은 독어식으로 읽어준 것인가?).

올랜도 파이지스의 훌륭한 러시아 문화사 <나타샤 댄스>(이카루스미디어, 2005)도 양호한 번역서인데, 유감스럽게도 러시아사의 가장 '위대한' 황제 '표트르 대제'를 모두 영어식으로 '피터 대제(Peter the Great)'라고 표기했다(영어의 '알렉산더'는 전부 러시아어로 '알렉산드르'이다). '피터'란 표현이 입에 더 익숙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런 경우엔 '예카테리나 2세'도 '캐더린 2세'라고 표기해야 하며, '모스크바'도 '모스코우'라고 읽어줘야 일관적인 것이 된다. 이 또한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거나 러시아 전공자의 교정을 거쳤더라면 피할 수 있었던 오류들이다...

05. 09.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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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조선인 > 서재에는 꼭 근사한 카우치를!!!

언젠가 올린 적이 있는데 또 올려도 되려나요?
하지만 제가 너무 부러워하는 서재인지라.



제가 한 다리 건너 아는 사람의 서재입니다. 벽돌벽을 세우고 그 사이 나무를 놓아 서재를 만들었죠. 정말 근사하지 않나요? 욕심으로는 3면이 모두 벽돌책장이길 바랍니다. 한쪽에는 사진처럼 테라스가 있구요.

테라스와 연결된 곳에 놓일 파우치는 바로 요놈. 책을 읽다 깜박 잠이 들 걱정이 될 정도로 정말 안락해보이죠? 비록 벽돌서재도 호사스러운 파우치도 그림의 떡이지만,  꿈꾸는 게 잘못이겠습니까?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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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아키히토(明仁) 일왕의 장녀 노리노미야(紀宮·36·사진) 공주가 다음 달 11일 결혼식을 앞두고 요즘 ‘평민 되기’ 준비에 바쁘다.

5일에는 예비신랑인 구로다 요시키(黑田慶樹·40·도쿄 도 직원) 씨 집안이 왕가에 정식 청혼하는 예식이 왕실에서 열려 공주의 마음을 들뜨게 했다.

‘평민 되기’ 준비 가운데 하나는 운전면허 취득. 5월에 연습을 시작했으며 8월에 자동변속장치 장착 차량 임시운전면허를 땄다. 도로주행을 연습 중이며 이달 안으로 정식 면허증이 나올 것이라고 한다.

비상근 연구원으로 재직했던 조류연구소는 6월에 퇴직했다. 예비 신랑과 데이트를 하느라 바쁘다. 그러나 경호 때문에 데이트는 왕궁에서만 이뤄진다. 주말에 구로다 씨가 왕궁을 찾아와 일왕 부처와 함께 식사하고 담소를 나누는 게 전부다.

노리노미야 공주는 결혼과 함께 많은 변화를 겪게 된다.

왕실전범에 따라 출가 후 왕족 지위를 잃게 된다. 지금까지는 국가예산 중 왕실비로 지내왔지만 앞으로는 독자적인 생활을 해야 한다. 물론 공주는 결혼으로 왕족 신분을 잃게 될 경우 지급되는 ‘사회정착지원금’ 성격의 일시금은 받는다.

이름도 남편 성인 구로다에 유아명인 사야코를 붙인 ‘구로다 사야코(黑田淸子)’로 바뀌게 된다. 왕족은 투표권이 없지만 결혼 후에는 보통사람처럼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다.

결혼식은 도쿄(東京) 데이코쿠(帝國)호텔에서 열리며 피로연은 150명가량 초청해 조촐한 차 모임을 갖는 것으로 대신할 예정이다.

 

 

적응 잘 하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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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nda78 2005-10-06 16: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저도 잘 할 거라 생각합니다.
 

m(_ _)m  이거 누가 새겨놓으신건가요? ㅎㅎㅎ

그대로 출판하신건지, 아님 제가 가진 책에만 '특별하게' 있는건지 궁금합니다.

'희소성' 있어요... ㅎㅎㅎ  좀처럼 보기 힘든 문양이네요.

50년 후에 수집상들이 눈독들일 수 있을지도...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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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은아이 2005-10-05 1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럴까요? 제가 보내드린 책에만 연필로 따로 그린 거지요. 헤헤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