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한 농부가 37년간 하루도 빠짐없이 일상을 기록한 농가일기인 '승총명록(勝聰明錄·사진)'이 경남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돼 그 내용이 새삼 관심을 모으고 있다.
고성군은 조선 후기 월봉(月峯) 구상덕(1706~1761) 선생이 영조 1년(1725년)부터 영조37년(1761년)까지의 농가일기인 고성군 '승총명록'이 경상남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됐다고 5일 밝혔다.
이 일기는 고성군 거류면 송산리에 살고 있는 구씨 문중에 보관돼 있던 것을 지난 1995년 향토사학자들이 발굴했으며,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이 '한국학자료총서7'로 펴내는 등 조선후기 경제사회상을 연구하는 귀중한 사료로 평가받고 있다.
이 일기 중 물가를 기록한 대목을 보면, '가문 해이나 답곡에는 해가 없어 작황은 평년으로 미가가 일냥(一兩) 약 5두(斗)였다'(1727년 8월6일), '미가는 일냥 당 약 4두였다'(1728년 4월3일), '역병과 가뭄, 병충해까지 겹쳐 미가는 일냥에 약 1.8두였다'(1732년 4월11일)고 기록돼 있다.
이 기사로 볼 때 영조 당시 쌀값도 현재와 같이 기후상황이나 병충해 등에 의한 그해의 풍년과 평년, 흉년(풍년 일냥=6두, 평년 일냥=5두, 흉년 일냥=4두)에 따라 변동된 것을 알 수 있다. 쌀 1두(말)는 대략 20㎏이며 요즘 시중가는 4만 원 정도. 이로 계산해보면 평년 1냥으로 쌀 5두를 살 수 있었으므로 1냥은 현재 화폐가치로 환산하면 약 20만 원이다.
남성 노비의 가격이 쌀 300~400두였다는 내용을 볼 때 요즘 돈으로 치면 120만~160만 원에 해당돼 노비 값은 상대적으로 쌌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또 이 일기에는 당시 생활상을 들여다 볼 수 있는 내용이 상세히 기술돼 있다. 1756년 8월23일 기록을 보면, '두 달 째 되는 윤 9월24일 산에 하관할 때까지 친척과 마을 사람들이 상례를 치르는데 필요한 흙을 파고, 운구를 담당하는 노역을 부조하고, 과일 쌀 백지 명태 홍합 호두 유자 등 물품을 부조했다'고 적혀 있어 우리 민족의 상부상조 문화를 엿볼 수 있다.
또 1733년 봄에 기록한 '시중의 행인들을 살펴보니 태반이 귀신의 몰골이다. 도로에는 굶어죽은 시체를 묶어놓은 것이 마치 난마와 같이 널려 있다. 개벽 이래로 어찌 이러한 세월이 다시 있었겠는가…'란 내용은 당시 삼정문란으로 인한 조선후기 피폐한 농촌의 참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 일기를 연구한 하기호 향토사학자는 "당시 민간인의 눈으로 농촌의 실태를 정확히 기록해 조선시대 농촌의 구조적인 문제를 연구하는 소중한 자료"라고 설명했다. 안진우기자 |